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다 서너번 씩 한 중국 여행을 이제서야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전공이 프랑스 문학이라, 시간이 나면 먼저 프랑스로 갈 궁리부터 했던 삶이었다.
프랑스에 가지 않으면 지인들이 더러 있는 미국으로 가게 마련이었다.
나에게는 웬지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중국 여행, 결국 이 늦은 나이에 하게 되었다.
나의 과거 직장이었던 단국대학교 명예교수팀이 같이 움직였다. 참여한 사람은 21명이었다.
여행의 직접적인 동기는,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에서, 근 30년 넘는 세월을 통해 완성한, <漢韓대사전>(전 15권)을, 북경대학, 심양대학에 증정하기 위함이었다.
사학자나 동양학자가 아닌 내가 보아도, 이 사전은 대단한 역작이다. 중국의 고전의 어휘들을 한국어로 설명함을 목적으로 하는 사전인데, 중국어 원전에 해박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9시 반에 인천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열시 반(현지시간, 한국시간 11시 반)에 북경에 도착했다.
공항에 나온 <참좋은 여행사>의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점심을 먹었다. 배가 고픈 차라 기름진 중국 음식을 많이 먹었더니 속이 영 좋지 않았다.
신종 풀루 예방을 위해, 화장실로 가서 가지고 간 가글과 소독수로 입안과 손을 부지런히 닦았다.
오후에 북경대학으로 옮겼다.
외사처장의 영접을 받았고, 이윽고 북경대학 총장이 나왔다.
사전 전달식을 가졌고, 집단 촬영하였고, 한 20분 동안 환담하였다.
조금 서먹하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바뀌어갔다.
사전에 연락을 받았겠지만, 이들은 전공은 서로 달랐지만, 이 사전의 위력을 감지한 것이다.
세계최고의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북경대학 교수들이고 보면, 자신들도 이루기 어려운 문화사업을 한국의 학자들이 이룩한 사실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그들은 놀라기 시작했고, 학교 여기 저기에 <단국대학교 명예교수단 열렬 환영>이라는 전자판 격려문이 들어왔다.
그리고 총장은 만찬을 제안하였다.
교수단을 대표하여 단국대학교 명예총장인 장충식 총장의 인사가 있었다. 중국통인 장총장의 집념이 없었다면 이 사전은 만들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교수단 단장이신 김유혁교수(현 금강대학총장)가 교수 한 분 한 분을 소개하였다.
우리는 총장의 제의를 수락하고, 학교 투어에 나섰다.
130만평의 부지에 도서관은 500만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서양에서 행하는 세계대학 평가에서 북경대학은 언제나 서울대학을 서너단계 앞선다. 그 실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북경에는 북경대학 이외에 북경대학을 오히려 능가하는 청화대학이 있는데, 이공계 특화대학이다.
청화대학은 북경대학생들이 조선의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으킨 반외세청년운동인 5.4운동으로 무장세력화되어 외국인 배척운동으로 번졌다.
그래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외국인들 축출운동이 벌어졌고, 전쟁으로 번졌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외국인들은 잔인하게 배상금과 도서의 할양등 이윤을 챙겼지만, 미국만은 배상금을 가지고 가지 않고, 북경에 대학을 세워 주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청화대학이다.
오후 4시부터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들과 면담과 간단한 세미나가 이루어졌다.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단에서는 조돈화 주임교수의 인사가 있었다. 일견 보아, 교수단에는 엄격한 서열이 있어서, 주임교수의 위상이 대단한 것같았다.
북경대학 철학과는 교수가 백 명이 넘는 작은 대학이다.
이들은 다시한번 우리들의 사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다들 서로들 추켜세우는 덕담정도의 세미나였으나, 외람되게 본인이 이의를 제기 하였다.
나는 언제 북경대학에 다시 올지 알 수 없고, 다시 오더라도 철학과 교수들을 이렇게 열 명이상 집단적으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평소에 생각하던 질문을 한 가지 하겠다고 청을 했다.
분위기가 가라앉고 다들 긴장하는 눈치였다. 사실 나는 중국 여행을 위해 오랫 동안 나름의 준비를 하였다. 내가 읽은 중국 관련 서적들은 <여인으로 보는 중국사>< 중국황제열전><청사><명청문화사><이야기 중국사> 등이었다.
-중국은 격동기에는 언제나 제자백가 식의 철학자들이 나타나 여론을 주도하였다. 춘추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비롯하여 청 나라 하대의 양계초 등의 양무운동등도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철학자가 있어서 13억 인구의 5천년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공자를 이름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나라는 없다. 우리 조선에서는 사회격동기에 철학자가 사회의 나갈 길을 제시하여 갈 길을 제시하는 경우는 없었다. 영국의 해적기질, 일본인들의 장사꾼 기질, 독일의 싸움꾼 기질, 프랑스인들의 논나니 기질, 한국사람들의 양반기질이 각 민족에 붙일 수 있는 기질적인 특징이라면, 중국인들에게는 말 많은 기질 즉 철학성이 특유의 기질이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의 질문을 받은 철학자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토로하였다.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나의 질문은 그들의 자존심을 높여줌과 동시에 이야기의 봇물을 트는 구실을 하였다.
세미나는 장장 두 시간 연장되었다.
나는 북경대학 한국어문학과 주임교수인 왕 교수와 사진 촬영하고 나의 작품을 보내기로 약속하였다. 서울대학에서 학위를 한 여성분이었다.통역은 대만대학에서 공부하였고(9년), 지금은 북경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으며(9년), 중국 무한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한국인 김주창교수였다.
간신히 종결을 낸 세미나에 이어 북경대학내 영빈관에서 만찬이 벌어졌다.
북경대학에서는 최선을 다한 대접이었다. 이것은 우리 은퇴한 교수들에 대한 대접이 아니라, 단국대학 동양학 연구소 연구원 30명이 3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려 만든 한한대사전에 대한 대접이었다.
숙소인 메리오트 호텔로 돌아와 방 배정을 받고 올라가니 피로가 몰려와 그대로 뻗어 버렸다. 나는 김주창교수와 룸메이트였다. 이튿날은 관광에 나섰다.
먼저 자금성을 구경하였다. 그 규모의 장대함은 사실 베르사이유를 능가했다. 베르사유는 정원이 아름다울 뿐이지 건물은 단독 한 채 뿐이다. 그러나 자금성은 오문, 태화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건청궁, 곤녕전, 어화원, 신무문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거대한 단독 궁전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점심을 먹고, 만리장성 방문에 나섰다. 회원들 중에 만리장성 방문을 하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른 분들은 정 교수 때문에 그놈의 만리장성 방문을 또 하게 되었다고 투덜됐다. 그러나 다들 나보고 잘 보았는냐고 위로의 말을 던졌다.
일행 중 내가 나이가 가장 어렸다. 내가 지난 2월달에 정년을 했기 때문이다. 전체가 21명이라, 두명 씩 방 배정을 받으니 나는 언제나 독방을 쓰게 되었다. 다들 웃으면서 독방 쓴다고 축하해 주었다.
만리장성에서 내려와 써커스 구경을 하였다.
중국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인구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가족 일인 아이 갖기 운동을 하고 있다 .법으로 제정되어 있다. 그러나 빈부의 차이, 공산당 일당 독제의 체재 특정상, 권력층 부유층이 늘어나 있고, 이들은 세컨드를 두어 많은 아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아이들을 숨기거나 버리기도 한다. 특히 딸을 낳으면 몰래 버리게 된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이 서커스단으로 흘러든다는 것이다.
극장의 좌석의 배정에서도 엄격한 신분상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창거리(인사동), 왕부정거리(명동거리)의 관광은 밤이 늦어 생력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아, 방에서 간단한 아침 운동을 하였다. 식사가 기름져 부담스러웠다. 가글과 소독수로 계속 몸을 청결히 했다.
비행장으로가서 심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동북 삼성의 주성인 요녕성의 주도 심양에 가기 위해서다.
우리는 북경대학에서 너무 지나친 환대를 받아, 요녕대학에서도 그런 대접을 기대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한 시간 10분 걸려 심양(중국 발음 센양)에 도착했다.
심양대학에 이르러 국제관계처 직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총장은 아프리카 여행중이고 부총장이 나와 의식을 진행했다.
장충식 총장은 심양이 자신의 어린시절의 성장지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심양대학 관계자들이 오히려 더 북경대학 교수들 보다 우리 사전에 대해 놀라움을 나타냈다. 자기 나라 오천년 역사가 배출한 역저들을 이 잡듯이 분석해놓은 우리 사전을 보고 이들은 한결같이 혀를 내둘렀다. 백만평이 넘은 요녕대학교 신캠퍼스는 오히려 우중충한 북경대학보다 더한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당서기라는 직책의 사람이 나타났는데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50대 중반의 신사였다.
중국은 중국공산당 일당 정치체제이기 때문에 야당이 없다. 그래서 당에서 나온 사람의 파워는 상상이상이다. 대학의 경우, 총장들이 이들 대학당서기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왕산이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대학구내에 있는 호텔에서 만찬을 제의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52도가 넘은 빽알을 원샷으로 마시는 그의 호기에 다들 혀를 내 둘렀다. 역시 뙈놈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영웅 호걸을 주량으로 따지는 중국인들의 오랜 관습을 보는 듯했다.
나는 국제관계학중심(센타)의 책임자들과 한국학 책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의 장편 소설 20편을 여기에 기증하겠다는 언약을 했다. 당 서기의 호기에 눌려 빽알을 마신 탓으로 정신이 혼몽하여, 숙소인 쉐라톤 호텔로 돌아와 녹아 떨어졌다.
나도 수없이 외국 여행을 했지만 이렇게 5성호텔에 연속적으로 투숙하기는 처음이었다. 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장충식 명예총장의 호의에 의한 것이었다.
이듣날, 청의 전신인 후금의 창시자 누리하치의 아들 청태종(홍타이지)의 무덤을 보러갔다.
이 사람은, 우리 나라에 발을 디밀어넣은 유일한 중국 황제이다. 그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우리 나라 땅으로 들어왔고, 인질을 3만명이나 잡아갔다. 이들 인질을 잡아죽이거나 서양인들에게 팔아먹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아갔다. 그러니 이런 짓을 한 곳이 베이징의 자금성이 아니고, 요녕 성 심양 시에 있는 고궁에서 였다.
후금의 3대 왕 강희제는, 명 나라의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이자성의 난을 격파했다. 그리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청 이라고 나라이름을 바꿨다. 그래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과 밀접한 중국황실은 청의 초대인 누루하지와 홍타이지 즉 태조와 태종이다.
누루하치의 무덤(동궁)은 시내에서 멀리 있다하여 생략하였다.
무슨 동굴을 세 시간 이상 소요하여 보러간다고들 하여 강력 반대했다. 여기 멀고 먼 심양까지 온 이상, 동굴보다가는, 누루하치와 청태종의 궁궐을 보는 것이 정석이라고 주장하여 관광뻐스의 머리를 돌리게 했다. 내가 너무 나선다고 할까봐 극도로 조심하였다. 그러나 일은 일이다.
동굴 구경을 위해 누루하지와 청태종의 고궁 관람을 희생하다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장작림과 장학량 부자의 고가를 볼 것을 주장하였으나 시간이 부족했다.
동굴 관람을 생략했기 때문에 고궁을 보고서도, 시간이 남아 요녕성 박물관까지 관람하였다.
6시 45분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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