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
사형수였던 장군 [ 3 ]
기갑부대의 잠재력을 깨달은 선각자
1926년 로코소프스키는 몽골군의 기병대 고문관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는데 당시 몽골은 소련에게 상당히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왜냐하면 소련은 전 세계에 공산주의를 전파하는 노력과 지원을 하여 한때 프랑스, 이태리, 헝가리, 폴란드, 독일 같은 여러 나라에서 가능성을 보았지만 정권창출에는 결국 실패한 반면 극동의 외몽골은 역사상 두 번째로 공산국가가 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몽골박물관에 전시 된 1930년대 몽골군의 BT-5 전차 ]
그런데 외몽골 지역은 만주를 차지하고 중국대륙으로 진출을 노리던 제국주의 일본은 물론 淸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한 중국정부도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애쓰던 지역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淸의 고토에서 독립하여 어렵게 탄생한 몽골의 안위가 불안하였고 그만큼 몽골 독립의 힘과 배경이 되었던 소련의 관심과 지원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 외몽골지역이 몽골인민공화국으로 탄생하여 세계에서 2번째 공산국가가 되었습니다
여담으로 외몽골은 淸의 강역 중 티베트, 위그르와 달리 유일하게 현재 독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그는 1928년까지 몽골에 머무르면서 몽골군의 육성에도 힘을 기울임과 동시에 국경을 자주 건드리던 일본세력을 저지하였고 마적떼와 같은 군벌이나 도적들의 도발도 단속하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이후 동북지역의 철도를 군벌로부터 보호하여 달라는 중국정부와 소련정부의 협정에 따라 1930년대 중반까지 극동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 로코소프스키는 극동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
제7기병사단장과 제15기병사단장을 거쳐 1937년 제5기병군단장으로 승승장구하였던 그는 소련군내에서 기갑부대의 잠재력을 제일먼저 깨달은 인물들 중 하나였습니다. 영국의 퓰러나 리델하트, 프랑스의 드골, 독일의 구데리안처럼 그는 장차전의 주역은 강력한 기갑부대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기동력을 갖춘 대규모의 집단화된 기갑부대 양성을 주장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1930년대 소련의 주력전차 중 하나였던 BT-7 ]
당시 적군 내에서 이러한 혁신적인 주장을 하였던 인물로는 내전당시 적군을 이끌어 총참모장까지 오른 투하체프스키 ( Mikhail Nikolayevich Tukhachevskii 1893∼1937 ) 가 대표적이었는데, 그는 제1차대전에서 경험하였던 지리 한 참호전을 회피하는 수많은 교리를 연구하여 지금도 소련군의 핵심교리로 인용되는 종심전투교리 ( the theory of deep operations ) 를 주장하였습니다.
[ 악마에게 희생된 선각자 투하체프스키 ]
이 이론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강력하고 집중화된 전력으로 돌파구를 열은 후 속도를 이용하여 종심을 타격하여 승리를 이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돌파의 핵심으로 공병, 포병, 기갑, 항공 등 돌파에 필요한 핵심적인 전력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충격군 ( Shock Army ) 이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기갑, 기계화부대를 육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로코소프스키도 기갑부대의 가능성을 깨달았습니다 ]
로코소프스키도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는데 비슷한 시기 다른 국가들도 그랬지만 赤軍 내에서 이들의 앞서간 주장을 모두 동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전통적 교리를 고수하였던 많은 기존 지휘관들과 충돌을 가져왔는데 특히 기병대의 중요성을 계속 주장한 부됸니 ( Semyon Mikhailovich Budenny 1883 ~ 1973 ) 같은 인물들과는 서로 인격적인 비난도 감수할 만큼 격렬한 논쟁을 하였습니다.
[ 이후 정적으로까지 비화된 부됸니
그의 이름을 딴 종마까지 개발하였을 만큼 기병에 대한 애착이 컸습니다 ]
여담으로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해 교통수단으로 말을 사용한 것은 약 1만 년전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증기기관차가 등장함으로써 인간은 처음으로 말보다 빠른 교통수단을 이용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만큼 동력기관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생소한 물건이었습니다. 즉 교통수단으로 오래 사용하여왔던 말을 대체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군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오랜 세월 이어진 기병대에 대한 집착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
그때까지 기동력의 핵심이었던 기병대가 그 역할을 계속 할 것이라 주장하는 사상을 가진 보수적인 지휘관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고 때문에 새로운 의견을 내세우는 쪽과의 충돌은 필연적 일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를 격렬히 비난하는데 앞장 선 로코소프스키의 고집스런 태도는 얼마안가 그를 사형수가 되게 만드는 빌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출처] 사형수였던 장군 [ 3 ]|작성자 august
'軍事 資料 綜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형수였던 장군 [ 4 ] (0) | 2009.07.16 |
---|---|
이라크 Ma'dain에서 작전중인 미 육군 82공수사단 병사들 | (0) | 2009.07.13 |
사형수였던 장군 [ 2 ] (0) | 2009.07.13 |
사형수였던 장군 [ 1 ] (0) | 2009.07.06 |
대테러 임무의 최강자들 '특전사 특수임무대대'를 아십니까? (0) | 2009.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