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주필
대통령 당선자의 행복한 시절은 당선 확정 순간부터 취임식장 단상 계단을 밟을 때까지다. 이 시절이 당선자와 국민의 연애 기간이다. 당선자는 자신을 뽑아준 국민을 진심으로 받들고 아끼고 싶어한다. 국민도 약간 모자라진다. 당선자의 더듬거리는 말투와 멋쩍어하는 몸짓 하나하나가 그렇게 든든하고 대견스러울 수 없다. '전봇대 이야기'도 '영어 수업 이야기'도 명언(名言) 명구(名句)처럼 들린다. 당선자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여지없이 인간성 자체를 의심받는다. 당선자의 정부조직 개편안을 놓고 공연한 심통을 부리다가 미운털이 되게 박힌 노무현 대통령이 그 케이스다. 국민 반응은 '제철을 넘긴 봉황은 닭만도 못하다(去時鳳凰不如鷄)'는 중국 속담 그대로다.
미국 정치에선 취임부터 취임 100일까지를 '허니문 피리어드(밀월〈蜜月〉기간)'라고 한다. 대통령과 의회와 국민 사이에 깨가 쏟아진다는 말이다. 그래도 여기서부턴 벌써 '내 뜻' '네 뜻'이 갈라지고 '권리와 의무' '약속과 실천'이라는 법적·정치적 저울로 상대의 성실성을 달기 시작한다. '아끼고 받들겠다더니 설거지용 앞치마는 늘상 내가 둘러야 하느냐'는 서운한 생각과 '철이 없긴 없구나, 회사 일이 어디 내 뜻대로 되나' 하는 답답한 느낌이 마음 바닥에 몇 방울씩 고이는 게 느껴진다. 결국 당선자의 행복한 시절은 당선부터 취임까지 두 달 남짓이다.
이렇게 치면 이명박 당선자의 행복한 시절도 3분의 2가 지나갔다. 당선자는 그간 숱한 모임에서 수백 가지 말과 약속과 계획을 쏟아냈다. 내각 구성과 청와대 진용 편성을 서두르면서 이런 스케줄을 소화해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초(分秒)를 쪼개 살아왔다 할 만하다. 당선자를 보좌하는 인수위도 토요일·일요일을 반납하면서 일해 왔다. 이 기간 동안 당선자가 내놓은 경제 활성화, 외교·국방 강화문제부터 영어교육 개선과 휴대폰 통화요금 인하에 이르는 말과 약속과 계획 가운데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말만 지킨다면, 그 약속만 까먹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국민을 향해 눈을 흘기고 후임자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퇴장하는 흉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정권이 되리라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무엇일까.
듣는 자리, 처한 입장에 따라 판단이 다르겠지만, 이명박 당선자가 지난달 18일 한국불교지도자 신년 하례 법회에 참석해 남긴 말과 약속은 곱씹어 볼 만하다. 이 자리에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당선자 입에서 연기(緣起)·동체대비(同體大悲)·자리이타(自利利他)·육화(六和)사상 등 어렵고 낯선 불교 용어들까지 흘러나왔다. 자신이 신봉하지 않는 타(他)종교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표시였던 듯하다.
그러나 이날 당선자의 말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저는 매우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길 것이다. 그것이 불교의 '하심(下心)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부분이다. '하심'이란 불교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마음'을 가리킨다. '모든 집착과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뜻의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과 함께 절집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름난 스님의 필체(筆體)로 된 '하심(下心)' 편액(扁額)을 안방이나 현관이나 사무실에 걸어 두고 마주하면서 늘 마음을 다잡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인다'는 간단한 뜻의 '하심'이란 말을 이렇게 자주 입에 올리고 붓끝에 묻힌다는 것은 실제 생활에서 '하심'을 실천하는 행동이 결코 간단치 않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국민을, 국회를, 야당을, 기업가를, 근로자를, 아랫사람을 높이고 자신을 낮춘다는 것, 그것도 임기 내내 그 마음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때로 다투고 목청을 높이고 어쩌다간 서로 멱살을 잡는 일까지 빚어진다 하더라도 상대의 이야기에 먼저 귀를 열어 놓는 마음의 자세만 끝끝내 붙들고 있다면, 5년 후 흉하고 후줄근한 뒷모습은 보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건 먼 뒷일이고 당장 논란에 휘말려 들고 있는 대운하·영어교육 등 정책 문제나 "콩나물이 키가 컸다고 '콩나무' 행세를 하려 든다(豆芽兒長天高·還是個小菜)" 해서 입방아에 오르는 주변 측근들의 언동도 근본은 '하심(下心)의 마음가짐을 붙들고 있느냐, 벌써 놓아 버렸느냐'의 문제다.
'입으로 해 온' 대통령의 마지막을 볼 만큼 봐 왔으니 '귀로 하는' 대통령의 시대를 열라는 말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31/20080131013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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