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추자는 가수이므로 얘기하자면 먼저 그의 노래를 정확히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의 노래를 활자로 어떻게 들을 것인가. 노래 가사를 옮겨 적을 것인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그 가사의 단어들이 지니는 뜻은 김추자를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못된다. 애초부터 그것들은 김추자를 위한 것이거나 김추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단어들이라면, 몇십원만 주고도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싸구려 노래책이나 변두리 여관방의 담벼락 낙서가운데도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가사 대신 악보를 적어서도 안된다. 악보대로라면 굳이 김추자를 동원하지 않고 다를 가수나 또는 악기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연주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악보도 가사도 결국 김추자의 본심과는 무관하다는 얘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추자의 노래를 귀로 듣거나 눈으로 읽을 수 없다. 우리는 김추자의 노래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추자, 그 여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격정과 만나지 않고서는 적어도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신음소리같은 노래를 듣고 있으면 불타는 영혼의 유황냄새로 가슴이 저리는 것이다.
그는 관중을 향해 애소(哀訴)하지 않는다. 신파조의 눈물이나 아픔을 결코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내공으로 향한 신음소리는 마치 밤안개 속의 기적처럼 어느 것 하나씩은 모두 잃고 사는
우리들 가슴 속 허무의 벽에 와 닿는다.
가수 김추자가 비싼 것은 그 허무의 벽이 위치해 있는 지점의 차원에서 그 인기의 값이 정해진 까닭이다.
셀라시에 황제와 울보
김추자, 본명.
6 25 전쟁의 와중이던 1951년 춘천에서 났다. 딸만 넷이던 집에 또 하나의 딸로 막내가 된 추자는,
고집불통, 울보에 엄마 젖을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빨았노라고, 스물 여덟 살이 된 지금
「끌끌끌...」 웃으며 어린 시절을 술회한다.
「하하하...」 또는 「후후훗...」 웃을 여자로 알고 만났는데 추자는 계란빵처럼 부풀어 오른 양쪽 뺨과
아버지는 추자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는데 다행히 딸을 많이 두고 가셨으므로
왈가닥 다섯 공주님을 키워낸 홀어머니가 큰 고생을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은 논, 밭, 과수원의 형태로 아직껏 4만평이나 남아있어 지난 3년 동안도 그 농장 수익 가지고 버틸 수가 있었다.
젖먹이 때 유별나게도 많이 울어서인지 추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잘하는 종달새로 전교에서 유명하였다.
노래 뿐만이 아니라 무용이나 운동에도 출중한 소질을 발휘, 춘천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대항 행사가 있으면
무슨 행사에고 감초처럼 뽑혔고 셀라시에 에디오피아 황제가 내한하여 춘천을 방문하였을 때는
황제님 목에 꽃둘레를 걸어드렸다.
혈액형 B형을 타고난 계집아이답게 샘이 많아 공부마저 열심히 하였으므로
12년 내리 반장을 지내면서 콧대를 높여 마지 않았다.
공부 잘하고 무용 잘하고 노래 잘하고 운동 잘하는 「추자씨」의 뒤엔 늘 여드름 머스마들이 쭈볏거리며 따라 다녔으나
그러면서도 공부방은 미래의 가수 김추자의 환상으로만 가득 차 한 밤중에도 FM에서 좋은 음악만 흘러 나오면
아, 이 대목에서 김추자는 처음으로 「훗훗훗...」 하고 처녀웃음을 웃었다.
꿈 많은 여고시절의 추억은 역시 백전노장의 갑옷도 말랑말랑하게 녹이는가 보다.
추자가 처음 상경한 것은 1969년도 행복하고 행복했던 여고시절에 종지부를 찍고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행 열처에 몸을 실으므로써였다.
전공과목 선택에 무진 애를 먹었는데 아무 걸 선택해도 자신은 있었으나
그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은 앞서의 예감과 그리고 그 예감 뒤를 따르는 다소는 낭만적인
「끼」의 자신감이 작용한 때문이었는데 아뭏든 이 대학생활은 2년을 못넘기고 끝장이 났다.
신입생 환영을 뜻하는 교내 노래자랑 대회에 나아가 심사위원 전원, 방청 학생전원 만장일치로
당당 1등을 해 낸 것이 그 발단이 되었다.
신입생 김추자는 금새 교내 명물이 되었고 그 소문이 인연이 되어 마침내 김추자는 신중현과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신중현의 등장은 김추자의 반생을 얘기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전자음악과 무그의 기인으로 알려진 그는 일찍부터 우리나라 경음악 수입의 관문이 되고 있었던
미8군 무대에 진출하여 재즈와 록큰롤로 크게 인정을 받으면서
국내 악단에서는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연주가로 성가를 높이는 한편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도입한 특징적인 작품 활동으로 음악의 새 물결에 민간함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창법의 구습을 못 벗어나는 가수들에게 실망하고 있던 신중현에게 김추자는 적격의 신선한 머티리얼 이었다.
165cm의 훤칠한 체격, 민감한 음악성, 풍부한 성량, 낮은 B에서 높은 C까지 자유자래로 구사하는
육감적인 음폭이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데뷰곡이자 출세곡인 「늦기전에」를 신중현으로부터 받았다.
이 때 추자 나이 갓 스물, 영광과 오욕과 환희와 절망이 간단없이 교차되는
쇼 비지네스 세계의 새로운 세월 앞에 마침내 마주 서게 된 것이다.
All or Nothing.- 이것은 김추자의 성격이다. 새롭게 전개된 세월 앞에 그는 모든 것을 다 투척했다.
절대음에의 탐구
스무 살 소녀의 오색빛깔 꿈과 그 꿈 속에서 반짝이던 대학교의 뺏지와
그리고 귀여운 재롱둥이 막내딸의 걸어왔던 가족들의 분분한 기대까지도 몽땅 빼앗긴 숙명의 행로,
운명의 리듬 앞에 모두 바쳤다. 골백번 죽고 또 죽어도 이제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을
성녀로 승화시켜 가질 수 있다는 왕성한 확신은 그가 김추자 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사에 냉정한 그였지만 그의 독특한 점은 그가 한 번 결심하였을 때 자기 자신까지도 냉정히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20년 소녀의 꿈, 꿈의 베일을 모두 벗어 내버린 순간 정말로 그는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화신이 되었다.
바람직한 사회란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의 개개인이 열성적이고 성실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모험에 몸을 아끼지 않을 때 기틀이 마련된다.
전문직의 기능이 숭상되는 나라일수록 직업에 귀천이 없으며,
그런 사회일수록 우수한 정치인과 우수한 상인과 우수한 학자와 우수한 구두수선공들이 배출되는 이치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모두 정치가나 승려가 되어서는 안 되듯이 세상의 여자들도 모두 가수나 배우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짓을 자기 직능으로 택했다면 당연히 목숨까지도 내걸고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쇼 걸의 길을 택한 김추자는 정말 쇼 걸 김추자로 다시 태어났고 그리고 마녀가 되었다.
연예계, 얼마나 철저하고 얼마나 비정한 프로패셔널의 세계인가.
그 분야에서 그 나름의 도를 터득하기까지 그가 남 몰래 흘린 눈물의 댓가는 아무도 보상해주지 못한다.
다만 김추자에게 있어 무대는, 마녀가 혼신을 부르는 재단이었다고 모든 청중들도 그렇게 믿었다.
청중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쑤시고 터뜨려 쇼무대에 활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수는 어느 시대에도 필요하다.
그런데 김추자, 그렇게 마녀처럼 노래의 혼으로 부르다보면 웃을 때 「끌끌끌...」하는 소리가 나게 되는가?
「끌끌끌...」에서는 어쩐지 박복한 여인의 체념냄새가 나는데.
그렇다. 이제 따지자면 스물여덟살난 여자이면서 그보다 더 오래오래 살아 본 다른 여자의 여러 몫,
신고(辛苦)가 김추자에게는 따랐던 것이다.
첫번째 사고는 72년도에 일어났다.
본인은 그 사건에 대해 언급조차 하기 싫어하는 눈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던
「김추자 난자 상해사건」의 충격을 그를 아끼는 많은 팬들은 지금도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얼굴의 형태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중태에 빠진 김추자가 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아무도 갖지 못했다.
3회에 걸친 안면부 복원 대수술을 포함한 생과 사의 만 1년 동안 그는 그 누구하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비로소 자기의 생을 끌고 가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라는 것을 침묵으로 투시하면서
이제 자신에게 자신의 소유로 남은 유일한 것, 그것이 노래라는 사실을 피가 마르도록 애타게 되씹었다.
암흑 속에서 그는 혼자였으며 그 모습은 바로 자기의 노래인 것을 보았다.
「불행한 사고였지만 나에게는 인간적 성장의 한 계기였다. 한 번도 쓰러져 본 적이 없는 나는
어릴 적 꿈대로 천사가 되고 싶었던 그리고 그것을 하늘에만 있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철이 들었다. 하늘의 천사보다 땅 위의 천사들을 먼저 배워야
하늘의 천사도 될 수 있다는 이치가 조금씩 조금씩 내 것으로 되어 가고 있다.」
이 말은 아마 정확할 것이다. 그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1년 뒤에는 분연히 신장개업(?)을 하고 일어나 김추자는
「여자」가 아니라 「가수」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팬들을 믿었듯이 팬들도 그를 버리지 않아 그가 첫번째 재기한 73년과 그 이듬해의 리사이틀을 성공시켰다.
상해사건으로 인해 그의 사생활 일부가 노출되자 힐난의 눈초리로 그를 경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의 불운을 동정하고 그의 처절한 새출발을 장하게 여기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
실제로 그가 다시 무대에 나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거짓말...」하고 노래를 부를 때면
추자가 제 맘 속의 아픔을 고백하누나 싶어 안스러운 표정들로 공감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낯선 남자들은 집 안을 온통 뒤진 끝에 「대마초 관련」의 증거를 발견해냈던 것이다.
일부 연예인들간에 한창 유행하던 것이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집안에 놔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명하였으나
당시의 시국상황으로서는 「연예계풍토 정화」라는 일차적인 사회적 요구가 중요한 때였다.
김추자는 그 날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춥고 외롭고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서글퍼서 20일을 울다가
「가수활동 전면 중지」의 처분을 받고 창백한 얼굴로 풀려 나왔다.
영하의 거리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였던 것이다.
웬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면서 잠긴 목에서는 울음도 웃음도 아닌 소리, 「끌끌끌...」, 회한의 자조음이 끓어 올라왔다.
자신도 처음 듣는 그런 소리였다.
추자혼을 남기려고
은연자중 3년 동안 추자는 거의 두문불출,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싫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였다.
가끔씩 「단칸 전세방에 냉장고 하나 쌀통 하나 놓고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너무너무 부러워」
그런 서울 변두리에 사는 옛 친구들을 찾아 조용조용한 담소를 나누는 것이 그 중의 낙이었다.
자기보다 못해 보이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보다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이었던가 하는 것을 깨달은
귀중한 3년이었노라고 이제 김추자는 말한다. 어른이 된 것이다.
「한 때는 원망스럽고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 때문에 자포자기를 할 뻔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더욱 강한 여자가 된 것 같고, 이제나마 다시 삶의 의미를 되돌려 준 당국의 조치를 감사히 생각한다.
새 출발하는 새 무대에서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아 달라. 노래가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노래를 버릴 수 없다.」
김추자, 그는 다시 일어섰다. 스카알렛 오하라처럼 고난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 남아 다시 우뚝 일어섰다.
웬만한 불운쯤이라면 이제 그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버티고 서서 혼신의 힘으로 잃어버린 시간들 속에 분산된 「김추자의 영혼」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이다.
재기 공연을 기하여 신중현과 다시 뭉친다.
(1978.6 엘레강스)
70년대 초 뭇남성들은 김추자라는 대형 여가수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몽롱했다.
우선 터질 듯한 몸매를 여과없이 드러낸 꽉 조이는 의상과 엉덩이를 현란하게 돌려대는 춤이 그랬다.
60년대를 풍미했던 최초댄스가수 이금희와도 차원이 달랐다. 폭발적인 가창력까지 겸비한
그녀의 등장에 온국민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드러내길 꺼리는 정적인 사회를 일순간에 후끈 달아오르게 했을 정도.
그녀는 파격 그자체였다. 40을 넘긴 중년의 남성들은 '잠자던 돌부처도 불러세웠다'는 김추자를
가요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가수로 기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온국민들의 눈과 귀를 자신을 향해 고정시키게 한 여가수는 유래가 없었다, 노래건 스캔들이건 간에...
51년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다섯자매 딸부자집의 막내로 태어난 김추자.
명문 춘천여고 재학시절땐 공부도 곧잘했지만 강원도 기계체조 대표선수와 응원단장까지 도맡아 했을 정도로
끼가 넘쳐났던 다재다능한 귀여운 소녀였다. 대중과의 첫만남은 춘천향토제였다.
이때 부른 수심가로 3위에 입상한 김추자는
이은관(배뱅이굿으로 유명)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을 정도로 창도 맛깔나게 불렀다.
처음으로 가수의 꿈을 심게된 순간이였다. 교육자들인 언니들과 달리 동국대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정한건 이 때문이다.
김추자는 신입생 노래자랑 대회에서 끼가 넘치는 춤과 노래로 심사위원, 관객 모두의 열광적인 호응속에
1등을 차지하면서 최고인기학생으로 자리잡았다.
18세 대학신입생은 신중현의 동생 신수현의 소개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작곡가 신중현의 삼각지 녹음실로 무작정 찾아갔다.
당시 인기절정의 유명가수 김상희와 신곡 발표준비로 분주하던 신중현이 김추자에게 눈길을 줄 리가 만무.
그래도 모른척 일주일동안 매일 찾아갔다. 귀찮아 내쫓을 궁리로 시켜본 노래테스트.
김추자는 단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중현의 마음을 앗아가 버렸다.
김추자의 데뷔앨범은 69년10월20일 출시된 <늦기전에/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예그린레코드,DG가06>.
신중현이 이끄는 '뉴덩키스'는 우리 국악의 창과 접목한 전혀 새로운 싸이키한 감각적 연주를 시도했다.
처음 음반이 나왔을땐 대중들은 낯설은 사운드에 어리둥절했지만 신선한 여대생 김추자의 열정적인 춤사위와
싸이키창법에 이내 열광하였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묘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소울 싸이키가요라는 신조어를 탄생케 했다.
신데렐라의 탄생이었다. 판권을 이어받은 성음제작소는 더블,싱글자켓 등
여러가지 버전의 재판들을 동일날짜로 발매했을 정도로 데뷔음반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호사다마라 할까. 인기가 치솟은 김추자의 주변은 장안의 건달들이 들끓게 되었다.
이때 3곡을 부르며 데뷔앨범작업을 함께한 프로레슬러 출신 소윤석은 보디가드겸 매니저 역활을 맡게 된다.
김추자의 첫 스캔들 상대는 가수 박일남.
김추자를 놓고 벌였던 박일남과 소윤석의 스카라극장앞 노상혈투는 당시 사회를 벌집 쑤신 듯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데뷔앨범에서 발표한 창과 싸이키를 버무린듯한 창법의 '늦기전에'와 사회분위기와 맞아 떨어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또한 2면수록곡인 '떠나야할 그사람'은 숨겨진 명곡. 후에 펄 씨스터즈가 리바이벌해 큰 인기를 얻었던 곡이지만
미8군에서 명성을 날리던 김선을 영입해 결성한 '뉴덩키스'의 꽹과리소리와
작렬하는 전자기타가 빚어내는 프로그레시브한 사운드는 시대를 한참 추월했다.
더구나 김선의 뛰어난 보칼로 구성된 7분40초의 롱버전은 소름끼치는 감동까지 선사한다.
69년 데뷔앨범발표이후 71년까지 김추자는 무려 12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소공동 '라스베가스'를 주무대로 방송출연, 콘서트 등 눈코 뜰새없는 인기강행군을 벌였다.
신문방송의 가수상을 휩쓰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출연스케줄을 어기고 잠적을 밥먹듯이 하여
'다이나마이트'외에 '구름같은 김추자'라는 또하나의 별명을 얻게 된다.
방만한 스케줄관리와 약속의 불이행은 씻을 수 없는 그녀의 오점으로 남는다.
71년 7월초 배호와 김세레나와 함께한 부산의 쇼무대에서 휘날레를 장식할 가수를 놓고
김세레나와 머리채까지 잡는 한판 자존심 싸움을 벌인 뒤 출연도중 사라져버린 사건이 문제였다.
가수분과위원회(회장 최희준)는 한국가요사상 최초로 김추자에게 3개월 가수자격정지라는 극약처분을 내렸다.
이후 김추자는 유래가 없는 스캔들 메이커로 참새들의 입방아에 끊이지 않고 오르내리게 된다.
김추자와 펄시스터즈가 당시 최고의 라이벌로 서로의 힘을 소진하고 있을때 그 틈을 비집고 혜성처럼 나타난
디바 '김정미' 그녀의 메가톤급 핵폭탄같은 성량과 음악성, 폭발적인 카리스마로 단숨에 톱스타 반열에 오른다.
김정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중현 사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신중현은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소화해 낸 가수로 펄 씨스터즈와 함께 김정미를 꼽고 있다.
김정미는 제2의 김추자라고 불려질 만큼 김추자의 창법을 닮았다.
김추자와 김정미, 모두 신중현에게 창법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정미는 신중현의 창법 지도를 가장 제대로 받았던 가수였다. 김정미는 김추자에 비해 성량은 풍부하지 못하지만
신중현 음악 스타일에 걸맞은 창법, 특히 사이키델릭 창법에서는 독보적인 가수였다.
김정미의 노래가 지니는 매력은 우선은 섹시하다는 데 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한편의 에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1960년대 말부터 사이키델릭에 심취했던 신중현은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이키델릭 작품들을 발표했다.
특히 1971년에 가수로 데뷔한 김정미에게 집중적으로 사이키델릭 작품들을 부르게 했다.
김정미는 <봄>, <햇님>, <바람>과 같은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작품을 불러서 인기를 끌었다.
음악잡지인 『대중가요』에 김정미의 인기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972년 봄이다.
1972년 유니버살레코드사에서 ‘김정미 최신가요집’ 음반(KLS-44, 1LP)이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김정미의 첫 녹음이었다.
이 음반에는 신중현의 작품 <잊어야 한다면>, <간다고 하지 마오>, <언제나>, <나 생각나네>, <기다리는 마음>,
<가나다라마바>, <잊었던 사랑>, <못잊어>가 담겨있다.
이 음반에서 반주는 그룹 ‘더 맨’이 맡았다. ‘김정미 NOW’ 음반(성음제작소 SEL-100 023, 1LP)은 1973년 11월에 제작되었다.
이 음반에는 <봄>, <햇님>, <바람>, <불어라 봄바람>(김자림 작사), <당신의 꿈>, <아름다운 강산>, <고독한 마음>,
<비가 오네>, <가나다라마바>와 같은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걸작과 한국전통음악과 록을 접목한 <나도 몰래>가 담겨있다.
이 음반의 앞표지에는 꽃밭을 배경으로 한 김정미의 인물 사진이 실려있는데,
이 사진은 신중현이 촬영한 것이며 꽃은 사이키델릭을 상징한다. 김정미는 1977년 9월에 지구레코드공사에서 제작한
음반(JLS-1201239, 1LP)에서 김성욱 작사, 김영광 작곡의 <나는 바본가 봐>, 하중희 작사, 김용선 작곡의 <셋방살이>,
김태완 작사, 김영광 작곡의 <너를 보내고>,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작곡, 지명길 역사의 <난 정말 몰라요>(Move Over),
김성욱 작사, 김영광 작곡의 <너를 갖고파>를 녹음했다. 김정미는 이 음반을 끝으로 가요계를 떠났다.
1974년 9월에 지구레코드공사에서 제작된 김정미의 음반(JLS-120920, 1LP)은
신중현, 김정미 콤비가 마지막으로 이뤄 낸 사이키델릭 음악 음반이다.
이 음반에는 신중현의 작품 <이건 너무하잖아요>, <생각해>, <담배꽁초>,
<갈대>(남지연 작사), <당신이>, <너와 나>가 담겨있다. 김정미의 녹음이 담겨있는 음반으로 지금까지 13장이 확인되었다.
김정미의 음반 가운데 신중현의 작품이 담겨있는 것은 12장이며, 신중현 외의 작곡가들의 작품이 담겨있는 것은 1장이다.
김추자
그녀는 데뷔 때부터 강렬했다. 꽉 죈 옷을 통해 드러나는 당당한 볼륨, 열정이 담긴 음색,
마음을 빼앗아 갈듯이 현란한 몸짓…. 가수 김추자(44세)의 별명은 「다이너마이트」이다.
처량한 음악이 유행하던 가요계의 정서를 「폭파」시킨, 응축된 에너지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1969년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그가 데뷔 했을 때 반응은 노래만큼 요란했다.
하이틴의 18세 소녀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진한 사랑의 노래를 당시의 음악인과 팬들은 정확히 규정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울 사이키 가수」라는 국적 불명의 용어가 탄생했고, 소문도 요란했다.
「배뱅이굿」의 일인자 이은관씨에게 창을 배우기도 했던 김추자는 작곡가 신중현을 만나 테스트를 받았다.
신중현은 『대어감이라는 느낌이 전율처럼 몸을 감쌌다.
그러나 겸손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이미 김추자의 배짱과 끼는 커져 있었고 특히 무대에서 숨김없이 나타났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중략)/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주고, 꿈도주고 / 멀어져 갔네…>(님은 먼 곳에, 신중현 작사 작곡)
1971년 발표된 「님은 먼 곳에」는 그의 대표곡이다.
터질 듯한 창법, 열정을 가누지 못하는 듯 광기 서린 춤에 힘입어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다른 가수들이 질투를 느낄 정도로 탁월했던 그의 춤은 우리 가요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노래에 맛을 주기 위해 춤을 곁들이거나, 춤을 보여주려고 엉터리 노래를 불러대는 요즘의 일부 댄스 음악인과는 다르다.
김추자는 노래와 춤의 화학적 반응을 이루어낸 가수라고 말 할 수 있다.
오디오형 가수, 비디오형 가수라는 말이 있지만 그의 음악은 어느 한쪽을 생략하고는 온전한 맛을 느낄 수 없다.
이를 충족시키는 대표적 가수가 미국의 마돈나라면 그는 10여년을 앞선 셈이다 .
김추자는 「왜 아니 올까」 「그럴 수가 있나요」 「무인도」 등의 노래로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다가
당시 많은 가수들이 고초를 겪은 대마초사건으로 1975년 겨울 무대를 떠났다.
이후 몇차례 재기를 시도했으나 옛날의 영화를 회복하지 못했다.
현재 대학교수인 남편과 함께 부산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