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人物情報 參考

김추자 노래인생

鶴山 徐 仁 2008. 10. 1. 17:44
 
 
1971년 국내 최초로 해외 수출된 김추자 골든히트앨범(오른쪽). 왼쪽은 골반바지를 입은 김추자의 1973년 음반.  
 
 
 
 
1974년 나온 김추자의 민요 메들리 음반(위쪽)과 남근과 비슷한 그림이 삽입돼 경매시장에서 값이 뛰고 있는 음반. 
 
 
 

 

 

 

 

 

 

 

 

 

 

 

 

 

 

 

 

 

 

 

 

 

 

 

 

 

 

 

 

 

 

 

 

 

 

 

 

 

 

 

 
 
1. 무인도
2. 아침
3. 너와 내가 (민여사 주제곡)
4. 못난이
5. 꿈나라
6. 무인도 (경음악)
7. 하늘을 바라보소
8. 그리고
9. 아까시아 길
10. 헤어져 살면
11. 님은 먼곳에 (경음악)
12. Summer Time (경음악)
 
 
 
 
갑자기 웬 김추자?
 
뜬금없이 왜 '김추자'를 새삼스럽게 논하는가 묻는 사람이 있을것이다.
우연히 구하게 된 김추자의 앨범 한장에 수록된 곡을 듣고나서 나름대로 김추자라는 가수에 대해 새로이 알게됐다.

이 앨범을 소개하는 나는 그녀의 앨범을 이것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앨범에 관한한 완벽한 백지상태였다. 그러나 편견이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김추자 그가 신중현 사단의 커다란 성공작이었다는 사실은 나의 선입견에 매우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전 정보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의 크레딧에는 신중현의 '신'자도 들어가 있지 않다.
거기에 따른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앨범을 턴테이블에 걸고 몇 곡의 노래를 듣다보면 그것은 기우였음을 이내 알게 된다.
 
김추자를 떠받들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봉조다.
그는 앨범의 전곡을 작곡("이봉조 작곡집"이라고 표기되어있기도 하다)하였으며
크레딧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악단'의 마스터로서 또 관악기의 연주자로서 앨범에 무게를 더하고 있는데
그의 작곡 스타일은 트로트의 범주에서 그치지 않는 말 그대로의 성인취향의 음악들에 적용되는 문법과 일치한다.
(잠깐, 여기서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성인취향이라고는 했지만 적어도 당시 이런 스타일의 음악이
메인스트림을 쥐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어떤 면에서 요즘의 얼치기 춤꾼들의 춘추전국시대보다는
훨씬 고무적인 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작은 전체적으로 지금세대들이 들어서 크게 호감을 가질만한 구성은 아니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곡이 몇 있는데
비교적 잘 알려진, 가끔 열린음악회같은 무대에서 잘 불리워지는 '무인도'와 '아침'이 그것이다.
 
이 두 곡은 앨범의 처음 두 트랙을 차지하고 있어서 처음 본작을 접했을 때
'어 장난이 아니네..' 하고 생각하게 했을 정도로 멋진 곡이다.
화려한 브라스 섹션이 김추자의 쭉 뻗어나가는 목소리와 잘 맞아떨어져 조화를 이루고 있고
특히 '아침'에서의 브릿지 부분은 펑키한 느낌을 자아내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녀가 음악을 듣는다는 관점에서 나와 동시대의 인물이 아닌 관계로
실제 무대에서의 모습이 어땠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상당히 동적이며
육감적인 무대매너를 갖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것이
김추자는 두껍지만 미끈하게 빠지는 스타일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거기다가 비음을 적절하게 섞어서 사용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매우 선정적으로 들리는데
이런 요소가 그녀의 인기에 플러스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앨범 전체의 관점으로 볼 때, 위 두 곡 이외에는 특별나게 돌출되는 곡이 없다는 점이다.
 
나머지 곡들에서도 김추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차고 기교넘치지만 자잘한 잽만 구사하고 있을 뿐이고
결정적인 카운터 블로우가 없어서 밋밋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그러나 앨범의 마지막 두트랙을 채우고 있는 두곡의 연주곡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음악을 즐기시는 나이 지긋이 드신 분들은 이런 류의 연주곡을 많이 들어보셨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치 007 영화의 주제곡처럼 시작되는< 님은 먼곳에>는 피아노의 리듬악기로서의 역할이 충분히 나타나고 있고
역시 혼섹션의 고른 활약이 돋보이는 곡이다. 여지까지 신중현의 작품인< 님은 먼곳에>를
여러 버전(김추자, 조관우, 장사익..)으로 들어보았지만 이런 재즈풍의 연주는 처음이었다.
이어지는 트랙은 재즈의 고전< Summer Time>. 이봉조의 끈적끈적하면서도 깔끔한 색소폰과
그 뒤를 간간히 받쳐주는 피아노가 나름대로의 멋진 해석으로 곡전체를 이끌고 나가 감상자에게 편안함을 제공한다. 
 
 
 

 

 
1971년의 김추자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1976년 미스박테일러 패션쇼에서.
 
 
 
 
1978년 김추자 재기 리사이틀 공연 때 찍은 사진. 1980년 1월 앨범으로 출시됐다.
 
 

 
 
1986년 영국 버크셔 주의 윈저성을 방문한 김추자.(좌) 1973년 하와이 공연 당시.(우) 1984년 딸과 함께.(작은사진)
 
 

 

'님은 먼곳에'로 스타덤에 오른 김추자가 1970년 말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자신의 매니저와 함께 내겐 상의도 않고 독립한 것이었다. 몇 달 동안 소식이 없던 그의 매니저가

 

어느 날 내가 공연하던 서울 명동의 레스토랑으로 찾아왔다. 매니저는 다짜고짜 내게 곡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주먹계에서 꽤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상당히 위압적인 태도에 벌컥 화가 났다.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가 느닷없이 곡을 내놓으란 말이야? 건방진 친구 아닌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그래, 어디 한번 찔러봐라!"

그는 한동안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내 눈을 주시하다가 나이프를 벽으로 던졌다.

 

평소 나를 '형님'으로 모시던 게 부담이 됐던 것이었다. 그의 손을 벗어난 칼은 대형 유리창을 깨뜨렸다.

 

레스토랑 안 분위기가 일순 살벌해졌다. 나는 곧바로 웨이터를 불러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방에 가서 사시미 칼 하나 가져오게. 이놈이 날 못 찌르니, 나라도 찔러야겠다. 빨리 가져와!"

그제야 매니저는 내게 사과했다. 그날의 상황은 그것으로 일단락됐다.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화가 났지만 한편으론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어차피 내 제자가 아닌가….

그래서 다시 건네 준 곡이 '거짓말이야'였다. 또 시간이 흘렀다. 71년 12월 초 김추자의 매니저가 또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비장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내일 제가 일 좀 저지르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내일 아침이면 아시게 됩니다."

다음날 뉴스를 보니 그가 김추자에게 소주병을 휘둘렀다는 내용이었다.

 

김추자가 자신을 멀리하고 '언니'라는 사람과 함께 다니는 데 화가 나 저지른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사고 며칠 뒤인 71년 12월 9일 시민회관에서 내 리사이틀이 예정돼 있었다.

 

김추자도 출연키로 돼 있었다. 김추자를 불러 설득했다.

"네가 사고당한 건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 노래는 못 부르더라도 관객에게 인사는 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다."

김추자는 휠체어에 몸을 싣고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무대에 나와 인사만 하고 들어갔다. 나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이다.

그 일로 1년 징역형을 살고 72년 말 출소한 매니저가 나를 찾아왔다. 꽤 오래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나는 그 친구의 덕을 많이 봤다. 그 시절 연예계는 법보다 주먹이 앞섰다.

전국으로 공연을 다니던 신중현 사단도 '주먹세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주먹계에서 힘있는 사람이 내 휘하의 매니저로 활동하는 바람에

 

전국 어디에서든 극진하게 대접받으며 안전하게 공연할 수 있었다.

그같은 매니저 여럿이 나를 거쳐갔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신중현 사단의 일을 본다고 하면 주먹세계에서도 위신이 서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신중현

(2006.2.6)

 

 

 

 

 

 

 

 

 

 

 

 

 

 

 

 

 
 
 
김추자는 '님은 먼곳에'에 이어 '거짓말이야' 인기 가도를 달렸다. 1973년 전성기의 김추자.
 
 
「돌아온 金秋子」

김추자가 돌아온다.
검붉은 정열의 화신(化身), 마(魔)의 소울싱어 김추자가 지평선의 회오리바람처럼 다시 돌아온다.
70년대 초반 우리나라 연예계를 그 독특한 반역의 정염으로 풍미하면서 잠자는 돌부처까지도 술렁이게 만들었던,
위대한 말괄량이, 엔터테이너 김추자가 긴긴 3년 동안 부러진 날개깃털 다시 가다듬어
멍든 가슴 울멍이며 검은 눈 깊이 내려 깔고 장고처럼 돌아온다.

「성님」들이 모두 하루 아침에 거세당한 후 올망졸망 신인들이 신났던 영욕의 황야로
「추자는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가-」 마지막 승부를 묻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
긴 잠에서 마녀는 이제 깨어났다. 아직은 부분 해제의 몸이지만 김추자는 김추자.
오히려 지금은 맵고 짠 인생 진국, 더욱 덥게 끓여져 병기(兵器)로 치면 반질반질 검은 윤기를 더한 셈일 뿐만 아니라
3년 동안 축적된 스테미너가 또한 묵중한 양감(量感)으로 도화선에 연결되어 팬들의 관심과 흥행사들의 군침과
그리고 5월에 있을 그의 재기 무대를 함께 엮고 있는 참이다. 도화선은 다시 불붙을 수 있을 것인가.
 
 
 
 
 
불사신의 저녁으로 이제 다시금 연예계를 조바스럽게 긴장시키는 이 소문난 여자, 김추자는 대체 누구인가?
대중들의 새 노래 반백년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가수들이 저마다의 목청을 돋우며
파란도 많은 명멸부침을 거듭하여 왔지만 적어도 필자가 가늠하게 하는 한에서는 그 개별적인 이미지에 있어서
김추자만큼 진한 냄새와 강한 칼라로 대중관심 속에 획을 그었던 여자가 더 있을성 싶지 않다.
 
여자노래라고 하면 으례 가냘픈 목소리로 드레스 자락을 하늘거리며 애틋한 사랑사연이나 하소연 하는 것으로 알았던 때,
이게 무슨 망측스런 변일지, 못보던 웬 신인이 터질 것 같은 몸매에 팽팽항 바지를 꼬여 입고,
머리칼을 온통 한 때의 먹구름인 양 보클려 갖고, 어디 그 뿐인가, 오장육부를 훑는 듯한 기괴한 사이키 음향과
가슴 우물 속 열길 암흑 속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허스키를 한데 몰고 우리들 앞에 점령군처럼 나타났을 때,
그 최초의 쇼크는 거의 선혈이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반 세기나 변함 없던 스테이지 매너에 최초로 파격의 관능을 도입한 이 별난 가수 김추자는,
노래를 부르는게 아니라 노래를 화염으로 불뿜어 뽕짝 일변도이던 침체된 대중들의 가요감성에
화려한 폭죽을 터뜨리면서 그 분야 정상을 장악하는데 반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온몸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의 슬로 소울은 그의 스승이며 그에게 리듬의 마성(魔性)을 주입시킨 천재 연주가 신중현의 싸운드와 함께 충돌하면서 고루하게 응집된 관중들의 가슴을 치고 봇물을 터뜨리듯 환호를 끌어 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1970년 서울 시민회관, 신중현 리싸이틀에서 그 그룹 「비장의 신무기」답게 이렇게 파격적인 모습으로 첫 선을 보인 추자는 일거에 대형스타로 뛰어 올라 데뷰 첫 곡인 「늦기 전에」를 히트시키고 1973년과 74년 리싸이틀을 통해 그 절정의 인기를 확인하면서 75년 12월 5일 마리화나 흡연 관련사범으로 일거에 몰락할 때까지 「님은 먼 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거짓말이야」, 「무인도」 등 3백여곡의 「김추자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추자는 가수이므로 얘기하자면 먼저 그의 노래를 정확히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의 노래를 활자로 어떻게 들을 것인가. 노래 가사를 옮겨 적을 것인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그 가사의 단어들이 지니는 뜻은 김추자를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못된다. 애초부터 그것들은 김추자를 위한 것이거나 김추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단어들이라면, 몇십원만 주고도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싸구려 노래책이나 변두리 여관방의 담벼락 낙서가운데도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가사 대신 악보를 적어서도 안된다. 악보대로라면 굳이 김추자를 동원하지 않고 다를 가수나 또는 악기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연주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악보도 가사도 결국 김추자의 본심과는 무관하다는 얘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추자의 노래를 귀로 듣거나 눈으로 읽을 수 없다. 우리는 김추자의 노래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추자, 그 여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격정과 만나지 않고서는 적어도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신음소리같은 노래를 듣고 있으면 불타는 영혼의 유황냄새로 가슴이 저리는 것이다.
그는 관중을 향해 애소(哀訴)하지 않는다. 신파조의 눈물이나 아픔을 결코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내공으로 향한 신음소리는 마치 밤안개 속의 기적처럼 어느 것 하나씩은 모두 잃고 사는
우리들 가슴 속 허무의 벽에 와 닿는다.
가수 김추자가 비싼 것은 그 허무의 벽이 위치해 있는 지점의 차원에서 그 인기의 값이 정해진 까닭이다. 
 
 
 
 
셀라시에 황제와 울보
 
김추자, 본명.
 
6 25 전쟁의 와중이던 1951년 춘천에서 났다. 딸만 넷이던 집에 또 하나의 딸로 막내가 된 추자는,
고집불통, 울보에 엄마 젖을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빨았노라고, 스물 여덟 살이 된 지금
끌끌끌...」 웃으며 어린 시절을 술회한다.
 
「하하하...」 또는 「후후훗...」 웃을 여자로 알고 만났는데 추자는 계란빵처럼 부풀어 오른 양쪽 뺨과
아버지는 추자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는데 다행히 딸을 많이 두고 가셨으므로
왈가닥 다섯 공주님을 키워낸 홀어머니가 큰 고생을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은 논, 밭, 과수원의 형태로 아직껏 4만평이나 남아있어 지난 3년 동안도 그 농장 수익 가지고 버틸 수가 있었다.
젖먹이 때 유별나게도 많이 울어서인지 추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잘하는 종달새로 전교에서 유명하였다.

노래 뿐만이 아니라 무용이나 운동에도 출중한 소질을 발휘, 춘천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대항 행사가 있으면
무슨 행사에고 감초처럼 뽑혔고 셀라시에 에디오피아 황제가 내한하여 춘천을 방문하였을 때는
황제님 목에 꽃둘레를 걸어드렸다.
혈액형 B형을 타고난 계집아이답게 샘이 많아 공부마저 열심히 하였으므로
12년 내리 반장을 지내면서 콧대를 높여 마지 않았다.
 
부 잘하고 무용 잘하고 노래 잘하고 운동 잘하는 「추자씨」의 뒤엔 늘 여드름 머스마들이 쭈볏거리며 따라 다녔으나
그러면서도 공부방은 미래의 가수 김추자의 환상으로만 가득 차 한 밤중에도 FM에서 좋은 음악만 흘러 나오면
아, 이 대목에서 김추자는 처음으로 「훗훗훗...」 하고 처녀웃음을 웃었다.
꿈 많은 여고시절의 추억은 역시 백전노장의 갑옷도 말랑말랑하게 녹이는가 보다.
추자가 처음 상경한 것은 1969년도 행복하고 행복했던 여고시절에 종지부를 찍고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행 열처에 몸을 실으므로써였다. 
 
 
전공과목 선택에 무진 애를 먹었는데 아무 걸 선택해도 자신은 있었으나
그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은 앞서의 예감과 그리고 그 예감 뒤를 따르는 다소는 낭만적인
「끼」의 자신감이 작용한 때문이었는데 아뭏든 이 대학생활은 2년을 못넘기고 끝장이 났다.
신입생 환영을 뜻하는 교내 노래자랑 대회에 나아가 심사위원 전원, 방청 학생전원 만장일치로
당당 1등을 해 낸 것이 그 발단이 되었다.
 
신입생 김추자는 금새 교내 명물이 되었고 그 소문이 인연이 되어 마침내 김추자는 신중현과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신중현의 등장은 김추자의 반생을 얘기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전자음악과 무그의 기인으로 알려진 그는 일찍부터 우리나라 경음악 수입의 관문이 되고 있었던
미8군 무대에 진출하여 재즈와 록큰롤로 크게 인정을 받으면서
국내 악단에서는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연주가로 성가를 높이는 한편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도입한 특징적인 작품 활동으로 음악의 새 물결에 민간함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창법의 구습을 못 벗어나는 가수들에게 실망하고 있던 신중현에게 김추자는 적격의 신선한 머티리얼 이었다.
165cm의 훤칠한 체격, 민감한 음악성, 풍부한 성량, 낮은 B에서 높은 C까지 자유자래로 구사하는
육감적인 음폭이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데뷰곡이자 출세곡인 「늦기전에」를 신중현으로부터 받았다.
이 때 추자 나이 갓 스물, 영광과 오욕과 환희와 절망이 간단없이 교차되는
쇼 비지네스 세계의 새로운 세월 앞에 마침내 마주 서게 된 것이다.
All or Nothing.- 이것은 김추자의 성격이다. 새롭게 전개된 세월 앞에 그는 모든 것을 다 투척했다.  
 
 
 
절대음에의 탐구

스무 살 소녀의 오색빛깔 꿈과 그 꿈 속에서 반짝이던 대학교의 뺏지와
그리고 귀여운 재롱둥이 막내딸의 걸어왔던 가족들의 분분한 기대까지도 몽땅 빼앗긴 숙명의 행로,
운명의 리듬 앞에 모두 바쳤다. 골백번 죽고 또 죽어도 이제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을
성녀로 승화시켜 가질 수 있다는 왕성한 확신은 그가 김추자 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사에 냉정한 그였지만 그의 독특한 점은 그가 한 번 결심하였을 때 자기 자신까지도 냉정히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20년 소녀의 꿈, 꿈의 베일을 모두 벗어 내버린 순간 정말로 그는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화신이 되었다.
바람직한 사회란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의 개개인이 열성적이고 성실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모험에 몸을 아끼지 않을 때 기틀이 마련된다.
전문직의 기능이 숭상되는 나라일수록 직업에 귀천이 없으며,
그런 사회일수록 우수한 정치인과 우수한 상인과 우수한 학자와 우수한 구두수선공들이 배출되는 이치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모두 정치가나 승려가 되어서는 안 되듯이 세상의 여자들도 모두 가수나 배우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짓을 자기 직능으로 택했다면 당연히 목숨까지도 내걸고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쇼 걸의 길을 택한 김추자는 정말 쇼 걸 김추자로 다시 태어났고 그리고 마녀가 되었다.
연예계, 얼마나 철저하고 얼마나 비정한 프로패셔널의 세계인가.
그 분야에서 그 나름의 도를 터득하기까지 그가 남 몰래 흘린 눈물의 댓가는 아무도 보상해주지 못한다.
다만 김추자에게 있어 무대는, 마녀가 혼신을 부르는 재단이었다고 모든 청중들도 그렇게 믿었다.
청중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쑤시고 터뜨려 쇼무대에 활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수는 어느 시대에도 필요하다.

그런데 김추자, 그렇게 마녀처럼 노래의 혼으로 부르다보면 웃을 때 「끌끌끌...」하는 소리가 나게 되는가?
「끌끌끌...」에서는 어쩐지 박복한 여인의 체념냄새가 나는데.
그렇다. 이제 따지자면 스물여덟살난 여자이면서 그보다 더 오래오래 살아 본 다른 여자의 여러 몫,
신고(辛苦)가 김추자에게는 따랐던 것이다. 
 


 
 
 
첫번째 사고는 72년도에 일어났다. 
본인은 그 사건에 대해 언급조차 하기 싫어하는 눈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던
「김추자 난자 상해사건」의 충격을 그를 아끼는 많은 팬들은 지금도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얼굴의 형태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중태에 빠진 김추자가 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아무도 갖지 못했다.
3회에 걸친 안면부 복원 대수술을 포함한 생과 사의 만 1년 동안 그는 그 누구하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비로소 자기의 생을 끌고 가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라는 것을 침묵으로 투시하면서
이제 자신에게 자신의 소유로 남은 유일한 것, 그것이 노래라는 사실을 피가 마르도록 애타게 되씹었다.
암흑 속에서 그는 혼자였으며 그 모습은 바로 자기의 노래인 것을 보았다.
「불행한 사고였지만 나에게는 인간적 성장의 한 계기였다. 한 번도 쓰러져 본 적이 없는 나는
어릴 적 꿈대로 천사가 되고 싶었던 그리고 그것을 하늘에만 있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철이 들었다. 하늘의 천사보다 땅 위의 천사들을 먼저 배워야
하늘의 천사도 될 수 있다는 이치가 조금씩 조금씩 내 것으로 되어 가고 있다.」
이 말은 아마 정확할 것이다. 그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1년 뒤에는 분연히 신장개업(?)을 하고 일어나 김추자는
「여자」가 아니라 「가수」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팬들을 믿었듯이 팬들도 그를 버리지 않아 그가 첫번째 재기한 73년과 그 이듬해의 리사이틀을 성공시켰다.
상해사건으로 인해 그의 사생활 일부가 노출되자 힐난의 눈초리로 그를 경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의 불운을 동정하고 그의 처절한 새출발을 장하게 여기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
 
실제로 그가 다시 무대에 나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거짓말...」하고 노래를 부를 때면
추자가 제 맘 속의 아픔을 고백하누나 싶어 안스러운 표정들로 공감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낯선 남자들은 집 안을 온통 뒤진 끝에 「대마초 관련」의 증거를 발견해냈던 것이다.
일부 연예인들간에 한창 유행하던 것이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집안에 놔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명하였으나
당시의 시국상황으로서는 「연예계풍토 정화」라는 일차적인 사회적 요구가 중요한 때였다.
김추자는 그 날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춥고 외롭고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서글퍼서 20일을 울다가
「가수활동 전면 중지」의 처분을 받고 창백한 얼굴로 풀려 나왔다.
영하의 거리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였던 것이다.
웬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면서 잠긴 목에서는 울음도 웃음도 아닌 소리, 「끌끌끌...」, 회한의 자조음이 끓어 올라왔다.
자신도 처음 듣는 그런 소리였다. 
 
 
 
 
추자혼을 남기려고

은연자중 3년 동안 추자는 거의 두문불출,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싫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였다.
가끔씩 「단칸 전세방에 냉장고 하나 쌀통 하나 놓고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너무너무 부러워」
그런 서울 변두리에 사는 옛 친구들을 찾아 조용조용한 담소를 나누는 것이 그 중의 낙이었다.
자기보다 못해 보이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보다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이었던가 하는 것을 깨달은
귀중한 3년이었노라고 이제 김추자는 말한다. 어른이 된 것이다.
「한 때는 원망스럽고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 때문에 자포자기를 할 뻔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더욱 강한 여자가 된 것 같고, 이제나마 다시 삶의 의미를 되돌려 준 당국의 조치를 감사히 생각한다.
새 출발하는 새 무대에서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아 달라. 노래가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노래를 버릴 수 없다.」
김추자, 그는 다시 일어섰다. 스카알렛 오하라처럼 고난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 남아 다시 우뚝 일어섰다.
웬만한 불운쯤이라면 이제 그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버티고 서서 혼신의 힘으로 잃어버린 시간들 속에 분산된 「김추자의 영혼」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이다.
재기 공연을 기하여 신중현과 다시 뭉친다.

(1978.6 엘레강스) 
 
 
 
70년대 초 뭇남성들은 김추자라는 대형 여가수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몽롱했다.
우선 터질 듯한 몸매를 여과없이 드러낸 꽉 조이는 의상과 엉덩이를 현란하게 돌려대는 춤이 그랬다.
60년대를 풍미했던 최초댄스가수 이금희와도 차원이 달랐다. 폭발적인 가창력까지 겸비한
녀의 등장에 온국민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드러내길 꺼리는 정적인 사회를 일순간에 후끈 달아오르게 했을 정도.
그녀는 파격 그자체였다. 40을 넘긴 중년의 남성들은 '잠자던 돌부처도 불러세웠다'는 김추자를
가요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가수로 기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온국민들의 눈과 귀를 자신을 향해 고정시키게 한 여가수는 유래가 없었다, 노래건 스캔들이건 간에...
 
51년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다섯자매 딸부자집의 막내로 태어난 김추자.
명문 춘천여고 재학시절땐 공부도 곧잘했지만 강원도 기계체조 대표선수와 응원단장까지 도맡아 했을 정도로
끼가 넘쳐났던 다재다능한 귀여운 소녀였다. 대중과의 첫만남은 춘천향토제였다.
 
이때 부른 수심가로 3위에 입상한 김추자는
이은관(배뱅이굿으로 유명)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을 정도로 창도 맛깔나게 불렀다.
처음으로 가수의 꿈을 심게된 순간이였다. 교육자들인 언니들과 달리 동국대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정한건 이 때문이다.
김추자는 신입생 노래자랑 대회에서 끼가 넘치는 춤과 노래로 심사위원, 관객 모두의 열광적인 호응속에
1등을 차지하면서 최고인기학생으로 자리잡았다.
 
18세 대학신입생은 신중현의 동생 신수현의 소개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작곡가 신중현의 삼각지 녹음실로 무작정 찾아갔다.
당시 인기절정의 유명가수 김상희와 신곡 발표준비로 분주하던 신중현이 김추자에게 눈길을 줄 리가 만무.
그래도 모른척 일주일동안 매일 찾아갔다. 귀찮아 내쫓을 궁리로 시켜본 노래테스트.
김추자는 단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중현의 마음을 앗아가 버렸다.
 

 
 
 
 
 
김추자의 데뷔앨범은 69년10월20일 출시된 <늦기전에/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예그린레코드,DG가06>.
신중현이 이끄는 '뉴덩키스'는 우리 국악의 창과 접목한 전혀 새로운 싸이키한 감각적 연주를 시도했다.
 
처음 음반이 나왔을땐 대중들은 낯설은 사운드에 어리둥절했지만 신선한 여대생 김추자의 열정적인 춤사위와
싸이키창법에 이내 열광하였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묘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소울 싸이키가요라는 신조어를 탄생케 했다.
신데렐라의 탄생이었다. 판권을 이어받은 성음제작소는 더블,싱글자켓 등
여러가지 버전의 재판들을 동일날짜로 발매했을 정도로 데뷔음반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호사다마라 할까. 인기가 치솟은 김추자의 주변은 장안의 건달들이 들끓게 되었다.
이때 3곡을 부르며 데뷔앨범작업을 함께한 프로레슬러 출신 소윤석은 보디가드겸 매니저 역활을 맡게 된다.
김추자의 첫 스캔들 상대는 가수 박일남.
 
김추자를 놓고 벌였던 박일남과 소윤석의 스카라극장앞 노상혈투는 당시 사회를 벌집 쑤신 듯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데뷔앨범에서 발표한 창과 싸이키를 버무린듯한 창법의 '늦기전에'와 사회분위기와 맞아 떨어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또한 2면수록곡인 '떠나야할 그사람'은 숨겨진 명곡. 후에 펄 씨스터즈가 리바이벌해 큰 인기를 얻었던 곡이지만
미8군에서 명성을 날리던 김선을 영입해 결성한 '뉴덩키스'의 꽹과리소리와
작렬하는 전자기타가 빚어내는 프로그레시브한 사운드는 시대를 한참 추월했다.
 
더구나 김선의 뛰어난 보칼로 구성된 7분40초의 롱버전은 소름끼치는 감동까지 선사한다.
69년 데뷔앨범발표이후 71년까지 김추자는 무려 12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소공동 '라스베가스'를 주무대로 방송출연, 콘서트 등 눈코 뜰새없는 인기강행군을 벌였다.
 
신문방송의 가수상을 휩쓰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출연스케줄을 어기고 잠적을 밥먹듯이 하여
'다이나마이트'외에 '구름같은 김추자'라는 또하나의 별명을 얻게 된다.
방만한 스케줄관리와 약속의 불이행은 씻을 수 없는 그녀의 오점으로 남는다.
71년 7월초 배호와 김세레나와 함께한 부산의 쇼무대에서 휘날레를 장식할 가수를 놓고
김세레나와 머리채까지 잡는 한판 자존심 싸움을 벌인 뒤 출연도중 사라져버린 사건이 문제였다.
 
가수분과위원회(회장 최희준)는 한국가요사상 최초로 김추자에게 3개월 가수자격정지라는 극약처분을 내렸다.
이후 김추자는 유래가 없는 스캔들 메이커로 참새들의 입방아에 끊이지 않고 오르내리게 된다. 
 
 
 
김추자와 펄시스터즈가 당시 최고의 라이벌로 서로의 힘을 소진하고 있을때  그 틈을 비집고 혜성처럼 나타난
디바 '김정미' 그녀의 메가톤급 핵폭탄같은 성량과 음악성, 폭발적인 카리스마로 단숨에 톱스타 반열에 오른다.
 
 
 
 
김정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중현 사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신중현은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소화해 낸 가수로 펄 씨스터즈와 함께 김정미를 꼽고 있다.
김정미는 제2의 김추자라고 불려질 만큼 김추자의 창법을 닮았다.
김추자와 김정미, 모두 신중현에게 창법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정미는 신중현의 창법 지도를 가장 제대로 받았던 가수였다. 김정미는 김추자에 비해 성량은 풍부하지 못하지만
신중현 음악 스타일에 걸맞은 창법, 특히 사이키델릭 창법에서는 독보적인 가수였다.  
 
 
김정미의 노래가 지니는 매력은 우선은 섹시하다는 데 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한편의 에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1960년대 말부터 사이키델릭에 심취했던 신중현은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이키델릭 작품들을 발표했다.
특히 1971년에 가수로 데뷔한 김정미에게 집중적으로 사이키델릭 작품들을 부르게 했다.
김정미는 <봄>, <햇님>, <바람>과 같은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작품을 불러서 인기를 끌었다.  
 
 
 
음악잡지인 『대중가요』에 김정미의 인기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972년 봄이다.
1972년 유니버살레코드사에서 ‘김정미 최신가요집’ 음반(KLS-44, 1LP)이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김정미의 첫 녹음이었다.
이 음반에는 신중현의 작품 <잊어야 한다면>, <간다고 하지 마오>, <언제나>, <나 생각나네>, <기다리는 마음>,
<가나다라마바>, <잊었던 사랑>, <못잊어>가 담겨있다.   
 
 
이 음반에서 반주는 그룹 ‘더 맨’이 맡았다. ‘김정미 NOW’ 음반(성음제작소 SEL-100 023, 1LP)은 1973년 11월에 제작되었다.
이 음반에는 <봄>, <햇님>, <바람>, <불어라 봄바람>(김자림 작사), <당신의 꿈>, <아름다운 강산>, <고독한 마음>,
<비가 오네>, <가나다라마바>와 같은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걸작과 한국전통음악과 록을 접목한 <나도 몰래>가 담겨있다.
 
 
 
 
이 음반의 앞표지에는 꽃밭을 배경으로 한 김정미의 인물 사진이 실려있는데,
이 사진은 신중현이 촬영한 것이며 꽃은 사이키델릭을 상징한다. 김정미는 1977년 9월에 지구레코드공사에서 제작한
음반(JLS-1201239, 1LP)에서 김성욱 작사, 김영광 작곡의 <나는 바본가 봐>, 하중희 작사, 김용선 작곡의 <셋방살이>,
김태완 작사, 김영광 작곡의 <너를 보내고>,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작곡, 지명길 역사의 <난 정말 몰라요>(Move Over),
김성욱 작사, 김영광 작곡의 <너를 갖고파>를 녹음했다. 김정미는 이 음반을 끝으로 가요계를 떠났다. 
 
 
1974년 9월에 지구레코드공사에서 제작된 김정미의 음반(JLS-120920, 1LP)은
신중현, 김정미 콤비가 마지막으로 이뤄 낸 사이키델릭 음악 음반이다.
이 음반에는 신중현의 작품 <이건 너무하잖아요>, <생각해>, <담배꽁초>,
<갈대>(남지연 작사), <당신이>, <너와 나>가 담겨있다. 김정미의 녹음이 담겨있는 음반으로 지금까지 13장이 확인되었다.
김정미의 음반 가운데 신중현의 작품이 담겨있는 것은 12장이며, 신중현 외의 작곡가들의 작품이 담겨있는 것은 1장이다.  
 
 
 
 
김추자
 
그녀는 데뷔 때부터 강렬했다. 꽉 죈 옷을 통해 드러나는 당당한 볼륨, 열정이 담긴 음색,
마음을 빼앗아 갈듯이 현란한 몸짓…. 가수 김추자(44세)의 별명은 「다이너마이트」이다.
처량한 음악이 유행하던 가요계의 정서를 「폭파」시킨, 응축된 에너지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1969년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그가 데뷔 했을 때 반응은 노래만큼 요란했다.
하이틴의 18세 소녀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진한 사랑의 노래를 당시의 음악인과 팬들은 정확히 규정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울 사이키 가수」라는 국적 불명의 용어가 탄생했고, 소문도 요란했다.
 
「배뱅이굿」의 일인자 이은관씨에게 창을 배우기도 했던 김추자는 작곡가 신중현을 만나 테스트를 받았다.
신중현은 『대어감이라는 느낌이 전율처럼 몸을 감쌌다.
그러나 겸손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이미 김추자의 배짱과 끼는 커져 있었고 특히 무대에서 숨김없이 나타났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중략)/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주고, 꿈도주고 / 멀어져 갔네…>(님은 먼 곳에, 신중현 작사 작곡)
1971년 발표된 「님은 먼 곳에」는 그의 대표곡이다.
터질 듯한 창법, 열정을 가누지 못하는 듯 광기 서린 춤에 힘입어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다른 가수들이 질투를 느낄 정도로 탁월했던 그의 춤은 우리 가요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노래에 맛을 주기 위해 춤을 곁들이거나, 춤을 보여주려고 엉터리 노래를 불러대는 요즘의 일부 댄스 음악인과는 다르다. 
 
 
 
김추자는 노래와 춤의 화학적 반응을 이루어낸 가수라고 말 할 수 있다.
오디오형 가수, 비디오형 가수라는 말이 있지만 그의 음악은 어느 한쪽을 생략하고는 온전한 맛을 느낄 수 없다.
이를 충족시키는 대표적 가수가 미국의 마돈나라면 그는 10여년을 앞선 셈이다 .
 
김추자는 「왜 아니 올까」 「그럴 수가 있나요」 「무인도」 등의 노래로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다가
당시 많은 가수들이 고초를 겪은 대마초사건으로 1975년 겨울 무대를 떠났다.
이후 몇차례 재기를 시도했으나 옛날의 영화를 회복하지 못했다.
현재 대학교수인 남편과 함께 부산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옮긴 글) 

 

 

전설의 디바 김추자 1981년 결혼 이후 최초 인터뷰
“난 은퇴하지 않았어요,‘공백기’가 길어졌을 뿐”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재평가되는 김추자…‘솔 사이키 창법의 창시자’
독창적 창법 근간은 고교시절 익힌 국악
“30년 전 김추자 노래 의상 춤, 지금 내놔도 ‘첨단’”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
중앙정보부, 재벌 회장 모임 불려가
청와대 비서실 요청 거절했더니 ‘김추자 간첩설’
김추자 인생 영화화, 뮤지컬화 움직임
지난해 10월 음반 내려 기획사 설립
소주병 난자 사건…“난 독해요, 오직 무대 다시 설 생각만 했어요”

군사독재의 음영이 짙게 드리웠던 1970년대, 독창적 창법과 섹시한 춤으로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 여걸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 김추자(金秋子·56). 치마와 머리칼 길이조차 통제의 대상이던 그 시절, 그는 우울한 대중의 감성을 폭발시키며 ‘문화적 다이너마이트’ 노릇을 자임했다. 꽉 죄인 옷의 터질 듯한 곡선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할 만큼 뇌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광기(狂氣)까지 내비치는 김추자의 춤사위와 파격적인 의상은 30년이 지난 요즘 연예판에서도 전위적 시도로 꼽힐 만하다. 끓어오르듯 한을 내뱉다 어느덧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독특한 창법은 동서양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가 솔(soul)과 사이키델릭의 복합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대가 소화하기엔 그의 창법이 너무나 앞서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의 노래는 대학가의 응원가로, 진화한 7080세대의 애청곡 또는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무릇 ‘전위’란 시대의 탄압을 피해갈 수 없는 법.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공연을 펑크 내고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호출을 거부한 그의 초현실적 저항성은 가수 제명과 간첩설, 대마초 파동 등으로 이어지며 갖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 김추자 - 님은 먼 곳에

1981년 당시 동아대 정치학과 교수이던 박경수(現 명예교수)씨와 결혼한 그는 무대, 지면, 브라운관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6년 리사이틀을 위해 잠시 바깥나들이를 한 것을 제외하면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거부한 채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26년의 세월을 뚫고 ‘가수 김추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어렵사리 세 차례에 걸쳐 5시간이 넘는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인터뷰를 계속 거부하던 그였지만, 추억이 하나하나 되살아나자 곰살궂은 큰누이처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시원스럽게 쏟아냈다.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뚜우, 뚜우~

“여보세요, 김추자 선생님 댁이죠.”

“예, 제가 김추자인데요.”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심장이 멎는 듯했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미리 질문지를 만들어놓았지만, 막상 기대하지도 않던 전화 통화가 이뤄지니 도통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공연히 시답지 않은 얘기 몇 마디 늘어놨다가 제꺽 전화를 끊어버리면 어떡하나. 비음이 약간 섞인 매혹적인 목소리, 당당하고 거침없는 말투는 옛 방송에서 듣던 김추자의 그것이 분명했다.

“나 인터뷰 안 해요. ‘신동아’하고만 인터뷰를 하면 오래전부터 몇 년씩 내게 연락해온 다른 기자들은 뭐가 되겠어요. 집 앞에 와서 쪽지 남기고, 꽃 보내고, 전화로 통사정을 하던 사람들인데, 너무 미안하잖아요. 괜히 적을 만들고 싶진 않아요. 좋은 소식 있으면 내가 최 기자에게 전화할게요. 그간 꾸준하게 활동했던 사람이면 이런 얘기 안 하겠지만, 여러 모로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고.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 아찔하기도 하고. 별다른 뜻이 있어 인터뷰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주세요.”

▼ 근황만이라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팬이 궁금해하는데요.

“다른 기자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뭘 궁금해하는지 잘 알아요. 일과 사랑, 결혼, 아이, 인생 설계, 라이프스타일, 개인 철학…뭐 이런 것 아닙니까. 제목 몇 가지 보태지긴 하겠지만, 기자의 질문이란 게 다 비슷비슷하죠.”

기자들의 취재 생리까지 꿰차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매달렸다.

▼ 제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씀이군요. 한 일주일 쯤 집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면 될까요?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요즘 날씨가 좀 더우니 쿨하긴 하겠네요, 하하.”

▼ 선생님 전화번호를 알아내느라, 또 통화 연결되기까지 정말 고생 너무 많이 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최 기자가 접촉한 곳들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말라고 했어요.”

▼ 어쨌든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언젠가 와인 한 잔 앞에 두고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눌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럴 나이도 됐고….”

▼ 부군인 박 교수께서 외부 노출을 말리십니까.

“우리 남편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에요.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가수라는 사실조차 몰랐죠. 약혼한 뒤 ‘결혼을 미뤄도 좋으니 음악은 계속하라’고 할 만큼 스케일이 큰 남자죠.”

1970년대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유학 중이던 박 교수는 1981년 가수 김추자와 처음 만났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유명세를 모르고 있었다. 박 교수가 유학한 지역은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서로의 화끈함과 진지함에 반한 두 사람은 그해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명동성당에서 양측 가족들과 작곡가 신중현, 가수 박상규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불후의 명곡 ‘님은 먼 곳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그래서 무대를 떠난 후 그녀가 가장 애정을 쏟는 대상인 딸 소식부터 물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 얘기를 묻는데 딸깍 전화를 끊어버릴 엄마가 있겠는가. 예상대로였다.

“외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에 학사 편입했어요. 거기에서도 장학생인데 요즘 교생실습을 나가 있어요. 참, 오늘 같이 밥 먹는 날이에요. 어려운 시험이 있다고 했는데 잘 치렀는지 몰라. 우린 금요일마다 운동을 같이 해요.”

딸과 따로 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닌 게아니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그의 집과 서울대는 꽤 먼 거리다. 일단 대화의 물꼬는 튼 것 같다.



1978년 김추자 재기 리사이틀 공연 때 찍은 사진. 1980년 1월 앨범으로 출시됐다.

▼ 선생님의 빅 히트곡인 ‘님은 먼 곳에’의 진짜 작사가가 누구인지를 두고 작사가 유호씨와 작곡가 신중현씨가 서로 자신이 작사했다고 주장하면서 현재 2심 소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1심에선 유씨가 승소). 선생님도 증언을 한 것으로 압니다만.

“신중현 선생님이 (악보에) 4B 미술연필 같은 것으로 뭔가를 썼다는 기억만 나네요. 유호 선생님의 노랫말 글자 수가 많아서 신 선생님이 ‘리모델링’을 한 것 같아요. 저는 신 선생님이 그걸 고치는 과정은 못 봤어요. 다 된 것만 봤지. 그러니 잘 모르죠 뭐. 우리는 노래만 잘 부르면 됐으니까요.”

요즘 젊은 층에겐 조관우의 리메이크 곡으로 더 유명한 ‘님은 먼 곳에’는 1970년 동양TV의 드라마 주제가로 만들어졌다. 연속극 작가는 유호씨였고 처음 이 곡을 부르기로 내정된 가수는 패티 김이었다. 그런데 녹음 당일 패티 김이 “이런 곡은 못 부르겠다”고 거절하면서 김추자가 급하게 대타로 선정됐다. 데뷔 앨범(1969년)에 수록된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각종 가요상을 휩쓸던 김추자는 이 곡으로 스타의 입지를 완전하게 굳혔다. 그는 당시 신중현이 이끌던 덩키스의 멤버로, 김추자의 히트곡 대부분은 신중현 작곡이다.

‘님은 먼 곳에’는 그 후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됐지만, 가장 호응을 받고 있는 조관우조차 “김추자 선생님의 원곡을 따라갈 리메이크 곡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만큼 김추자의 음색은 흉내내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하다. 워낙 히트를 하자 “리듬이 내게 맞지 않다”고 거절했던 패티 김도 후일 이 노래를 불러 자신의 앨범에 끼워 넣었다

가사 중 특히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대목에서 ‘꿈도 주고’ 부분은 당시 최고의 섹시 스타였던 김추자의 터질 듯한 몸매와 겹쳐지며 ‘몸도 주고’로 야릇하게 개사돼 불렸다. 영화 ‘왕의 남자’를 만든 이준익 감독이 ‘달려라 허동구’ 후속 작으로 준비하고 있는 영화의 제목도 ‘님은 먼 곳에’다. 김추자의 데뷔 앨범에 들어 있는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1971년) 된 바 있다.

▼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는 ‘님은 먼 곳에’가 거의 연습 없이 녹음됐다면서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있었는데, 스튜디오에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와서 1~2시간 연습하곤 그냥 녹음했지요. 일일연속극 첫 방영이 다음날이었는데 그 전날 노래를 녹음한 거예요. 오전 8시에 콜을 받고 운현궁 스튜디오에 가서 악보를 받은 뒤 11시에 연습과 녹음이 다 끝났으니까요.”

▼ 몇 시간 만에 어떻게 그런 노래가 나올 수 있습니까.

“‘빗속의 여인’ 앨범도 아침 10시에 모여서 11시쯤 점심 먹고 오후 2시에 다시 연습 들어가서 4~5시에 녹음을 다 마쳤는데요 뭘. 그 앨범에 20곡가량이 들어갔는데 그걸 2시간 만에 다 녹음했으니까요. 연습은 거의 못 했죠.”

▼ ‘님은 먼 곳에’를 리메이크한 가수가 많은데 누가 제일 마음에 듭니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각자 스타일이 다 다르니 어떻게 평을 하겠어요. 어떤 가수든지 곡을 받고 나면 자기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부르니까 말입니다.”

판소리+솔+사이키델릭

김추자는 2000년대 들어 7080세대 음악의 르네상스 바람이 거세게 부는 와중에도 지금껏 TV 브라운관이나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대형 가수로는 거의 유일하다. 김추자 음반을 누구보다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이제 딱 두 사람 남았다. ‘그리운 사람끼리’ ‘목마와 숙녀’를 부른 박인희와 김추자다. 대중음악사적 관점에서 보면 김추자의 족적은 박인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은 관중을 압도하는 김추자의 현란한 춤사위와 섹시한 의상을 먼저 논하겠지만, 사실 그의 음악세계는 창법부터 30년을 앞서가고 있었다. 애절하고 구성지면서도 시원스레 탁 트였고, 어두운 듯하면서도 눈부시게 밝은 야누스 같은 창법은 당시 전위 음악의 장르였던 사이키델릭 음악에 흑인의 한(恨)이 배어나는 솔을 합친 것으로 평가된다. 최규성씨는 한을 내뱉는 듯 구성지면서 한편으론 탁 트인 김추자 노래법의 근원을 창이나 판소리, 민요와 같은 국악적인 면에서 찾는다.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핫팬츠, 모자, 무릎 아래 리본 차림이다. 의상 설정이 놀랍다.

“김추자는 춘천여고 재학시절 ‘춘천 향토제’에 나가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했지요. 당시 배뱅잇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였으니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죠. 그런 국악적 소질이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음악과 만나면서 김추자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녀가 1970년대에 민요 메들리 음반 몇 장을 낸 것도 그런 이력과 관계가 깊죠. 단조롭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묘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솔 사이키 가요’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습니다.”

김추자 본인의 설명은 이렇다.

“판소리나 창을 딱히 어디에서 배운 건 아니었어요. 어릴 때부터 웬만한 노래는 몇 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를 수 있었어요. 그때 부른 노래가 ‘수심가’인지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상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제가 워낙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국악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궁중무용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김천흥 선생의 초대로 탈춤공연을 한 적도 있죠.”

김추자가 데뷔한 1969년은 베트남전 파병 문제로 민심이 흉흉하고, 반전(反戰) 히피문화가 전세계를 풍미하던 시기.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사랑을 받은 것도 전쟁의 상처, 히피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에 이미 사이키델릭과 솔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한 김추자를 두고 문화평론가 이성욱은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천부적 재능

사이키델릭과 솔은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장르가 됐으니 김추자의 음악이 지금도 전혀 ‘촌스럽게’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가수는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노래를 부른다”는 김추자의 말은 어떻게 보면 그 스스로 ‘천부적 재능을 지닌 가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김추자의 예술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수’를 보였다. 1951년 춘천의 딸부잣집(5자매) 막내로 태어난 그는 춘천여중, 춘천여고를 거쳐 1969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다. 활달한 성격에 운동, 노래, 무용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이던 그는 춘천문화방송 합창단과 무용연구소(무용학원), 노래학원(개나리학원) 등을 다니며 ‘끼’를 가다듬었다. 운동에도 소질을 보여 강원도 배드민턴 대표선수와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했다.

고교 비평준화 시절, 춘천여고는 강원도 지역의 여학생 수재들이 모이던 곳. 김추자의 언니들도 사범대나 약대를 졸업했을 만큼 공부를 잘했다. 공부, 노래, 춤, 운동까지 못하는 게 없고 미모에다 춘천여고 응원단장까지 했으니 춘천시내 남자 고등학교에서 그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춘천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이 모델이 돼달라고 해서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남학생들이 유리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추자 왔다’며 환호해 부끄러워 혼났다”고 한다.

▼ 고교시절부터 가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군요.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네요.

“처음엔 미대에 가려고 했지요. 대학교수로부터 데생과 구상을 중심으로 레슨도 받고 실습도 열심히 했는데, 실기시험은 합격했지만 필기에서 떨어졌어요. 당시 동국대가 2차라, 그래도 예술 분야를 선택한다는 게 연극영화과였어요.”

▼ 가수가 된 건 어떤 계기였습니까. 신중현 사단에는 어떤 인연으로 들어갔고요. 대학교 노래자랑에서 1등을 한 게 계기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신 선생님 매니저이던 맹승호씨가 제 형부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 그분 소개로 가게 됐어요. 그때 신 선생님은 최고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대형 가수들과 작업하느라 매우 바빴어요. 그냥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는데 노래를 시키길래 불렀죠. 그 자리에선 별말씀이 없었는데 며칠 후 ‘늦기 전에’라는 곡을 툭 던져주셨어요. 기회가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죠. 선생님이 저를 무척 잘 본 모양이에요.”

결국 ‘늦기 전에’는 그의 데뷔곡이 됐다.

▼ 신중현 사단에서 노래 배우던 얘기 좀 해주세요.

“신 선생님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같이 호흡을 맞춰 노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워 나간 거지요. 제 노래는 몸에서 나와요. 머리에서 생각해서 나오는 게 아니고. 느낌 그대로이죠. 사이키델릭이나 솔 창법도 신 선생님에게 배웠다기보다는 생래적인 것으로 봐야겠죠.”

1986년 영국 버크셔 주의 윈저성을 방문한 김추자.(좌) 1973년 하와이 공연 당시.(우) 1984년 딸과 함께.(작은사진)

▼ 천부적 소질을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군요.

“아버지가 창도 잘하시고 예술방면에 관심이 많으셔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공부와 늦은 귀가에는 엄하셨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갖고 지원하셨어요.”

“감옥살이가 따로 없어요”

때로는 ‘솔직한 아부’가 상대를 감동시키는 법. 이번에는 기자의 경험담으로 이야기의 끈을 이어가기로 작정했다. 그의 어조는 딱 부러졌지만, 노력하는 자에겐 매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인터뷰가 계속됐다.

▼ 어제 후배들과 술 한잔하면서 ‘님은 먼 곳에’와 ‘봄비’를 불렀습니다.

“오! 그래요. 스케일이 아주 크군요.”

▼ 요즘도 비오는 날이면 ‘님은 먼 곳에’ ‘봄비’ ‘꽃잎’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곤 합니다. 아마 제 술친구들은 ‘내가 김추자와 얘기를 했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 같군요. 정 저를 만나기 싫으면 전화로라도 인터뷰를 하시죠.

“그런 분들도 있었어요. 문화방송 보도국인가에서 5분 뉴스에 잠깐만 녹음을 해달라고 하길래 안 된다고 했죠. 전화 인터뷰도 마찬가지죠. (언론 때문에) 감옥살이가 따로 없어요. 입도 감옥살이, 몸도 감옥살이.”

▼ 선생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저는 주로 술을 마시면서 듣는데요.

“그렇더라고요. 대개 내성적이고 섬세하고 그러더라고요. 속도 여리고 그런 경향이 있죠.”

19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기자는 ‘금지곡’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김추자의 노래를 좋아했다. 운동권 학생들이 김추자의 노래를 널리 좋아했던 것은 그의 저항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30대 중반을 넘어서자 김추자의 음악은 7080세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그 무엇인가가 돼 있었다.

▼ 인터넷에 있는 선생님의 팬 카페에도 가입했는데, 팬들이 선생님에게 정기모임에 꼭 한번 나와달랍니다.

“알아요. 회원분들이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 늘 고맙지요. 저도 잠깐씩 들어가 보곤 하는데, 제가 닉네임을 써서 들어가는데도 귀신같이 다 알아요. 카페 회원 중에는 우리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지켜보는지, 정원에 목련이 폈다 뭐가 어떻다 아주 유리문 들여다보듯, 손금 들여다보듯 하는 분들도 있어요.”

▼ 카페 회원들을 취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딸아이의 고교시절 담임선생님도 거기 가입돼 있어요. 그 선생님이 처음엔 제가 누구인지 몰랐죠. 아무개 엄마로만 알았지. 나중엔 이런저런 것을 다 상의할 만큼 친해졌지만 제가 김추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너무 영광’이라고 하더라고요.”

지난해 겨울 그는 다음 카페의 김추자 팬 모임인 ‘김추자 forever(cafe.daum. net/kimchooja)’에 자신의 옛 사진들을 공개해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나같이 언론매체에서 보지 못한 개인적인 사진들이었다. 카페지기 남종근(53)씨는 “2004년 4월 정기모임을 할 때 김추자씨는 오지 않고 남편인 박 교수가 꽃과 와인, 케이크, 카드 메시지를 들고 왔다”며 “처음에는 퀵 서비스 직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박 교수였다”고 했다. 앞에서 언급한 딸의 담임선생님도 이 카페 운영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네이버에도 김추자의 팬 카페(cafe. naver.com/chooja)가 있다. 네이버 팬 카페는 다음 카페와 달리 김추자의 전성기를 직접 보지 못한 30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곳으로 음악적 색채가 짙다. 이곳에는 전문 뮤지션도 많이 속해 있다. 카페지기 김모씨는 “지난해 모임에 김추자 선생이 와인 7병과 카드를 보내왔다. 회원들 중에는 처음엔 신중현의 음악에 심취하다 김추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거기에 푹 빠진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카페 회원들은 “김추자 선생이 다시 음반을 낸다면 젊은이들에게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녀의 음악은 너무나 신선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30년 세월이 흘렀는데 “신선하다”니.

‘70년대의 효리’

1976년 미스박테일러 패션쇼에서.

▼ 요즘 젊은 세대들도 김추자 선생님의 노래, 춤, 의상 등 모든 이미지가 친숙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냥 좋으니까 그렇겠지, 하하하. 내 노래가 왜 좋은가 하면…. 다른 좋은 가수도 많지만 순수함과 세련됨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화장을 짙게 하고 명품을 입어야 꼭 세련된 건 아니잖아요. 화장을 안 하고 자연스럽게, 옷도 그냥 아무렇게나 입어도 어울리는 것, 그러면서도 멋이 풍기는 것, 그런 게 세련된 거지. 난 뭘 바르고 그러지 않았거든요. 음악도 그래야 제대로 나오지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음악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지요.”

기자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1970년대 중후반, 교실에서, 또는 소풍 가서 벌어지는 장기자랑의 주메뉴는 노래와 춤이었다. 열 중 아홉은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니면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불렀다. 김추자의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그의 춤도 따라 췄다. 007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손 모양과 비슷한 손가락 춤(이은하의 ‘찌르기 디스코’의 원조)이 그것이다. 골반을 묘하게 뒤흔들며 추는 춤은 내 아버지 세대에게는 수컷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었는지 몰라도 꼬맹이들에겐 또래 속 인기관리 수단이었다. 동네 할아버지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세상 말세’라며 혀를 찼다.

어깨와 손, 골반이 따로 또 같이 움직이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김추자의 춤은 그에게 ‘국내 최초의 댄스 가수’라는 별칭을 안겼다. 관능적인 골반춤은 뭇 남성의 가슴을 ‘폭파’시켰다. 그래서 붙은 김추자의 별명이 ‘다이너마이트’다. 요즘 안무가들은 격렬하고 과격한 그의 춤 동작을 조금만 다듬으면 지금 이효리가 추는 춤과 흡사해진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한 방송사가 대역을 시켜 김추자의 춤을 이효리의 ‘애니클럽’에 맞춰 다시 추게 해봤는데 전혀 무리 없이 잘 맞아 들어갔다.

과거에도 이금희나 펄시스터즈와 같이 노래를 부를 때 춤을 가미한 가수들이 있었지만 김추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른 이들의 것은 단지 율동일 뿐 노래와 하나 된 춤이 아니었다. 김추자에게 춤과 노래는 분리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에게 노래를 가르쳤던 작곡가 신중현은 “김추자는 움직이지 않으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 김추자는 몸에서 노래가 나온다. 김추자의 춤은 ‘소리를 내기 위한 율동’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한 가지, 춘천여고 시절 응원단장을 지냈고 강원도를 대표하는 배드민턴, 기계체조 선수였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상은 또 어떤가. 앨범 재킷에 나온 의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최근 유행 패션이 망라돼 있다. 몸이 터져라 꽉 조여 상대적으로 엉덩이가 강조된 나팔바지, 목에 두른 머플러, 핫팬츠, 민소매 윗옷에 짧은 치마, 딱 붙는 가죽옷에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윗도리, 골반바지…. 2007년의 스타일리스트들은 1970년대의 김추자 패션을 “이탈리아 컬렉션에서 금방 나온 디자인이라고 할 만큼 카리스마를 풍긴다”며 혀를 내두른다. 도대체 김추자와 관련해서는 ‘전위’가 아닌 것이 없다.

간첩說의 진상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김추자는 이른바 그 전위적인 춤 동작 때문에 난데 없는 간첩설(說)에 휘말리기도 했다. ‘거짓말이야’(1971년)를 부를 때 선보인 특유의 손짓이 ‘북한과의 수신호’라며 그가 간첩이라는 소문이 불거진 것이다. ‘거짓말이야’라는 제목 자체가 유신정권에 대한 은유적 비판을 담고 있던 터에 이런저런 이유로 스케줄에 줄줄이 펑크가 나면서 ‘간첩처럼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헛소문까지 퍼졌다. 그의 집에서 간첩들이 사용하는 난수표가 발견됐다는 루머도 돌았다. 그런데 이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었다.

▼ 어쩌다 간첩으로까지 몰리게 됐습니까.

“저는 음악이 주어지면 그때마다 동작이 저절로 나와 거기에 맞추거든요. 그뿐이죠. 그런데 그 무렵 청와대 비서실에서 저더러 청와대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결국 안 들어갔거든요. 왜 오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청와대에서 부른 것과 간첩으로 몰린 사건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팍팍 올라가던 저를 꺾어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죠. 복합적인 이유로 저를 매장시키려 한 것이겠죠.”

▼ 청와대 제의를 거절해서 이른바 괘씸죄에 걸렸다는 뜻인가요.

“그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저뿐만이 아니고 많은 가수가 중앙정보부 파티에 불려갔었죠. 1971~72년 언저리쯤입니다. 재벌회장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나간 적도 있고 ‘저무는 바닷가’ 노래를 촬영하러 바닷가 인근의 컨트리클럽에 갔을 때는 녹화 도중에 모 언론사 사장이 밥을 먹자고 해서 불려간 적도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블랙리스트 올라

1971년의 김추자.

▼ 2000년 각 신문에 다시 음반을 내고 복귀한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결국 안 나왔으니 오보(誤報)가 되고 말았네요.

“만회해야지요 뭐. 그때 (음반을 내기 위해) 작곡가도 자주 만나고 재즈발레도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몰라요.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을 했지요. 헬스장에 가서 매일같이 몸매를 가다듬고 그랬는데….”

▼ 그런데 왜 음반 작업이 중단됐습니까.

“음반을 내고 공연도 하기로 기획자와 계약을 했는데, 그 사람은 음반보다는 공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죠. 그게 돈이 되니까. 좀 지켜보니 음반은 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때 저는 음반 취입에 비중을 더 두고 있었거든요. 지금처럼 음반시장이 어렵진 않았으니까.

약속한 녹음 날짜는 다가오는데 데모 테이프도 가져오지 않고 시간만 끌기에 계약이 자연스럽게 깨졌는데, 글쎄 그 기획자가 나 모르게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낸 거예요. 음반을 내기 위해 각종 비용이 들었다며 그걸 나보고 물래요. 계약서에도 분명 쌍방간에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자동으로 파기한다고 돼 있었는데. 결국 제가 이겼지만, 소송이 2년을 넘게 끌면서 소금에 절어 시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속앓이를 좀 했죠.

그뿐이 아니에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러 남편이 세종문화회관엘 갔는데, 글쎄 제가 그쪽 대관(貸館) 부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더라고요. 음반을 내기로 한 기획자를 비롯해서 제가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공연을 한다며 대관신청을 마구 해놓은 거예요. 그것도 골든타임에. 저는 동의하기는커녕 전혀 알지도 못한 일이었으니 당연히 공연은 펑크가 났겠죠. 영문을 모르는 회관측에선 저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은 거고요.”

▼ 음반을 내겠다고 했으니 곡을 주려는 작곡가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랬죠. 작곡가가 대여섯 명 있었는데 그중 2~3명만 곡을 잘 뽑아냈으면 됐는데…. 이름이 있든 없든 말입니다. 마음을 많이 썼는데….”

김추자 LP음반, 최고 호가 300만원

▼ 어떤 음반을 낼 계획이었나요.

“새로운 곡은 몇 곡만 하고 내 히트곡을 다시 부를 계획이었어요. ‘빗속의 여인’ ‘비련’ ‘마른 잎’ 같은 노래들 말이에요. 옛날엔 신중현 선생님 밴드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밴드에 맞춰서 새롭게 하면 또 다른 느낌의 노래가 나올 테니까.”

중고 LP음반 경매시장에서 김추자의 중 희소가치가 있는 음반은 30만원에서 300만원을 호가한다. 그는 1969년 데뷔 앨범 발표 이후 2년 동안 무려 12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아마 국내 가수 중 해적판 음반이 가장 많이 나온 이도 김추자일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몇 개월에서 몇 년씩 공식적인 가수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앨범업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판을 내고 싶어했다. 해적판도 보관상태만 좋으면 경매시장에선 비싼 값으로 낙찰되고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1971년 가요음반사상 최초로 외국으로 수출한 음반이 탄생했는데, 1호 음반의 주인공 역시 김추자였다. 영국의 세계적인 회사에서 리매스터링하고 재킷 디자인까지 제작해 외국 원판과 동일한 규격의 녹음 수준을 뽐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김추자 음반을 40여 장 소장하고 있지만 제일 비싼 것은 김추자가 철모를 쓰고 총을 잡고 있는 재킷 사진이 실린 음반이다. 그건 내게 없는데 최근 경매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추자가 전부 몇 장의 앨범을 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김추자의 음반 재킷 중에도 쇼킹한 ‘작품’이 적지 않다. 최씨가 소유한 음반 중에는 남성 성기와 비슷하게 생긴 그림을 재킷 오른쪽 윗부분에 그려넣은 것과 성적으로 절정에 다다른 여성의 표정을 담았다고 해 ‘섹스신 음반’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1974년 나온 김추자의 민요 메들리 음반(위쪽)과 남근과 비슷한 그림이 삽입돼 경매시장에서 값이 뛰고 있는 음반.

▼ 2000년에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몸매를 가다듬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관리를 하고 있습니까.

“운동은 필수죠. 안 하면 안 되죠.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죠. 어쩌다 천지가 개벽을 한다면 모를까 운동은 계속합니다. 골프도 하고, 헬스장 러닝머신에 오를 때도 있고, 운동장에 가서 흙을 밟으며 걷기도 하고 그래요. 저는 웬만해선 차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다.”

▼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모자를 쓰고 옷도 구호물자 같은 것을 입고 다닙니다. 얼마 전에도 예술의전당에 가서 ‘우모자’라는 뮤지컬을 봤는데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보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와 함께 하자고 했던 바로 그 뮤지컬 말입니다.”

▼ 뮤지컬 제의가 들어왔다고요?

“어느 날 이현승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의 음악인생을 주제로 ‘맘마미아’ 같은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한다나요. 이현승 감독이 제 인생을 시나리오로 옮겼거든요. 그런데 그걸 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제가 ‘그걸 파세요’ 했더니 이 감독은 ‘그걸 어떻게 팔아요’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일단 송승환씨측으로부터 기획서를 받아서 읽어보니까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초상권을 무제한으로 쓰겠다는 조항이 있더라고요. 가령 찻잔 같은 데에도 내 사진을 넣고 해서 기념품을 만들어 팔 모양이었어요. 무제한으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써도 되지만, 사진을 찍다보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 텐데. 그렇게 예민하고 심각한 부분을 ‘무한정’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쓰게 한다는 게 꺼림칙했습니다. 그래서 보류했지요. 아이템은 많고 좋은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

▼ 이현승 감독의 시나리오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저의 음악인생을 중심으로 내게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등등.”

▼ 시나리오 작업이 끝났다면 영화는 언제 만나볼 수 있나요.

“제 인생 이야기이니까 적합한 대역 배우를 구해야 하고, 제 노래도 불러야겠지요. 시대극이라 제작자의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당시의 자동차, 건물 등을 재현하려면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테니까요.”

이현승 감독과 인터뷰가 이뤄지지 않아 김추자 영화 제작에 대한 뒷이야기만 귀동냥을 하게 됐는데, 아직 투자자를 찾지 못해 충무로에서는 ‘물 건너간 것 아닌가’ 하는 추측만 무성하다는 소식이었다. 김추자의 팬들을 안타깝게 하는 소식이다.

▼ 인터뷰를 거절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언제가 다시 무대에 설 때를 위해 자신을 신비화하려는 의도 때문은 아닌가요.

“예로부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이죠. 그러느라고 다들 썩지 썩어(웃음). 농담이고요. 그런 심리도 있죠. 하지만 제가 제 관리를 못해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제 관리를 하고 있거든요. 정말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저도 참 독한 사람이에요. 인터뷰도 영원히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 뭔가 건수를 갖고 나서겠다는 겁니다.”

김추자는 한 번도 은퇴선언을 하지 않은 ‘현역가수’다. 다만 공백기가 길어졌을 따름이다. 그는, 가수는 노래를 부르면서 대중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그는 “판사는 판결로, 검사는 기소장으로, 기자는 기사로, 배우는 연기로, 가수는 노래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본업은 제쳐놓고 입으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존심은 대단하군요.

“아니, 자존심이 대단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김추자입니다.”

김추자의 자존심은 당대에도 유명했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출연 스케줄 펑크와 잠적을 남발해 ‘구름 같은 김추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는데, 1971년 초 부산의 한 공연 때는 피날레 가수를 누가 할 것인지를 두고 김세레나와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 공연장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이 일로 가요계에선 처음으로 가수분과위원회로부터 3개월 가수자격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오해와 진실

김추자는 이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펑크’라고 표현하는데, 제 처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계속됐기 때문에 공연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부산에서의 리사이틀은 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당시 포스터를 보면 제가 제일 크게 나와 있고 다른 사람들은 게스트 형식으로 참가했어요. 당연히 제가 피날레 가수가 돼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해도 안 되기에 그런거죠. 자격정지의 이유는 김세레나씨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워 가수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것인데 그건 완전한 오보였죠. 홧김에 제 화장품 박스를 걷어찬 게 전부예요.”

그해 12월에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동료 가수이자 전 매니저였던 S씨가 깨진 소주병을 김추자의 얼굴에 휘둘러 100바늘이 넘게 꿰매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성형수술을 6번이나 해야 했을 만큼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사건 며칠 후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붕대를 친친 감은 채 공연장에 나가 “오늘은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섰다”고 말해 무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갔다.

▼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그 사람과 저는 매니저와 가수로서의 공적인 관계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저보고 결혼을 해달래요. 그래서 거절했더니 그 난리가 난 겁니다. 그 사람은 해병대 출신에다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를 지냈는데, 당시 조직폭력배가 분장실과 공연장에 마구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여서 보디가드 겸 매니저로 썼는데 어이없게 됐죠.”

▼ 그 사람이 김 선생님 때문에 모 가수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죠.

“명보극장 앞에 있는 오나시스 다방에서 그랬는데, 자기들끼리 싸운 사정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 공연 펑크를 낸 적이 자주 있었지요. 잠적했다는 소문도 나고.

“당시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 중에는 폭력배 비슷한 사람이 많았어요. 지방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개런티를 안 주는 사람도 많았죠. 1회 공연 끝나면 ‘2회 공연 끝나고 주겠다’는 식으로. 그래서 2회 공연 마치고도 개런티를 못 받아 보따리를 싸 올라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죠. ‘잠적’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고. 왜 가수가 그런 눈치를 봐야 하나요. 전 그 사람들이 아무리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1971년 국내 최초로 해외 수출된 김추자 골든히트앨범(오른쪽). 왼쪽은 골반바지를 입은 김추자의 1973년 음반.

그는 시련을 겪어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가수자격이 정지됐을 때도 그랬지만 ‘소주병 난자 사건’ 1년 후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고 해외공연을 다니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75년 8월, 광복 30주년 기념 예술제에 참가한 그에게 언론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해 12월 그는 ‘가요계 정화운동’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일명 ‘대마초 가수 사건’에 휘말려 한동안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신중현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다 목소리가 안 나와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션 중에 베이스기타를 치던 사람이 대마초를 구해와 ‘이걸 피우면 목이 터진다’고 했어요. 저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목에 좋다고 계속 권하기에 한 모금 빨았는데 기침이 나와서 바로 뱉어 버렸습니다. 사레가 들려 도저히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후 지금껏 담배 한 개비 피운 적이 없어요. 대마초를 담아둔 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검찰 수색에서 그게 나왔지요. 통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한번 쳐다본 적도 없으니까요. 제가 대마초를 피운 적이 없다는 사실은 검사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3년 후 다시 한 번 재기 리사이틀에 나섰다. 1978년 대한극장에서 있은 공연은 뭇 남성에게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엄청난 관객이 모여든 가운데 열린 당시 공연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래를 불렀는지 드레스가 흘러내려 가슴이 다 드러난 줄도 몰랐다. 그만큼 몰입과 열정의 무대였다. “한번 어디에 빠지면 다른 것은 모른다”는 김추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추자 LP를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

▼ 김 선생님에 대해 공부를 할수록, 이야기를 할수록 참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이 있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하지만 마음먹으면 정말 열심히 하죠. 소주병 난자 사건 때도 그랬죠. 코가 잘리고, 눈이 벌어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뒤집어진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보통 여자 같으면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얼굴이 이렇게 됐으니 난 이제 죽었구나 하고 약이라도 먹고 죽을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하면 성형을 잘 해서, 또 몸매를 더 예쁘게 해서 다음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에서 집니다.”

▼ 은퇴한 적이 없으니 음반은 다시 내야죠.

“당연하죠. 그런데 요즘 음반시장이 너무 죽었어요. 사실 지난해 10월부터 음반을 내려고 ‘김추자·컴퍼니’라는 기획사를 설립하고 작곡가를 만나러 다녔어요. 사업자등록도 제 이름으로 했어요. 지난 10년 넘게 많은 음악을 들어온 덕에 직접 음반 제작을 하려고 했던 거죠. 내게 맞는 작곡가를 찾으려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는데, 음반시장 상황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저는 그 사람의 작품을 들으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대다수의 작곡가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의욕 상실이라고나 할까. 작곡을 해서 음반이 팔려야 먹고사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음반을 내려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저를 참 많이들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면에서 팬들에게 빚이 많아요. 1982년에 신중현 선생님에게 받은 곡이 열 곡 정도 있습니다. 신 선생님이 젊을 때죠. 그 데모테이프와 악보가 아직 있어요.”

“지금 본업은 주부”

▼ 폭발적인 가창력과 충격적인 춤사위로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로서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참아왔습니까.

“저는 뭐든 한 가지를 하면 거기에 미치는 경향이 있어요. 두 가지를 같이 잘 하진 못하죠. 살림을 하다보니까 거기에 푹 빠졌죠. 친정어머니가 예전에 큰살림을 하셨어요. 2년 전 병원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함께 살았습니다.”

▼ 시어머니도 아닌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요.

“제가 어머니한테 잘하니까 제 딸도 제게 잘하는 것 같아요. 남편도 옹졸하지 않고 따지지 않는 스타일이고. 배웠다는 사람이 그런 것쯤 이해 못 하면 안 되지요. 그렇지 않나요?”

▼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말뚝에도 절한다’잖아요.

“우리 남편은 저보고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하곤 해요. 처음에는 외모만 보고 성격도 와일드하고 조금 난(亂)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거든요. 무슨 일, 예를 들어 집을 지을 때도 미장일, 벽돌 쌓는 일, 관공서 일 이런 것들도 제가 다 시키고 나서서 했거든요. 남편은 어떻게 그렇게 신이 나서 일하느냐고 의아해했죠. 아마 제가 집에서도 노래를 부를 때처럼 하고 있을 줄 알았나봐요. 내숭도 떨고, 애교도 부리고, 좀 야한 쪽으로 기대했겠죠.”

▼ 가수 김추자가 살림을 살고 있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저는 그게 제 본업인 것 같아요. 부엌일이나 세탁일 모두 날래요. 빨래도 어머니가 하던 방식으로 삶고 방망이질하고 그래요. 밀린 빨래 세탁기 돌려서 헹구고 그러지 않아요. 푹푹 삶아서 두드려야 직성이 풀리지. 지금도 그런 도구들 다 갖춰놓고 살아요. 삶는 들통도 크기마다 다 있죠. 저는 아날로그 식입니다. 딸아이는 저더러 왜 이렇게 사냐, 조선시대 여자냐, 엄마가 가수 맞냐고 묻지요. 거울도 안 보고 양말도 아무렇게나 신고 하니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다고 해요.”

‘인간 김추자’

▼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죠. 예쁘게 차리고 나가면 백화점 언니들이 우리 모녀가 자매인 줄 알아요. ‘언니 참 이쁘다’는 말을 들으면 딸이 그러죠, ‘물건 팔려고 저러는 거야’라고. 하지만 주인들은 한사코 그럽니다. 진짜 언니처럼 보인다고. 상황이 그 지경쯤 되면 딸애가 이래요. ‘엄마, 이제 대충 입고 다녀 그럼’.”

▼ ‘인간 김추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다 얘기했잖아요. 인간 김추자는 된장, 고추장 담그는 데 명수고 젓갈도 잘 알고 김치도 잘 담그며 이 세상에 지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존재. 다만 자연만이 김추자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연을 노래한 것 들어보세요. 거기에 김추자가 있어요.”

전화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사진을 좀 찍게 해달라고 넌지시 말했다. 팍 튕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솔직하게 현재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했다.

“제가 기자들이 찾아오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수술하러 갔다, 병원 갔다…이렇게 하면 더 이상 말을 안 하거든요. 호텔에서 디너쇼 하자고 전화 오면 얼굴 수술했다고 거절해요. 이런 사실을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저를 미워할까요.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에요. 지난해 말부터 얼굴을 조금씩 손보고 있거든요. 저도 여자이니까 이해를 좀 해주세요.”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난해 말 그를 만난 한 취재원은 “그녀가 이번에는 진짜 수술을 한 게 맞다”고 확인해줬다. 전화 인터뷰를 한 며칠 후 그녀의 딸에게서 e-메일이 왔다.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이 8장이나 들어 있었다. 김추자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