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사형수였던 장군 [ 5 ]

鶴山 徐 仁 2009. 7. 17. 13:19

august 의 軍史世界

 

사형수였던 장군 [ 5 ]

 

 

 

백의종군한 사형수

 

스탈린이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냉혈한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소련군을 제대로 지휘할 고급 장성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유럽을 석권 중인 독일과 맞붙는다면 결코 승리를 장담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최악의 경우 스탈린이 피를 묻혀가며 어렵게 이뤄놓은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잃을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잔인한 스탈린은 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하였습니다 ]

 

결국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나 주코프의 말이 백번 옳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반혁명세력으로 몰아 숙청하였던 수많은 장성들을 1940년 말 부터 다시 불러들이는데 동의하였습니다.  수용소에 있던 로코소프스키도 이때 구사일생으로 죄수복을 벗은 후 예전의 소장 계급장을 달고 제9기계화군단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습니다.

 

[ 로코소프스키는 기갑부대 지휘관으로 복귀하였습니다 ]

 

하지만 스탈린이 강제로 씌어놓은 죄까지 사면당한 것은 아니어서 만일 지휘에 문제가 있거나 흠집만 잡히면 즉각 사형을 시킬 수 있는 미결수 신분이었습니다.  결국 죽음의 수용소를 빠져나오기는 하였지만 로코소프스키는 항상 죽음을 목전에 두고 부대를 지휘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고 그가 가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당에서 파견한 정치국원 쫓아다니며 감시하였습니다.

 

[ 하지만 로코소프스키는 여전히 사형수 신분이었습니다 ]

 

대규모의 기갑부대장의 위치에 오른 로코소프스키는 투하체프스키의 숙청과 함께 용도 폐기되었던 종심전투교리를 실현하고자 부대를 재배치하는 등 노력을 하였으나 그와 관련하여 그동안 군부 내에서 연구되어 온 수많은 자료가 사라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때 이런 그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던 인물은 석방에 앞장서기도 하였던 주코프였습니다.

 

[ 목숨을 구해준 주코프가 도움을 주었습니다 ]

 

주코프는 비슷한 시기 극동에서 로코소프스키와 함께 근무하여 많은 교류를 하였기 때문에 로코소프스키의 충직함과 근면함 그리고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장차전에서 기갑부대를 돌파의 중핵으로 보는데 사상을 같이하였고 특히 주코프는 1939년 노몬한 전투 ( Battle of Khalkhin Gol ) 에서 기갑부대를 앞세워 일본 관동군을 격파함으로써 종심전투교리를 시현해 본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노몬한전투에서 소련 기갑부대(上)에게 일본 관동군(下)은 뜨거운 맛을 보았습니다 ]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전 전선에 걸쳐 소련군이 붕괴되자 1941년 6월 로코소프스키는 주코프가 지휘하던 서부전선군 ( 독일의 집단군개념 ) 의 우익인 제16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여 스몰렌스크 ( Smolensk ) 를 방위하여야 했습니다.  스몰렌스크는 베를린에서 바르샤바와 민스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로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 독일군의 공격으로부터 스몰렌스크를 방어하여야 했습니다 ]

 

이때 스몰렌스크를 공격한 독일군 부대는 중부집단군이었는데 선봉은 독일군 중에서도 최강의 화력과 기동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던 호트의 제3기갑집단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이었습니다.  이들 부대들은 스몰렌스크의 양측 외곽을 파고들어 제19, 20, 24, 32군으로 이루어진 도심의 30만의 소련군을 고립시켜 항복을 받는 대승을 이끌었는데 이때 로코소프스키의 제16군은 간신히 외곽으로 탈출하여 독일의 후속진격을 차단하는데 성공합니다.

 

[ 포위망을 뚫고 그의 부대를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


비록 일시적으로 독일의 진공을 차단하였지만 이것은 사실 로코소프스키나 소련군이 작전을 잘 펼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독일이 갑자기 키에프 ( Kiev ) 함락을 위하여 중부집단군의 주력부대를 우크라이나로 돌렸기 때문에 시간을 벌어서 얻은 결과였습니다.  키에프를 함락시키고 전선을 정비한 독일군은 잠시 중단되었던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재개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키예프 점령 후 독일의 재진공이 개시되었습니다 ]

 

이제 모스크바의 함락은 시간문제로 보였을 만큼 절체절명의 위기였고 이를 방어할 주코프와 주요한 방어축을 담당하고 있던 로코소프스키는 절망적인 이 도시를 어떻게는 사수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키에프를 함락시켜 70만의 소련군을 섬멸하는 쾌거를 독일은 이뤘지만 이를 위해 멈칫하였던 순간은 독소전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모스크바는 키에프를 희생시킨 대가만큼 시간을 얻었고 이제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