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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기는 2005년 당 계획재정부장에 기용되면서 박봉주 당시 총리와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양대 경제브레인’으로 활약했고,2007년 박봉주가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된 이후로는 홀로 김 위원장의 경제정책을 보좌했다.
그는 2007∼2009년 3년간 경제관료 중에는 유일하게 김 위원장의 공개활동 수행 ‘톱 10’에 들 정도로 김 위원장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처럼 ‘잘 나가던’ 박남기였지만 경제관료의 실권이 극히 제한적인 북한 체제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보수적이고 보신적인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전문가는 이와 관련,“박봉주 총리가 한 때 김 위원장의 신임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경제정책을 펴다 당과 군부의 견제로 밀려난 과정을 박남기는 옆에서 지켜봤다”면서 “시장경제에 역행하는 화폐개혁의 부작용을 일부 예상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성향에 비춰볼 때 자기 주장을 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해남도 해주 출신으로 알려진 박남기는 특별한 가정배경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머리가 좋고 학업성적도 우수해 6.25전쟁 때 체코 프라하공대 기계공학과로 유학까지 다녀왔다.
남달리 숫자에 밝았던 그는 해박한 경제지식과 높은 책임감,성실성 등을 인정받아 1972년 금속공업성 부상,1976년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1984년 노동당 제2경제사업부(군수공업 담당) 부장 등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특히 1986년에는 고 김일성 주석의 직접 지시로 국가예산을 기획하는 국가계획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년 뒤 노동당 경공업담당 비서로 승진하기도 했다.
한때 평양시 행정경제위원장(1993년)을 거쳐 황해북도 지구계획위원장(1997년)까지 밀려나 권력의 전면에서 사라지는 듯했던 그는 1998년 ‘김정일 1기 체제’ 출범에 맞춰 국가계획위원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지만 결국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정책 실패의 ‘희생양’으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