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식 재개발의 종언
한국의 재개발 정책 목표는 신속하게 노후 주택을 헐어내고 고층 아파트를 짓는 것이다.
대규모 재개발의 기폭제가 된 것은 1988년 올림픽.
당시 정부는 올림픽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발전된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재개발사업을 벌였다. 작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이 재개발 사업을 벌이고
낡은 주택을 가리기 위해 대로변에 초대형 간판을 세우는 해프닝을 벌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제 외국인에게 감춰야 할 정도의 달동네는 거의 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불도저식 재개발'에 집착하고 있다.
그래서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멀쩡한 건물까지 헐어내고 있다.
재개발 갈등으로 6명의 사망자를 낸 용산 참사도 불도저식 개발이 원인의 하나이다.
야당에서는 용산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진정 국정조사가 필요한 것은
'한국식 재개발 방식' 그 자체이다. 수천수만 가구의 주택을 한꺼번에 밀어내고 아파트를 짓는
불도저식 재개발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나라는 OECD 국가 중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식 재개발은 서울 풍경을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고층 아파트로
바꿔 놓았지만 부작용도 많다.
우선 소형주택 등 저렴한 주택이 대거 사라졌다. 서울시 조사 결과, 재개발로 인해
전용면적 60㎡이하 주택 비율이 63%에서 30%로 줄었고 재개발 전에 83%였던
전세가 4000만원 이하 주택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1인 가구나 소득이 없는
고령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살 만한 주택들은 마구 헐리고 있다.
또 아파트 일색의 재개발은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전국 어디를 가나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만 들어서다 보니 지역의 특성과 문화가 숨쉴 공간이 없다.
서울시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한강변을 개발하고 디자인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아파트만 가득 찬 서울이 매력 있는 도시가 되기는 어렵다. 대규모 철거와 이주에 따른
전세난과 집값 급등 현상도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최근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면서
재개발을 해도 시세차익이 발생하지 않아 세입자뿐만 아니라 집주인조차도 뉴타운 등
재개발에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문제점 탓에 선진국들은 주택공급 위주의 재개발 정책에서 도시경쟁력 강화에 중점을 둔
도시재생(再生) 정책으로 전환, 다양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개발방식은 '철거형'에서
주민들이 대부분 거주하면서 순차적으로 건물을 신축하거나 개·보수하는
'리모델링형'으로 바뀌고 있다. 대규모 철거에 따른 갈등을 줄일 수 있고 지역의 특징과 문화를
그대로 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예술가 주도의 재개발 방식도 유행이다. 정부가 낙후지역에
미술관·작업실 등 예술 관련 공공시설을 지어 예술가들을 유인한다. 예술가들로 인해 갤러리 등
연관 업체들도 몰려 상업이 활성화되고 관광지로도 발전한다. 또 정부가 재개발 사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계획단계부터 지역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이 참여하도록 해
갈등을 예방하고 에너지 절감형 주택·고령자 주택·저소득층 주택을 짓도록 유도한다.
앞으로 3~4년간 서울에서만 20만 가구 이상이 재개발될 예정이다. 용산 참사가 아니더라도 서울이
경쟁력 있고 매력적인 도시, 고령화 사회를 대비하는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 재개발 방식에
대한 반성과 재검토가 필요하다.
- 차학봉·산업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