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어떻게 무너지지 않았나.
정소성(소설가,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지금 6.25를 추억하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래 전에 역사적 사실로서 현실성을 잃고 한낱 역사적 사건으로 편입되어 버리고 말았다. 56년 전의 일이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최근 종호가 발표한 1954년도의 사진들을 보고,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대구 사수의 전투들을 한번 훑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오래된 서책들을 뒤적여 보았다.
우리 동기생들 중에는 일생을 군문에서 보내고, 사단장이나 사령관등을 지낸 분들이 여럿 있어서 나의 글은 그야말로 글쟁이의 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두 아내(상,하)>와 <바람의 여인>이라는 제목의 6.25 관련 두 장편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특히 <바람의 여인>은 2007년 문공부 우수 도서로 선정되어 2천만원의 창작지원금을 받은 바가 있다.
풍전 등화같았던 대구가 어떻게 견디어낼 수 있었으며, 맥아더의 비밀지령에 의해 추진되던 최우수 2개 사단, 시민 십만명 극비 해외 기지 이송 계획이 어떻게 중단 취소 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싶다. 이 극비 해외 기지는 아메리카군도라고만 일려져 있지만, 사실은 괌도가 아니면 하와이였다고 한다. 망명정권 수립을 위한 최소한의 인적자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 *
흔히들 말하는 낙동강전선이 형성된 것은 대략 1950년 8월 초 중순 경(8.1-9.15)이었다.
미 8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과 국군은 북괴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한 끝에 낙동강 서안 남안으로 내려왔다.
8월 15일까지 부산 함락을 장담하던 김일성은 수안보를 거쳐 김천까지 내려와서 독전했다. 그는 후퇴하는 북한군은 무조건 총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왜관을 중심으로 서남안은 미군이, 동쪽 전선은 국군이 맡았다.
서 남안의 미군 포진을 보면, 대구 서남쪽 50 킬로 지점 고령 동편에 영연방 27 여단, 그 아래 미 25사단, 창녕에 미 2사단, 창원 마산 지역에 미 24사단에 진을 쳤다.
왜관 동쪽 전선으로는,
다부동 전선, 영천 전선, 안강 기계 전선, 포항 전선이 형성되었다.
물론 대구에는 국군의 육군본부와 미 8군 사령부가 있었다.
육군 참모총장은 정일권 소장, 8군 사령관은 워커 중장이었다.
육군은 일군과 이군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일군 사령관은 김백일 준장, 이군 사령관은 유재흥 준장이었다. 일군이 포항 전선, 이군이 영천 전선을 맡고 있었다. 다부동은 일 사단의 작전구역이었다. 다부동은 칠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구와의 거리가 22 킬로밖에 안된다.백선엽 준장이 사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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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다부동 전투는 50년 8월 4일부터 23일까지이다.
작전 지역은 다부동 북쪽 47 평방킬로이다. 통상적으로 1개 사단 적정 작전 지역은 15킬로로 본다. 너무 넓은 면이 있었다.
적은 4개 사단 2만 여명이었고, 국군 1사단 병력은 약 7천명이었다. 적은 탱크 34대, 자주포 20문, 122미리 곡사표 20문, 120 미리 중박격포 20문 등 6백 70문을 포를 갖추고 있었다.
1사단은 탱크 전무, 105미 곡사포 18문 박격포 172문을 가지고 있었다.
본격적인 전투는 8월 12일부터 열흘간 벌어졌다. 밤낮으로 싸웠다.
일사단은 낙동강을 포기하고 남안의 다부동으로 내려와 유리한 지형을 잡았다. 엄청나게 달리는 화력이었고 병력이었으나 오직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싸웠다. 백병전이 더 많았다.
일 사단 15연대(최영희 대령), 11연대(김동빈 대령), 12연대(박기병 대령)은 전원 옥쇄를 각오하고 적의 시체를 방패삼아 밤낮으로 싸웠다.
적 1 사단 14연대가 가산으로 진출하여 대구를 최근접거리로 두게 되자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120미리 박격포를 대구를 향해 쏘았다. 모두 7발이었다. 대구 역전에 떨어져 시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역원 한 사람 사망.
탱크는 없었지만 T34탱크를 부술 수 있는 3.5 인치 바주카 포를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았다. 결사의 항전으로 이 포로 적 탱크 17대를 파괴했다. 사단 병력이 전원 전투에 나서는 전면전 이외에 특공대 작전이 흔한 전투양상이었다.
워커의 명령으로 미8군의 유일한 예비대인 27연대의 지원으로 일사단은 큰 도움을 받은 것을 사실이다. 미 27연대는 최신 M26탱크 1개 중대와 포병 1개 중대를 다부동 전선에 투입했다. 연대장은 마이켈리스 대령, 나중에 대장으로 승진하여 주한 미 8군 사령관을 지낸다.
그러나 역시 주력 대항부대인 국군 1사단 장병들의 결사의 항전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새로 보임되어 오는 소대장이 고지 위의 소대 본부까지 오르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보았다. 매일 600명의 신병이 보충되었다.
아무리 때려도 물러서지 않는 국군 1 사단 장병의 사투로 적의 주력은 서서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투에서도 졌지만, 적은 끊어진 보급 때문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적의 주력은 대부분 16,7세 정도의 청소년들이었고, 주로 점령된 남한 지역에서 강제징집된 젊은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전투의지도 박약했다.
10만명 정도의 인민군들 중 무사히 북한 땅으로 돌아간 숫자가 겨우 2만 5천 명 정도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대구가 무너졌더라면 9월 15일에 있을 인천 상륙작전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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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전투는 대구를 동쪽으로부터 허물어 뜨리려는 적의 작전이다.
1950년 9월 4일부터 13일까지 약 열흘간 계속되었다.
적의 주력은 15사단(사단장 박성철 소장)과, 8사단이었다.
한국군 대항 사단은 8사단(이성가 준장)과 7사단(신상철 준장)으로 이루어진 2군단(유재흥 소장)이었다. 여기에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 수도사단 18연대가 조공 부대로 투입되었다.
예하 연대들은 8사단 소속으로는, 10연대(고근홍 중령), 16연대(유의준 중령), 21연대(김용배 대령), 공병대대(김묵 대위)
7사단 소속으로는 3연대 1대대(정진 소령), 5연대(최창언 대령), 8연대(박승일 대령)
다부동 전투에서 실패한 김일성은 김천에서 독전하면서, 최강 15사단을 영천 전선에 투입하고, 대구 돌파의 마지막 카드를 빼들었다. 국군에 아직 탱크가 없음을 감안하여 막강 T34 열대를 투입하여 영천을 유린하였다.
9월 6일에 영천 함락, 7일에 탈환, 8일 재함락, 9일 재탈환의 우역곡절을 겪었다.
전사에 특기되는 8사단 16연대의 괘멸은 눈길을 끈다. 적 탱크를 부실 작정으로 수튜탄을 여러개 합친 다발을 만들어 적 탱크를 향해 돌진했으나 적병의 조준 사살에 전원 전사했다.
영천 북방 20 킬로에 위치한 자천에 포진했던 국군 8사단 21연대(연대장 김용배 대령)는,적군에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자천 북방에는 해방 1200 미터의 보현산이 있어서 전전부터 공비가 들끓었고, 소백산맥을 타고 내려오는 적 주력의 좋은 은거지가 되었다.
21연대는 죽음을 각오하고 대항하여 적의 포위부대인 45연대, 103연대, 73연대를 4일간 붙들어 맸다. 주력을 빼앗긴 적 8 사단은 국군 8사단 주력과의 영천 회전에서 무너졌다. 적 사살 3천 7백 99명, 포로 3백 9명, 적 탱크 5대 파괴, 장갑차 2대, 차량 83대, 대포 14문, 각종 화기 2천 3백 27정을 노획하였다.
이 전투 당시 필자는 자천 지서 주임으로 계시던 아버님을 따라 자천지서의 역내에 있는 지서 주임관사에서 살고 있었다.
지서가 함락되어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지던 날 우리 가족은 아버님의 지시로 전날 밤 지서를 탈출하여 일반민가에 기숙하여 화를 면했고, 아버님은 적에서 체포되어 산속으로 끌려가던 중 금호강변에서 적병 세명을 처치하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구명하셨다. 이 전투장면을 졸작 <바람의 여인>에 수록하였다.
영천 회전의 승리로 국군은 낙동강 전투에서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영천 회전이 끝나 국군 8사단 사령부가 영천 시내에 설치된 것이 9월 13일이었는데 이틀 뒤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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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경주 방어전이라고들 하는 안강.기계 전투는 한국전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같다. 만약 경주가 뚫려버렸다면, 부산까지 이를 막을 적당한 병력이 배치되지 않았고, 대구를 우회해서 쳐들어 올 때 대구 사수의 병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은 경주의 이런 약점을 노려 12사단 등 1만 5천 병력을 경주 북방 안강.기계 전선에 투입하였다.
국군 대항 병력은 수도사단(백인엽대령) 예하의 제 1연대(한신 대령), 7사단 예하의 제 18연대(임충식 대령), 백남권 대령의 기갑연대 등 고작 5000명이었다.
적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쳐들어왔다.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6일간 정신없이 싸웠다. 수도사단 발령을 받은 초급장교들은 먼저 유서부터 쓴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사상자가 많았다.
하도 소위 소대장이 많이 죽어 전선에서는 소위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2등상사와 1등 상사 소대장들이 수두룩하였다.
특히 임충식 대령의 18연대는 백골부대라 하여 상승부대로 소문이 난만큼 전투에서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소장은, 백골부대 전원에게 경주 사수에서 실패하면 전원 옥쇄할 것을 명령했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으로서는 상관으로부터 최고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부대의 전투력을 믿고 필승을 명령한 것이다. 백골부대는 경주를 지켜냈다. 경주의 건재는 대구의 건재를 의미한다. 그들은 집단 자살은 면했지만, 그 명령을 내린 참모총장은 명령을 내린 후 숙소에서 밤 새 울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백골부대장 임충식 대령은 그후 대장까지 승진하고 합참의장까지 지냈고, 8, 9대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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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이 대구에서 먼 것 같지만 군사상으로 볼 때 대구 사수의 중요 전략지이다. 포항은 부산 만큼 중요한 미군의 병참기지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까이 영일비행장이 있어서 절대로 내줄 수 없는 전략거점이었고, 특히 낙동강 전선에 출격하는 미제 제5공군기의 발진 기지였다.
적은 5, 12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대략 2만명이었다.
국군은 이종찬 대령의 3사단이었다. 이종찬 대령은 9월 1일부로 이준식준장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영천의 혈전은 포항에서 재연되고 있었다.
8월 9일부터 9월 10일까지 대략 한달 간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었다. 제공권을 제압당해 큰 피해를 보고 있던 북괴군은 영일비행장을 접수해 미5공군의 폭격을 줄여보려했다. 결사적이었다.
3사단 지휘소는 포항시내 금융조합 건물 안에 있었다.
3사에서는 영일비행장 사수 특수부대 편성을 예하 26연대(이치업대령)에게 맡겼다. 3사 예하에는 22연대(김응조 중령), 23연대(김종순 대령), 26연대(이치업대령)가 있었다. 이 밖에 지원부대로는 한신 중령의 제 1연대, 민부대로 통하는 민기식 부대와 미군의 브래들리 부대, 그리고 잭슨 부대 등이 동참하고 있었다.
한국군을 믿지 못한 미군은 영일비행장으로부터 일본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미 7함대가 수만발의 함포사격을 적의 진지로 날렸다. 3사단 장병들은 결사항전으로 싸웠다. 미리 형상강으로 들어가 잠수하고 있다가 강을 건너오는 적을 찔러 죽이는 특수부대의 활약도 있었다.
형상강은 서울의 한강처럼, 포항의 남부를 돌아 영일만으로 빠지는 강이다. 적은 이 강을 좋은 거점으로 잡고 결사적으로 쳐들어왔다. 고립 무원에 빠진 3사 장병들은 이제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입장에 처한 것을 알았다. 한달 간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적의 도살에 전력투구하였다.
한 때 포항으로부터 철수하기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학도의용군 71명은 후퇴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밀어닥친 적에 포위되어 포항여중 교정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막중한 인적 손실을 입으면서도 결국 3사단은 포항을 사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결국 대구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다부동 전투와 영천 전투 그리고 안강.기계 전투 이어서 포항 전투는 사실상 미군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우리 국군이 적군을 물리친 전투였다. 이제 더 밀리면 나라가 망한 다는 절박한 입장이 이들을 결사항전으로 내몰았고 결국 승리했다.
그래서 맥아더가 워커에게 내린 기밀명령은 자연 취소되었고, 이어서 9월 15일에 단행된 인천 상륙작전으로 역공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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