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베트남 파병
의무·공병 부대에 이어 1965년부터는 전투 부대가 파병되기 시작한다. 채명신 소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맹호부대를 파병하면서 예하의 군수 지원 부대인 십자성부대와 함께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했다.
주민들에게 의료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백마부대(67년 2월).
백마1호 작전으로 노획한 베트콩 무기 전시(67년 2월).
독수리번개 69-2호 4단계 작전중인 맹호부대 장병들
1964년 베트남 전쟁에 직접 개입한 미국은 다른 나라의 참전을 절실히 원했다. 그러나 NATO 회원국 등 믿었던 국가들 중 어느 나라도 응하지 않았다. 미국의 외교적 고립은 심화됐다.
전통의 우방국들로부터 직접 개입요청을 거부당한 미국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군만이 유일하고 지속적으로 동원 가능한 군대였다. 게다다 한국군은 한국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었고 반공사상이 투철했으며 무엇보다 비용이 쌌다.
한국 또한 참전을 절실히 원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통한 안정 유지와 정통성 확보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들어갈 재원 확보라는 경제적 이유도 한 몫 했다.
1964년 9월 의무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여명의 파견을 시작으로 1965년 2월 공병부대인 비둘기 부대가 장도에 오르고 뒤이어 청룡·백마·맹호부대 등 전투부대를 파병해 73년 철수할 때까지 31만 여명이 참전했다. 8년여 동안 평균 주둔 인원은 5만명.
미국의 용병이라는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참전으로 많은 경제적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다.
1965년부터 1972년 까지 한국의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얻은 수익과 군인, 노동자들이 받은 인건비 등은 7억5000만달러에 달했다. 이 기간 한국은 또 베트남과의 무역으로 2억8000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이 밖에 참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1억5000만달러의 차관과 한국 상품의 대미수출 확대를 약속 받았다.
남의 나라 전쟁에 남의 나라 젊은이들 대신 참전한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피 흘린 대가였다.
사상 처음으로 우리 군대를 해외에 보내 한국전쟁 때 미국에 진 빚의 일부를 갚았다는 점과 국군의 현대화와 전력 증강을 기할 수 있었다는 점 등도 베트남 파병의 성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참전의 상처는 깊었고 후유증도 컸다. 5000여명이 목숨을 잃고 1만60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베트남에는 아버지 없이 자라야 할 수많은 한국인 2세 ‘라이따이한’들이 남았고 귀국한 군인들은 고엽제 피해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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