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나도 저 소년처럼 소를 타고 귀가하고 싶다

鶴山 徐 仁 2008. 7. 6. 16:54



원효암으로 오르는 길과 폭포.
ⓒ 안병기
원효암 가는 길은 가파르다. 입구에서 선 이정표에 따르면 원효암까지는 600m나 되는 거리다. 몇 시간 동안이나 산을 탄 끝에 겨우 평지에 내려선 사람에게 다시 산을 올라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파른 고개를 견디다 못한 다리가 투정을 부리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그만 돌아가면 안 되겠느냐?"라고.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한참 먼 길을 돌아와야 했으니, 말 못하는 다린들 어찌 팍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쁜 숨 몰아쉬며 포장길의 끝에 이르니, 문득 눈앞에 20여m 높이쯤 돼 보이는 장쾌한 폭포가 나타나서 나그네를 맞는다. 폭포가 "내가 위풍당당해 보이지 않느냐?"라고 잔뜩 뻐기면서 말을 건넨다. 위풍당당하지만 그걸 어디에다 쓸 것인가. 가물어서 저렇듯 바짝 말라 있으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을. 세상에 무용지물이란 말처럼 냉혹한 말이 또 있을까. '백척간두 진일보'란 말을 떠올리게 하는 산길



원효암으로 가는 벼랑길.
ⓒ 안병기
폭포 오른쪽 산자락에 걸쳐진 철제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계단을 다 올라서자 이번엔 행인이 벼랑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설치한 난간대가 기다리고 있다. 송나라 장사 선사의 유명한 게송이 떠오른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천길 낭떠러지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성큼 한 발을 내디뎌라,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결코 자만한 채 거기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뜻이다. 비록 백 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 앉았다 할지라도 아직은 참다운 경지에 든 것이 아니라는 것. 거기서도 더 나아갈 수 있는지 앞으로 나아가보라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이란 얼마나 치열한 것인가. 길은 말이 없다. 속뜻을 알아채야 하는 건 언제나 사람의 몫이다. 긴장을 풀면 길이 오래고 긴 침묵 속에 감춰버린 심오한 설법을 알아듣지 못한다. 어디에서건 난간이란 해이해진 장신에 대한 경종이 아닌가. 한가로이 낮잠이라도 즐기는 듯한 평화로운 풍경



원효암 전경.
ⓒ 안병기


대웅전.
ⓒ 안병기
원효암은 진락산 중턱에 앉아 있었다. 그 흔한 가부좌조차 생략한 채 무장무애한 스님이 낮잠이라도 즐기듯이. 원효암이라는 스님의 단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말사인 보석사의 부속 암자이다. 절 마당에 세워진 안내판은 원효암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절은 진악산 최고봉인 관앙불봉 남쪽에 있는 절로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조구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독립된 사찰로 원효사로 불렸으나 보석사의 부속암자로 원효암이라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이 암자가 조구대사가 창건했다는 건 추측일 뿐이다. 다만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 범우고(梵宇攷) > 에 이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로 보면 조선시대 중반 쯤에는 확실히 존재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 범우고 > 는 8도와 그 밑의 군현 별로 나누어 전국의 절에 대한 존폐 여부·위치·연혁 ·고사·관계기록 등을 수록한 책이다. 자금은 사라진 사찰과 유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문헌이다. 원효암의 전각은 조촐하다. 대웅전과 산신각, 조립식 요사채 등이 있을 뿐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불전 안에는 촛불이 홀로 제 몸을 태워 소신공양을 하고 있다. 마애산신도가 새겨진 삼성각 뒤편 바위



삼성각.
ⓒ 안병기


삼성각 뒤에 있는 마애산신도.
ⓒ 안병기
나무 계단을 밟고 삼성각으로 올라간다. 삼성각은 불교 사찰에서 산신·칠성·독성을 함께 모시는 전각이다. 삼성 신앙은 불교가 한국 사회에 토착화하면서 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와 합쳐져 생긴 것이다. 삼성각은 대웅전보다 한층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전각 안에는 좌측에 나반존자상이, 우측에 산신상이 모셔져 있다. 그 뒤로는 칠성탱화와 호랑이를 탄 산신탱화가 걸려 있다. 삼성각 주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바위에 새긴 마애산신도를 발견한다. 바위에 선각이나 양각으로 새겨진 마애산신도는 서울 정릉 심곡사·북한산 영불사·속리산 삼신사·주왕산 대전사 등지에 남아 있다. 이곳의 마애산신도는 새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호랑이가 새겨져 있지 않은 산신도가 문경 대승사의 산신도를 많이 닮았다. 삼성각에서 내려오는 나무 계단 중간에는 마루처럼 만들어진 몇 평의 공간이 있다. 협소한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인가 보다. 한쪽 구석엔 장독들이 놓여 있다. 아주 볕이 좋은 곳이라서 장이 익어가기엔 안성맞춤의 장소가 아닐까 싶다. 기우귀가(騎牛歸家)를 꿈꾸다



십우도 중 '기우귀가' 장면.
ⓒ 안병기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풍경.
ⓒ 안병기
대웅전 뒷벽에 그려진 십우도에 잠시 눈길이 머문다. '십우도'란 수행자가 견성해 나가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에 비유하여 열 가지 그림과 설명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여섯 번째 단계인 '기우귀가(騎牛歸家)' 장면이 내 눈길을 오래도록 붙잡는다.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풍경.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란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본성의 소리이다.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무애의 단계에 다다른 수행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기우귀가 그림이다. 아, 나도 소를 타고 귀가하고 싶다. 아니, 기우귀가는 놔두고 소의 뒷모습이나 소의 꼬리라도 발견하는 견우(見牛)라도 한 번 해봤으면…. 대웅전 앞마당에 서서 저 멀리 동서로 펼쳐진 산자락을 바라본다. 진락산 안쪽에 깊숙히 자리잡은 원효암은 사방이 꽉 막힌 곳이다. 오로지 대웅전 앞 마당, 남쪽을 향해서만 트여 있을 뿐이다. 문득 암자란 '폐쇄와 개방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기반 위에 자리 잡은 미묘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수행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폐쇄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아주 작은 숨통 정도는 트여놔야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산은 물을 업고 가고 물은 산을 놓고 가네"



원효암으로 오르는 스님의 모습.
ⓒ 안병기
터덕터덕 산을 내려간다. 폭포를 지나서 아래로 내려올 즈음, 자루를 든 비구니 스님 두 분을 만난다. 무슨 나물이라도 캐는 것인가? 한 스님이 말을 건다. "원효암에서 진락산 정상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라고. 아마도 내가 진락산 정상에서 곧장 원효암으로 하산하는 중인 줄 아는 모양이다. 좀 전에 보았던 이정표가 생각나서 아마 600m 될 거라고 했더니 '그리 멀지 않구나'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 자루는 뭐냐?"고 물었더니 "나물이나 캐볼까 했더니 아무것도 없네요"라고 대답한다. "어느 절에 계시느냐?"라고 물었더니, "금산 읍내에 있다"라고만 말할 뿐 더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원효암에 뭐하러 가시느냐?"라고 물었더니 "놀러 가는 중"이라 한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신 후 입적하신 속리산 법주사 월산 스님의 제자라는 이 스님은 성격이 아주 활달하다. "스님, 이 원효암은 원효가 직접 세웠을까요?" "원효암이니 원효가 세웠겠지요." 설마 원효 스님이 건축업자는 아니었을 터. 아마도 이 땅 곳곳에 산재한 원효사 혹은 원효암은 원효가 한 시대의 트렌드였다는 것,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길가에 멈춰서서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한 스님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산 아래께 부도밭에 들러 입구에 세워진 '운허당대천대종사 기석부도지지도량'이란 비 뒤에 새겨진 글귀를 읽는다. "산은 물을 업고 가고 물은 산을 놓고 가네" 아아, 존재의 독자성·개별성이 사람을 더욱 허허롭게 하는 쓸쓸한 봄날이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