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人物情報 參考

[스크랩] Re:스스로 가려 뽑은 9개의 문단(재편집)

鶴山 徐 仁 2008. 10. 1. 16:44

 

-한국 문화예술 위원회가 주최하는 '작가의 작품을 목소리를 통한 동영상으로 남기다' 행사가19일 오후 4시 30분 아르코 예술정보관(서초동 예술의 전당내) 3층 세미나 실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에는 소설가 정소성 씨가 초대돼 '고통의 신화적 인식"을 주제로 자신의 작품 9편을 낭독한다. 그는 동인문학상, 윤동주 문학상, 월탄문학상을 등을 수상하였다
-문화일보 18일자 19p

-19일자에 참석한 문인들과 독자들ㅇ에게 배포된 자료집을 소개한다.

 2008년 하반기 <문학, 작가의 목소리로 남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작가의 작품을 목소리를 통한 동영상으로 남기다.


(소설가 정소성 - 고통의 신화적 인식)

 

참여 안내

ㅇ 시 간 : 2008년 9월 19일(금) / 4시30분

ㅇ 장 소 : 아르코예술정보관 3층 세미나실

ㅇ 참가비 : 무 료

ㅇ 문의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정보관(서초동) 02) 760-4683, 4684

 

소설가 정소성

1944년 경북 봉화 출생

1969년~1976년 서울대 불문학과 학부, 대학원 졸업

1977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질주’ 발초회추천

1978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잃어버린 황혼’ 완료추천

1979년~1989년 단국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1990년~ 단국대 대학원 불어불문학과 교수

          ~ 한국불어불문학회 감사, 이사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1983년 프랑스 그르노블대학교 대학원 불문학 박사

1990년~1992년 민족문학 작가회의 이사

2002년~2006년 보리회 5대 회장

2006년~2007년 한국작가교수회 5대 회장

현재 단국대학교 인문대 불어불문학전공 교수

수상 : 동인문학상(1985), 윤동주문학상(1985),

만우박영준문학상(1988), 월탄문학상(1995)

소설집 :<타인의 시선> <뜨거운 강> <혼혈의 땅>등

․작품 :<여자의 성> <천년을 내리는 눈> <제비꽃>

<안개내리는 강> <가리마 탄 여인> <운명>등

 

진행 : 이명원

- 1970년 서울 출생

- 서울시립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1997년 제2회 상상비평상 수상

- <비평과 전망> <문화연대> <여의도통신> <내일을

여는 작가>의 편집위원을 역임

- 저서: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종언 이후> <연옥에 서 고고학자처럼> <파문> <타는 혀> 등

- 현재 성균관대, 가톨릭대, 숭의여대 등 출강 중

 

낭독 작품

1. 아테네 가는 배

2. 돌아오지 않는 섬

3. 잃어버린 황혼

4. 포구의 숲

5. 장마

6. 여자의 성

7. 두 아내

8. 바람의 여인

9. 태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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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작가의 목소리로 남다>를 동영상으로 다시 만나실 수 있습니다.

( http://lecture.arko.or.kr >> 회원가입 후 로그인 >> 문학, 작가의 목소리로 남다 )

 

※ 사정상 주차 편의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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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가는 배 (1986 / 동서문화사)

“염려 말아요. 등속달로 부쳐 드리리다. 알리야, 이모집에서 며칠 쉬었다 할머니 모시고 흑해 연안 내 별장으로 오너라.”

노신사는 떠날 준비를 했다. 마당에서 누군가가 흑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마라차였다. 트럭 운전수는 휠체어를 저편으로 끌고 갔다.

그 순간 무릎걸음으로 주하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이굉석씨였다.

“주하, 나에게 맡겨! 그분이 그렇게 오래 기차나 비행기를 타지 않게 하고도 두 분을 만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애!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핼쑥한 주하의 얼굴에서 유난히 총기에 반짝이는 그의 두 눈이 갑자기 빛을 발했다. 뜨거운 열판에 살을 덴 사람처럼 주하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지팡이를 찾아 짚고는 몸을 추슬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이굉석시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드는 계속 울고 있었고, 니케는 방 한구석 소파에 앉아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식은 목구멍을 쥐어뜯는 갈증을 느끼고 방을 뛰쳐나갔다. 미칠 듯이 뛰는 가슴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어둠이 쌓인 마당 한구석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뭔가 열심히 마라차에게 이야기하는 트럭 운전수의 우람한 몸집이 보였다. 에게 해 밤부두에서는 먼먼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기적 소리를 타고 아테나 여신의 빈방이, 앙드로마크의 시모이 강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흘러갔다. 전설과 신화의 숲으로 뒤덮인 낯선 땅을 지팡이에 몸을 얹은 주하가 뛰고 있는 모습이 저 멀리 떠올라 보였다.

 

돌아오지 않는 섬 (‘아테네 가는 배’에 수록 / 1986 / 동서문화사)

그러나 그날은 뭐니뭐니해도 명구가 육지 구경을 처음 해보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 아버지만이 넘어갈 수 있다고 믿는 저 해류의 소용돌이를 아버지와 함께 처음 넘어가 보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과연 위대했다. 명구의 몸뚱이를 밧줄로 뗏목에다 묶었다. 다리를 펴서 앉혀 놓고 뗏목의 굵은 나뭇가지에다가 칡넝쿨로 칭칭 동여매었다. 그리고 자신은 길다란 노 하나를 두 손에 들고 뗏목의 가장자리에 서서 소용돌이치는 물살과 대결했다. 뗏목이 서서히 맴을 돌다가 갑자기 기우는 듯 핑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뗏목의 한 귀퉁이가 물살 속에 휩쓸렸다. 그런가 하면 뗏목의 또 다른 한 귀퉁이가 물살에 의해 떠들쳐졌다. 뗏목은 엎어질 듯이 기울어졌고, 거대한 파도 더미가 뗏목 위로 덮쳐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과연 위대했다. 파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한 푸른 벽을 기대고 선 거인처럼 보였다. 더구나 명구가 앉아 있어서 그렇게 올려다 보였는지도 몰랐다. 아들의 책을 싼 보따리를 아버지는 목에 걸고 있었다. 물이 묻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푸른 벽에다가 대고 맹렬히 노를 휘저어댔다. 뗏목은 기우뚱하더니 슬쩍 파도를 타고 올라 해류의 거대한 한 가닥을 넘어서는 듯했다. 그가 파도와 싸우고 있는 모습은 거대한 벽화를 제작하고 있는 위대한 화가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그의 목에 걸린 책보따리는 어느 틈엔가 그의 등판 위로 돌려져 있었다. 책보따리도 마구 춤을 추었다. 명구는 사지가 떨어져나가는 통증을 느꼈다. 아픈 정도가 아니라 사지가 절단되는 듯한 어떤 파열감이었다. 그러나 명구는 울 수가 없었다. 울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굳게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들린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저 무서운 파도의 벽에다가 절묘한 노의 터치를 수없이 던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위대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위대해 보였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장엄하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조금만 참어!”

“네, 알았어요. 아버지!”

부자는 서로가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뗏목이 기우뚱거리기를 서너 번, 잊은 듯이 평온을 되찾았다. 어머니와 두 동생이 살고 있는 섬은 까마득히 멀어진 것이다. 그것은 세인들에게 사람의 간을 파내 먹는 문둥이들만이 흘러들어가 산다는 전설적인 문둥이 섬일 뿐이다. 섬은 점점 명구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묶인 손발을 풀어 준다. 손목과 발목에 피멍이 들었다.

“많이 아팠냐?”

“네, 죽을 뻔 했어요.”

 

잃어버린 황혼 (‘아테네 가는 배’에 수록 / 1986 / 동서문화사)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플랫폼은 물속에 파묻힌 섬처럼 쓸쓸하기 그지없다. 빗줄기에 얻어 맞은 시멘트 바닥은 까칠하게 돋아나 보인다. 대기 중인 객차에 몸을 얹는다. 빗속의 새벽차라서 그런지 승객은 많지 않다. 한기가 엉겨 있는 창가의 어느 좌석에 몸을 내린다. 빗물이 새어들어 앞좌석의 등받이에는 얼룩이 져있다. 군복차림이 어둠 속을 내왕하고 있는 게 보인다. 뿌연 창너머로 오래된 역사의 우중충한 모습이 비쳐온다. 텅 빈 플랫폼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빈사의 내 가슴에 슬픔의 도랑을 만드는 것 같다. 이것은 감상인가, 이 나이에 이 무슨 센치인가. 감상인지 모른다. 일종의 주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피어오르는 빗소리 속에, 떠올라 보이는 우교장의 모습은 그 빗줄기 속을, 그 빗소리 속을 걷히는 어둠과 함께 벗어나려 하는 나의 흐릿한 시야에서, 힘없는 몸짓을 하면서 나에게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이 거대한 삶의 미궁에서 길을 잃고 허우적거리다가 끝내는 헤어나지 못하고 그 속으로 영영 빨려 들어가 버린 우교장의 모습이 여객들의 체온 탓으로 가볍게 서리기 시작한 차창의 김발 위에 어리어온다. 인생에의 모든 꿈을 잃어버린 채, 미칠 것 같은 색채에의 충동을 끄지 못하고, 그림 못 그리는 화가 아닌 화가가 되어 공허한 가슴을 안고 비틀거리는 나의 모습도 비쳐온다. 우교장의 모습이 비친다. 박선생의 모습이 어린다. 부저가 울린다. 기관차가 내뿜는 긴 한숨소리가 들린다.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둔중한 쇠붙이의 마찰음이 연쇄적으로 일고 있다. 역사의 지붕 위에, 구름다리의 지붕 위에 쏟아지는 빗줄기에서 하얀 띠의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차체는 미끄러진다. 기적이 빗속을 퍼져간다. 누군가가 플랫폼에서 비를 맞으며 이쪽으로 마구 달려오고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차체의 전진은 빨라진다.

뚜우.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찌푸린 하늘을 흔들고 있다. 서린 김을 닦아내고 얼굴을 차창에 대어본다. 머리털이 빗줄기에 쓸려 이마가 덮이고 전신에 옷이 달라붙은 조그맣고 깡마른 길수씨다. 무언가를 소리치고 있다. 들리지 않는다. 내 이름을 부르겠지. 그는 내 얼굴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흐린 하늘 저 멀리 쏟아지는 빗속을 허우적거리고 있다.

 


포구의 숲
( ‘뜨거운 강’에 수록 / 1988 / 동아)

눈을 들면 숲은 언제나 검푸른 자태를 내 시야에 드러냈다. 이 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을 때부터 나는 심상찮은 숲의 존재를 의식했고, 지금에 와서는 내 의식의 공간 속에 빽빽이 들어서게 되었다. 숲이 긴 시간이 걸리지 않고 이렇게 나의 의식 속에 자리잡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몸담은 연구실의 시야 속에 있기 때문이리라.

대학이라는 사회에서 밥을 먹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내 연구실의 주인 격인 김 교수의 덕택이다. 현대 문학 쪽으로도 시 이론을 택한 나의 전공은, 이 사회에서 내가 직장을 얻게 되는 데 큰 방해가 되었다. 웬 놈의 시 전공자가 그렇게도 많은지 월급을 제대로 주는 전임 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5개월 방학 동안에는 굶고 앉았는 시간 강사 한 자리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여름 방학 2개월, 겨울 방학 3개월 동안 할 일 없이 애꿎은 담배만 재로 날리고 앉았거나,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 외국 시편들을 번역한답시고 끙끙대는 생활이 이 김 교수의 구원의 손길로 해서 청산된 것이다. 5년 남짓 시간 강사 노릇을 했으니 심신은 찌들대로 찌들어 마음은 핍박해지고 얼굴은 중늙은이 상이다.

전임 교원이랍시고 발령장을 받았으나, 나 같은 신참에게 번듯한 연구실이 배당될 리 없었다. 신분은 전임이었으나 여전히 나는 보따리를 싸 들고 배회하는 낭인 꼴을 면치 못했다. 학교에 오면 나는 주로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방에서 책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기껏 해야 창가 서가에 꽂혀 있는 잡지들이나 신문을 보는 게 고작이다. 그나마도 시들해져서 출근하는 즉시로 가방 보따리를 심부름하는 여고생 책상 위에 꿇어 앉혀 놓고 온 종일 바둑을 두게 된다. 그것이 속 편한 노릇이었다. 그렇지도 못하면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면서 대화에 끼어들게 된다. 학교의 형편이 어떻게 좋아지고 나 자신의 연조도 다소 쌓이고 해서 깨끗한 방 하나가 배당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그다운 연구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의 연구 생활은 유예되고 있는 셈이었다.

 


장마
(한국소설 9․10월호 / 2007 / 한국소설가 협회)

그러다가 변산댁이 운명하였다. 변산댁의 생명은 그녀가 새벽마다 거적 밖으로 내어놓는 밥그릇으로 판명되었다. 병세가 나빠 그녀의 상태가 아주 나쁘면 그릇이 사나흘 만에 나오는 수도 있었다. 거적 밖에서 밥그릇을 수습하는 사람이 바로 점순이었다. 그러니 동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이라 하여도 그 동굴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폐병에 감염되어 죽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비록 동굴 안까지는 들어가지 않지만 늘 병자의 밥그릇을 만지는 점순이가 건재하는 것을 보면 그것도 사람 나름인 것 같았다.

근 닷새나 밥그릇이 거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동굴로부터 코를 들 수 없는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 변산댁의 죽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시체 처리에 있어서 의견이 엇갈렸다.

영광댁과 태식은 시체를 거두어 어디 분묘를 만들고 정상적인 장례를 치르는 것을 반대했다. 동굴 속에 불을 질러 완전히 태워 버리고 나서 동굴을 허물어 뜨려 그대로 자연 매장시키자는 것이었다. 당시 벌써 할머니가 같은 병으로 타계한 형편이라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다들 이 병에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다.

황오철씨라든가 인부들은 주인도 없는데 아무리 측실이지만 부인인데 그럴 수는 없고 시체를 꺼내어 분묘를 만들어 장사 지내자고 했다. 주인이 나중에 나타날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영광댁과 태식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동굴 속으로 엄청난 양의 석유를 들이붓고 불을 붙였다. 동굴의 아궁이에서는 검붉은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굴 안에서는 탁, 탁 시체 타는 소리가 났다. 바위를 굴려와 굴의 입구를 반쯤 막았다. 그 안에 있던 시신과 평상과 여러 가지 물건들이 죄다 다 타는 모양이었다. 괴상스런 짐승의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런 것들도 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삵괭이라든가 고양이 쥐새끼들도 도망치기는 어려운 듯했다. 완전 연소를 위해 공기구멍만 남기고 동굴 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틀어막았다. 조금 후 한 번 더 석유를 들이붓고 다시 불을 질렀다. 시신이 타다 만다면 그것도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그리곤 인부들을 동원해 동굴 위에다가 큰 바위들을 끌어올려 집터 다지는 기계로 그것을 내리찧어 동굴을 허물어뜨렸다. 몇 번 세게 내려찧으니 동굴은 쉽게 천정이 내려앉았다. 이렇게 해서 거의 완벽하게 지독한 병자의 전염을 완전 차단하면서 매장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광댁과 태식이가 역시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니 이 과수원이 폐허가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황씨 부녀만이 오갈 데가 없어서 이 과수원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 과수원이 정덕의 이름으로 넘어간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정말 불가사의한 노릇이었다.

그 후 무너진 동굴은 별 탈 없이 수십 년을 버티었다.

그러나 이번 장마로 그 옛날 무너진 동굴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아래 축대가 붕괴되는 통에 그것의 내부가 들어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두 개의 해골이 나온 것이었다. 뭔가를 알고 일을 처리할 만한 사람들은 전부 고인이 되어 버려 점순이 혼자서 수해피해 조사차 나온 면서기에게 신고한 것이다.

 


여자의 성
(1996 / 세계일보사)

유서 서린 강가에 위치한 이 작은 도시는 이제 밤의 끝없는 바다에 떠서 새벽이라는 이름의 항구를 향해 조용히 노저어 가고 있었다.

홍영희는 왜 자기가 여기에, 이 시간에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아득하게 흘러가버린 젊은 시절의 마음의 연인이었던 구경철의 요청에 의해 여기에 왔다고 하더라도, 그의 유세가 끝나면 당연히 강주의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든지, 당초 계획대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어쩔 수 없는 힘에 끌려 지금 이 자리에 이러고 있지 않는가. 그녀는 갑작스레 화투장을 끌어쥐고 울고 싶은 심정을 느꼈다.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그 어쩔 수 없음에 대한 몸부림 같은 것이 자신의 육신과 저 깊은 바닥에서 자꾸만 솟구치고 있었다.

정말이지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김영길과 함께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북극이건 남극이건 어디든지 멀리멀리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만이 이 답답하고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가당이나 한 말인가. 깊은 사유와 지적 훈련에 길들여져 있는 자신이 왜 이다지도 말도 안되는 것을 꿈꾼단 말인가.

‘아아악!’

그녀는 결국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화투짝을 끌어 쥐고서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학생들은 눈이 휘둥그래져 홍영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쌌다. 그녀는 손을 방바닥에 짚고, 머리를 한껏 수그리고 있었다. 뭔가를 게우지는 않았다.

사진반 학생들은 그녀가 졸도하는 것을 한 번 겪은 경험이 있었다. 무슨 충격적인 일이 있으면, 그녀는 졸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번 역시 그녀가 낮의 그 충격적인 사건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이제서야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영길을 향해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만 그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선생님! 속이 좋지 않으세요?”

“어디 잠시 누우셔서 안정을 취하시죠!”

“낮에 너무나 놀라셨나 봐!”

“언젠가 마곡사에서도 깡패들 땜에 놀라셔서 기절하셨잖어!”

“점심 저녁을 제대로 드시지 않으셨을 거야!”

“선생님, 저기 비어 있는 베드에 잠시라도 누우시죠!”

 


두 아내
(2004 / 찬섬)

과연 자기들 앞으로 총을 멘 사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이들 도망자들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보고도 못 본 척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이들이 어둠 속에 엎드려 있는 쪽으로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가고 나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일행은 둑을 지나 강기슭으로 내려갔다. 전신에서는 땀방울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손에는 땀이 물수건을 쥔 것처럼 흘렀다. 그것은 정말 죽음과 삶을 가르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강물 소리가 귀를 막았다. 거기에는 지길청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 타스! 어서!”

지길청은 일행을 재촉했다. 철우는 여자들을 부축하여 배에 올려 태웠다. 끝으로 자신도 배에 돌랐다. 안내자는 손을 저으면서 잘 가라는 말을 했다.

배는 미치듯이 날뛰는 강물 위로 나섰다. 지길청은 마구 노를 저었다. 비록 물살은 거셌지만 지길청은 노련했다. 그는 믿음직했다.

지길청은 이런 짓을 수시로 하는 터라 그렇게 공포에 질린 것 같지 않았다.

배가 강의 절반쯤 왔을 때였다. 이제는 탈출에 완전히 성공했다고 마음을 놓을 찰나였다.

알 수 없는 서치라이트가 휙 이들을 비치더니,

“서라우! 애이 서믄 갈겨버리갔어! 쫑 간나새끼덜!”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틈엔가,

탕, 탕, 탕, 탕, 탕―

하는 총 소리가 들렸다. 강물에는 여전히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비치고 있었다. 강물 흐르는 소리만이 세차게 들려올 뿐이었다. 배는 순식간에 뒤집어 지더니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그리고는 계속 날아오는 총탄 세례를 받아 박살이 나고 말았다.

누가 죽고 살았는지 전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들 물 속으로 들어가버렸던 것이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햐아―, 잇세에느 이런 도망자드르 하루에도 서너 건이야! 야, 이 병신 같은 노무덜아! 너희드르 도대체 뭣덜 하네!
우리 기동 타격반이 없으믄 네놈드르 교활한 반동들으 한 노무두 못 잡아! 한심한 노무덜!”

“죄송합네다!”

서치라이트는 거두어졌다.

강물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다들 세찬 강물에 휘말려 떠내려간 듯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물 속에 몸을 숨기고 헤엄을 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엄한동이 기다리고 있는 강기슭에 어둠을 뚫고 지길청이 머리통이 솟구쳤다. 그의 오른손은 기절한 듯한 한 여인네의 겨드랑이를 다부지게 휘어 감고 있었다.

“햐아―, 잇세에느 도무지 일으느 제대루 되지르 않슴메! 이 려자 증말 죽으 거스르 살리느라 나이 을마나 고생으 했는지 원! 그 남자느 결국 물귀신으느 되구 말았지마느 이 려자르 만나려구 을마나 속으 태웠나……. 죽어두 눈으 깜지 못하르 거슴메……. 저노무 기동 타격댄가 뭔가 하느 노무드르 때문에 연 다섯 번째나 당했지비! 저노무드르 쥐약으 멕일 도리가 있어야지!”

하고 말했다.

“어마이……, 어마이…….”

한길이와 한동이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흐느껴 울면서 기절한 가영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눕혔다. 호흡부터 확인했다. 지길청의 말대로 숨은 쉬고 있었다. 다만 기절했을 뿐이었다.

“아바이와 할매느……?”

“물살이 세차셔 세 사래미르 다 거머잡으 수느 없었지비……. 그리구 두 사래미느 등판에 벌써 구멍이 나 있었슴메…….”

그는 물 속 깊숙이 잠수한 탓인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강물은 더욱 깊어갔고, 어둠은 더욱 짙어져 갔다.

두만강 강물의 세찬 물살 소리는 천지를 삼킬 듯했다.

 

당신에게

경황이 없어서 길게 쓰지 못하오. 가영이를 살기기 위해 북한 땅으로 들어가는데 아무래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소이다. 나의 예감대로 내가 이 세상을 영원히 하직하면 당신과 가영이는 무산이와 한동이를 데리고 옛날 청진에서처럼 정답게 사시구려. 당신에게는 무산이가 있고, 가영에게는 한동이가 있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겠지요. 그래도 너무 힘들고 외로우면 재혼을 하셔도 좋습니다. 아아, 마음이 너무나 홀가분합니다. 정말 죽어도 괜찮을 것만 같습니다.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꼭 죽어야한 한다면, 내가 없고 당신들 두 사람이 살아 있는 이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왠지 그 아름다움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의 발걸음을 잡을 도리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야, 나를 잊어주소서.

나는 정말 전쟁에 무참히 깨어지는 인간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만이 나 나름대로 전쟁을 이기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이 발걸음을 북조선을 향해 내뻗지 않는다면 나는 무슨 방법으로 전쟁과 맞서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바람의 여인 (2006 / 실천문학사)

한참을 걷다가 김씨 아주머니가 윤태에게 말했다.

“윤태야, 여기 가마이 있거라. 내 저기 가서 오줌을 누고 오꾸마. 다른 데로 가마 안 된데이.”

“야, 아주무이. 어서 갔다 오이소. 오줌을 누는 데 따라가마 안 되지예?”

“그라마, 이제 윤태는 철이 다 들었데이.”

윤태는 고갯길의 마루 한켠으로 비켜섰다. 사람들이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김씨 아주머니는 저쪽 후미진 데로 오줌을 누러 갔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윤태는 아주머니가 일러준 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아이고, 이쁘기도 해라. 부모를 잃은 아이인갑다. 야야, 아부지 어무이 잃어뿌맀나?”

윤태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윤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무슨 오줌을 그렇게 오래 누었을까. 그들은 다시금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주무이요, 희라가 없구마!”

“…….”

“오줌 눌라고 내려놨다가 다시 안지 않았는 거 아잉교!”

“…….”

“희라가 없으마 나는 남쪽으로 피란을 가지 않을 끼구마!”

윤태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야 김씨 아주머니는 걸음을 멈추고 윤태에게 입을 뗐다.

“이런 난리통에는 그렇게 이상스럽게 생기먹은 계집아이는 길바닥에 내삐리뿌는 기다. 옛날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데이.”

“아이구마. 희라는 이상하게 생기먹은 알라가 아니라예! 내 동생이라예! 알라를 내삐리뿌리마 나는 피란을 가지 않을 끼구마.”

“윤태야, 그기이 아이다. 그 알라는 니 동생이 아이다. 불여시 빨갱이 여자의 알라다. 그 알라의 아부지는 빨갱이 대빵이라 카드라.”

“아이구마. 불여시 여자가 우리 엄마가 되었고, 그라고 알라는 내 동생이 된 기라예! 아부지가 그래 말했어예!”

윤태는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그는 벌써 방금 떠나온 그 자리로 되돌아가서 김씨 아주머니가 오줌 누러 내려갔던 골짜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이 걸음을 뒤뚱거리면서 희라를 불러댔다.

“희라야! 희라야! 니 어딨노? 나는 피란을 안 가고 니하고 같이 죽을끼다.”

김씨 아주머니가 윤태를 따라갔다.

“윤태야, 윤태야, 희라를 살릴라 카다가 우리 모두 죽는다. 내 말을 듣거래이.”

김씨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으나 그것은 빗소리에 먹혀버렸다. 어느 틈엔가 윤태는 물을 듬뿍 먹은 강보에 싸여 있는 희라를 가슴에 안고 올라왔다. 빗물을 뒤집어쓴 윤태는 아기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아주무이가 아기를 버리마 나는 아주무이를 따라가지 않을 끼구마. 혼자 가소. 나는 아기를 데리고 내 혼자 갈 끼라예.”

윤태는 머리에서 이마를 거쳐 흐르는 빗물 때문에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러나 두 손은 아기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빗물을 훔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울고 있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그가 울고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아기를 버리마 나는 아주무이가 싫구마. 혼자 가소. 나는 아주무이를 따라가지 않을 끼구마. 살아도 아기하고 살고 죽어도 아기하고 같이 죽을 끼구마.”

윤태는 정말 혼자 살 결심을 하는 듯했다. 그는 아기를 둔덕바지에 올려놓고는 다시금 자신의 등판에 업었다. 혼자 걸어갈 결심을 굳힌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이 험한 전장의 후방을 어찌 여섯 살배기 꼬마가 젖먹이 아기를 안고 혼자 피란길을 걸어갈 수 있단 말인가.

 


태양인
(1997 / 열림원) 

“예끼 치사한 자식. 네놈도 사타구니 사이에 뭘 차고 있다고? 그래 남자로 태어났으면 조금은 어리숙한 데가 있어야지. 평생 약종상이나 해처먹고 살아라! 그래 내 금쪽 같은 몸을 열어줄 때는 네놈도 각오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 남자놈이 어쩌면 그렇게도 늘 푼수가 없느냐? 들병이가 아닌 여자의 몸을 차지하려면 남자놈이 혼신의 힘을 다해야지 어찌 꿩 먹고 알 먹으려 하느냐. 치사한 자식! 여지 밑구멍에는 절대로 공짜가 없다는 말 들어보지도 못했느냐?”

약종상은 벌거벗은 몸으로 뒤로 콰당 나자빠졌다. 이 녀석은 태음인 같았다. 결단력이 없었고, 굼뜨고 음흉하기만 했지, 뜨거운 열정 같은 것은 없었다. 태음인은 병질인 것이다.

방안이 어둑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형체는 알아볼 수는 있을 정도였다. 무슨 짓을 하려다 하지도 못하고 바지 허리춤마저 내린 처지에 계집의 굳센 팔뚝힘에 의해 뒤로 내질러진 사내의 꼴이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 꼴을 하고서도 어찌 사내라 할 수 있으리!

“지금도 늦지 않았다. 어서 말하거라! 내가 몸을 열어줄 수도 있지만 네 놈의 쌍판이 하도 음흉하게 생겨먹어서 내 몸만 망쳐버리고 막상 소문은 전해 듣지 못할까봐서 하는 소리다!”

그러니까 되련이도 이 자가 태음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안 된다. 네년이 이렇게 지독학 계집인데 소문을 전해 듣고서도 가랑이를 열어 주겠느냐?”

“네놈은 정말 치사한 자식이고나. 네놈을 저승으로 보내버리겠다.”

되련이는 벌거벗은 사내를 향해 날이 퍼런 비수를 빼들었다. 어둑한 방안이었으나 조그만 칼날은 푸르스름한 빛을 발했다.

“네놈의 그 시원찮은 것을 잘라버리겠다.”

치맛단을 내린 되련이는 발정한 암태처럼 잽싸게 뛰었다. 그러고는 번개처럼 사내의 턱밑으로 비수를 들이대더니 까슬한 아래턱을 비수로 쓰윽 그었다. 그녀는 이 자가 무슨 비밀을 알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으으으으……. 이년이 사람 죽이네.”

“이놈아, 이것도 그거라로 차고 있느냐? 이것부터 잘라버리겠다. 어서 말해.”

“그럼, 약조를 하거라. 날 죽이지 않는다고.”

놈은 참으로 실속파였다. 이제는 육욕이 아니라, 목숨을 보전할 궁리를 하는 것이다. 그는 살이 쪄서 이런 경우 숨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헐떡거렸다.

“그래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

“그럼, 이것도 자르지 않겠느냐?”

“그렇다. 네놈은 괘씸하지만, 네 여편네가 불쌍해서 그냥 붙여놓겠다. 더러운 놈!”

되련이는 다시금 비수를 놈의 아래턱에 쓰윽 문질렀다. 약간 피가 돋아났다.

놈은 되게도 혼이 났던지 덜덜 떨기까지 했지만, 무슨 꿍수를 부리는지 금방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 곱상스러워 보이던 계집종년들이 알고 보니 충분히 살인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쌔고 인정사정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소문을 말해버리고도 과연 무사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태음인은 이렇게 최후까지 계산을 해보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는 좀처럼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털어내 놓지 않는다.

성질이 급한 되련이는 더 참지 못하고서는 사내의 그것을 칼끝으로 쳐버렸다. 완전히 잘리지는 않았으나, 피가 심하게 솟구쳤다.

“어서 말해. 그러지 않으면 모가지를 쳐버리겠어.”

되련이는 사내를 타고 앉아 목을 향해 칼을 내리꽂는 자세를 취했다.

“아구구구……. 사람 죽네. 제발 살려만 다오.”

“그러니 어서 말해. 그리고 다시는 그런 수작하지 마라. 네놈은 여자의 전재산인 몸을 그렇게도 쉽게 가지려 하느냐! 발칙한 놈! 어서 말해. 네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날 당하지 못해. 우리는 전문적인 칼잽이야. 허나 네놈 물건은 잘리지 않았으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라. 거기에 상처가 나야 네놈이 관가에 가서 거짓부렁을 하지 못할 것이 아니냐. 그래도 말하지 못할까?”

사납기 짝이 없는 계집이었다. 어쩌면 이런 계집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사내의 어깻죽지를 향해 칼을 내리꽂았다. 칼날은 어깨의 살갗을 순식간에 벗겨버렸다. 놈은 정말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그래 그래, 말하지 말하지. 제발 죽이지는 말아라.”

“어서 말해.”

“이충원 어른과 이반오 진사 두 분 다 운명하셨다.”

“뭐, 뭣이라고?”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소문으로 들었느냐, 확인을 했느냐?”

“확인을 했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확인을 했다. 왜냐하면 두 분 다 여기 종운가까지 사람을 보내 약재를 구하셨기 때문이다. 그 집에 약재를 대던 사람들이 두 눈으로 보았다고 전했다. 장례를 치르는 것도 보았다고 하더라.”

“두 분 다 병사라는 말이냐?”

“그것까지는 정확히 모른다. 한 분만 병사고 다른 분은 사고사인 것 같다.”

“두 분이 작고하신 날짜가 언제더냐?”

“그것까지는 정확히 모른다. 한 3, 4년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주 까마득한, 잊혀진 얘기이다. 이렇게 약장사를 하다 보면 죽는 사람이 하도 많아 누가 죽었는지, 그 날짜가 언제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3, 4년이나! 이 더러운 자식아, 네놈의 그 냄새나는 물건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네놈이 마지막에 고분고분했으니, 그냥 붙여 놔줄 터인즉 어서 치우지 못하겠느냐? 네놈은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리도 체면이라는 것이 없느냐?”

너무나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어서였을까, 그녀 또한 벗어놨던 고쟁이를 그제서야 입는 처지이면서 약종상에게 심한 핀잔을 주었다.

그녀는 잠시도 이자에게서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욕심 많은 돼지처럼 음흉한 쌍판을 한 이놈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고 망연자실하는 자기를 갑자기 어떻게 공격할지 알 수 없었다.

“아고고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것을…… 이 귀한 것을 작살냈을꼬…….”

“걱정 말거라. 작살은 내지 않았다. 껍질만 벗겨졌지 삭둑 잘린 것은 아니다.”

“다시 써먹을 수 있겠지? 네년은 참으로 지독한 계집이고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것을 이렇게 요절을 냈느냐 말이다! 차라리 허벅지를 찌르던지 눈알 하나를 파내는 것이 낫지, 내가 여생에 무슨 낙으로 살라고 이것을 자르느냐 말이다!”

“자르지 않았다는데두. 바지를 내리고, 잘렸는지 그냥 껍질만 벗겨졌는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보거라. 어서.”

이 사람이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말인가. 그녀가 아무리 험한 종년 출신이라고 더러운 인생의 역정을 걸었기로서니, 어쩌면 이렇게까지 부끄러움이 없고 대담하며, 남자를 그야말로 깔아뭉갤 수 있단 말인가.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태양인의 체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자 서너 명을 뺨치고도 남을 배포를 가지고 있었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카페지기(여정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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