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想像나래 마당

<스크랩> 논개부인에 대하여...

鶴山 徐 仁 2009. 1. 24. 09:59

                    

김은호 화백의 논개 초상화

 

 

임진왜란때 왜장 게야무라을 껴안고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한 의암(논개 사후에 내려진 호) 주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부실이었습니다.

 

성은 신안 주씨이며 경상남도 장수군 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실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뜨기전 최경회에게 자신이 죽은후

재색과 부덕을 겸비한 논개를 처로 맞아들일 것을 권유하였고,

부인이 죽고난 후 몇 년이 흐른 후 논개는 최경회현감과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에서 왜군을 맞아 싸울때

논개는 낭자군(여자로 편성된 군대)를 조직하여 치마폭에 돌멩이를

나르고 가마솥에 물을 끓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에게 퍼붓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6월 22일부터 왜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6월 29일 서남방쪽 성이

무너지면서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왜군이 진주성안으로 들이닥치자 최경회는 다른 장수들과 모여

성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결의하고는

촉석루에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임종시를 읊으며 남강에 투신합니다.

 

촉석루 중에 있는 우리 삼장사(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한잔 술 마시며 웃으면서 강물을 가리키네.

남강물 출렁이며 도도히 흐르는데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

 

성이 함락되기 전 다른 부녀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피신한 논개는 왜군들이 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서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진주의 수안이라는 기생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자신의 이름 또한 명단에 넣게 했습니다.

 

칠월 칠석날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연회에 참석해 왜장 게야무라를

대취하게 만든뒤 춤을추며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마디마디 가락지를

낀 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왜장을 껴안고 강물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논개부인의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논개가 뛰어내린 바위를 의암(의로운 바위)이라 이름짓고

논개와 동일시하여 그의 호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현감 정주석은

비석에 명문장을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나라가 침략을 받아서 어지러울 때 구차하게 살지 않음이 쉽지 않고,

열사로도 어려운 바라. 일개 여자가 대의를 판별하고, 죽는 것을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보았으니 어찌 그리 빛나며 매울 쏘냐.

당일을 상상해 보면 위엄과 늠름한 기가 사무쳐 해와 별같이 빛나도다.

어찌 그리 장할소냐…지금 여기에 의기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함으로써

평생 공경하는 마음으로 뒤좇아 갈 것은 지체 낮은 사람들의 바람이라

삼가 글로써 기록하여 남기나이다.

 

 

논개부인을 기생이라고 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기생처럼 꾸몄을 뿐 그녀는 남편을 도와 의병들의 훈련

뒷바라지를 했고 진주성 싸움에서는 낭자군을 조직해 왜군들과

싸웠고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의로운 부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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