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 속에는 언제부터인가 목포라는 도시가 아롱져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육지의 도시인 까닭일까.
호남선 열차의 종점이고, 서해안 고속도로의 종점인 까닭일까.
국토 중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날아가지 않는 한 목포는 서울에서 가장 먼 도시임에는 틀림이 없다.
젊었던 시절에 광주에 있는 전남대학교에서 3년 반 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으나, 나는 불행히도 가까이 있는 목포를 샅샅이 살펴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던 지난 세모의 날에 나는 불현듯 아무런 준비 없이 여장을 챙겨가지고 목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일기 예보는 계속해서 호남지방 폭설주의보를 터뜨리고 있었다. 기차 타고 가는데 무슨 폭설이 문제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포까지 3시간 20분, 천안에서 회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서대전 논산으로 빠지기 때문에 시간이 엄청나게 절약되었다.
천안을 지나면서부터 눈발이 세어져서 시야가 오직 눈 뿐이었다. 그야말로 시계 제로였다.
년말 세모의 날이라 가끔가다가 지인들로부터 핸드폰메일이 들어왔다. 나는 즉각적으로 시계 제로라는 문자를 보냈다.
눈발 속을 헤매는 내 영혼은 무한한 공상의 공간 속을 날았다.
알 수 없이 신비롭고 내 공상의 공간을 무한히 자극하는 목포라는 항구도시에서 보낼 제야의 밤을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남들은 몇주일씩, 몇달씩 외국여행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 겨우 2박 3일간의 국내 여행에 가슴이 뛰다니...
깜박 잠으로 떨어졌다가, 기내 도시락을 사서 씹다가, 시계 재로로 쏟아지는 눈발 속으로 내 무한한 공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나는 시간을 보냈다.
용산, 천안, 서대전, 논산,익산, 정읍, 장성, 송정리, 목포...눈 속에 파묻힌 호남의 도시들을 기차는 잘도 달리고 멈추곤 했다.
11시에 출발한 기차는 2시 20분에 목포역에 닿았다.
잔뜩 찌프린 하늘에서 하염없이 눈이 내렸다. 목포역은 내가 처음 오는 곳이다. 학생들을 데리고 배 편으로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 위해 광주에서 직접 여객선터미널로 온 적은 서너번 있었으나, 외지에서 기차타고 목포역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숙소로 예약되어 있던 호텔이 유달산 아래 구 목포의 동쪽에 위치한 신항만이라 택시비가 2만 5천원이나 나왔다.
마구 정신없이 달리다가, 기사양반이,외지에서 온 것 같은데 이왕에 비싼 요금내고 택시 탔으니, 5만원 내고 이순신 장군의 울돌목이나 보시지요이잉? 했다. 그러자고 했다. 이 눈 쏟아지는 세모의 날에 위대한 장수의 목숨을 건 해전의 현장을 보는것이야 말로 정말 가슴 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택시가 목포동편 신항만의 바닷가 숙소로 가다가 느닷없이 진도입구 울돌목으로 달려왔다.
멀리서 보이는 진도대교는 한 십여년 전에 왔을 때보다 모습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똑같은 다리 하나가 더 생겨 쌍다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리 건너 오른편 진도 입구 바닷가에는 울돌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거대한 동상이 새로이 서 있어서 웅장하고 신비스럽기 짝이 없었다. 동상의 장군도 눈발을 맞고 있어서 자태가 아주 흐려 보였다.
숙소로 와서 창문을 열었더니 저 멀리 북서쪽으로 바다건너 유달산 아래 목포항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온통 멀고 먼 눈의 세상이었다.
눈 덮힌 시가지와 유달산에는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광주 하면 무등산이듯이, 목포 하면 유달산이다.
목포 구시가지의 북서편에 자리잡고 있고, 그 산록에 펼쳐진 항구가 목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드넓은 식당홀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외국인들도 흔했다.
현대 한라그룹에서 지은 호텔인데, 지금은 현대중공업이 소유주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현대 직원들과 거기에서 근무하는 외국인들인 것 같았다. 숙소 바로 아래에는 현대중공업이 여기 호남에 새운 조선소인 현대삼호조선소의 입간판이 크게 붙어 있었다.
추위와 눈발에 떤 탓이었을까, 저녁식사 후에 잠으로 떨어졌다. 2시경에 잠이 깨었는데, 창문 너머로 바다건너 눈발 속에 목포시가 유달산 아래 잠들어 있었다.
목포는 현대중공업이 진출한 외에도, 얼마 전에 전라남도 도청이 옮겨와 그런대로 활기를 띄었다. 도청이 무안으로 갔지만 무안은 바로 목포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목포의 방계지역이다.
더 잠들지 못하고, 새벽을 가슴에 품고 방안을 맴돌다가 7시 42분 일출시간을 맞았다.
도지사가 와서 스피커를 들고 무슨 축하의 연설을 하고 있었다.
이 멀고 먼 바닷가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다니. 물론 해맞이하러 왔겠지만 참으로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잊지 못하면 불행을 맞게 된다.
신년 원단의 새벽에 수평선으로 떠오른 해를 봄으로써 사람들은 누구나 옛 것을 잊고 새 것을 맞이하러 할 것이다.
옛 것은 될수있는대로 어서 잊어야 한다.
특히 인간관계는 그러하다.
인연이 다된 인간관계는 어서 잊어 버려라.
<내가 마지막 본 빠리>라는 오래된 영화가 있는데, 과거 속의 여자를 잊지 못하고 수십년 전에 떠나버린 빠리로 다시 찾아왔다가 불행 속에서 허덕이는 새로운 인간관계에 말려들어 불행한 일생을 마감하는 스토리이다.
이차대전에 참여했다가 승전군이 된 벤존슨(배우)은 흥분과 승리감 속에서 빠리의 빠걸 엘리자베스 테일러(배우이름)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여 딸 하나를 얻는다. 그러나 낭만은 곧 사라지고 냉엄한 현실 속에서 허덕이다가 아내는 부유하고 매력적인 로저무어(배우이름)와 사랑에 빠진다. 남편은 아내를 원망하지만, 막상 아내는 변심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녀는 남편을 설득하려 집 나간 그를 찾아 헤매다가 추운겨울에 심한 감기에 걸리고 결국 폐렴에 걸려 죽고 만다. 남편은 고향 폴란드로 돌아가는데, 아내의 언니가 딸을 맡아 기른다. 십여년이 흐른 후에 그는 딸을 찾고 아내의 흔적을 찾아 왔다가 처형에게서 매몰찬 냉대를 받고 딸마저 영원히 빼앗겨 버린다. 실의에 찬 그는 빠리의 뒷골목을 헤매다가 폐인이 되는 신세가 된다.
영화 속의 주인공이 한국의 해맞이 대열에 끼었더라면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과거를 잊고 새로운 한 해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나이 탓일까, 지나친 회고에 젖는 경향이 있다. 과거를 반추하여 그리움에 빠지는 것은 어느 정도 금해야 한다. 찬란한 미래를 결의와 호기심으로 자신의 심혼을 채워야 한다.그것이 진정한 해맞이이다.
해맞이꾼들은 줄잡아 300명은 되는 것 같았다. 떡국과 커피가 제공되었다.
도지사를 비롯한 지방 정치인들의 공치사가 스피커 음으로 퍼지는 사이에, 해가 수평선 저 멀리 솟아 올랐다.
모든 걸 잊고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살고 사랑하자- 무슨 이런 탄성이 입술에 맺혔다.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 천천히 아침 식사를 들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해수면에는 아침햇살이 찬란히 투명한 겨울 안개 속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였다.
다시 눈발이 퍼부어지는 속을 택시를 기차역으로 몰았다. 어제 도착시 보아두었던 시티투어에 참여할 작정이었다. 그것이 9시부터 오후 3시까지였다. 참가비는 3000원이었다. 가장 싸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낯선 도시를 일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시티투어인 것 같았다.
전문해설사가 따라붙었다.
먼저 혼마찌(본정통)로 갔다.
일본인들이 일제시 호남평야의 쌀을 앗아가는 거점으로 목포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 유달산 아래 지역을 간척하여 일인 5천명 가량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여기 본정통에 조선 8개 동양척식주식회사들 중에서 가장 큰 목포동양척식주식회사를 지었고,그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는 르네상스식 건물이었다. 지금은 아래 층이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고, 위층은 일제의 잔학상을 담은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옛 일인들 영사관을 들러보았다.
이어서 유달산을 답사하였다. 노적봉의 전설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리고 유달산은 이순신장군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공원에는 장군의 입상이 세워져 있었다. 국제조각공원을 돌아보고 하산하여 점심을 들었다.
오후에는 유달산 남동쪽에 위치한 역사문화의 거리로 내려와, 해양박물관에서 완도선과 신안선에서 발굴한 도자기들과 800년 이상된 옛 선박들의 잔해를 구경하였다.
다른 분들은 가까이 있는 수산시장으로 회 먹으러 가버렸으나 우리 부부만 남아, 문학박물관과 역사박물관과 역사 도서관, 그리고 남농 허건 기념관들을 둘러보았다. 문학박물관 입구에는 내가 모교 재학시절 불문학과 일학년 때 사학년이었던 김현 교수의 얼굴 조상이 전시되어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해방 이후 최고의 문학평론가로 꼽는다.
작고문인들을 아끼는 여기 호남인들의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든 관람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목포까지 왔다가 회 한 번 먹어보지 못하고 떠날 수는 없다하여 우리 가족만이 바닷가로 가서 회를 시켜 먹었다.
신년 원단의 하루가 저물었고, 2일에 고속버스로 광주로 올라왔다.
내가 대학 선생이 되고, 소설가로 데뷰하고, 결혼하고, 두 아들을 얻은 곳이다.
경상도가 고향인 내가 여기 호남의 수도인 광주에서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었다.
전남대학교를 둘러보았고, 내가 근무하던 사범대학에 들러 과거 내 연구실이던 곳을 찾아보았다.
학교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거기에서 택시를 타고, 내 쌍동이 아들 놈들이 태어난 전남대학교병원으로 몰았다.
5.18 광주항쟁의 본거지인 구 광주도청 건물 바로 뒤에 병원은 옛과 같이 그대로 서 있었으나 건물동의 위치와 숫자가 너무나 바뀌어 구별이 안되었다. 그 때 산모가 산후가 아주 좋지 않아 큰 변을 당할 뻔한 과거를 생각하니 지금도 눈 앞이 아찔해져 왔다.
당시 내가 모시고 같이 근무했었던 김 교수님을 댁으로 방문하였다.
심근경색을 앓아 신수가 말이 아니었다.
사람은 나이가 차면 이 지구를 떠나주어야 하는 것일까. 그래야만 다음 세대가 주인공이 되어 그들의 새로운 삶을 꾸릴 공간과 지면을 확보하는 것이리라.
어제 목포에서 마련했던 남농 허건 화집을 선물로 드렸다. 실질적으로 나를 대학에 데뷰시켜주신 분이다. 어서 쾌유하시기를 기원할 뿐이다. 떠나는 나의 손을 잡고 선생님은 광주 특산 포도주 두 병을 건네주셨다. 과거를 잊지 못하고 다시 찾은 나는 정말 뭔가 부족한 사람인가. 선생님 어서 떨치고 일어서세요, 나도 선생님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내가 마지막 본 빠리>가 아니라, <내가 마지막 본 광주>란 말인가. 나는 5.18이 있던 해 직장을 서울의 단국대학교로 옮겼다.
어제는 목포, 오늘은 광주이다.
이순신 장군의 휘하 수병들은 대부분 전남 바닷가에서 고기잡이 하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너무나 잘 싸웠다. 호남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지나간 세월 속의 광주를 회상하며, 충장로로 걸어들어, 커피 한잔을 마셨다. 눈은 그쳤지만 하늘은 계속 흐려 있었다.
5시 30분 기차를 타고 광주를 떠났다.
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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