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세력 발 못붙이게 진보세력 전진 배치하자"
'개코인사'로 문예진흥원 등 문화단체 차례로 장악
[노정권 역주행 5년] <4> 코드인사에 취한 문화권력
이해찬 총리의 청탁 거절했다 해임된 유진용 前차관
"그릇 팔던 사람을 기관장 시켜달라고 부탁해와"
연극인 100명, 편가르기 인사 항의해 성명 발표하자
출입기자도 안 만나던 문화부 장관 "점심이나 먹자"
- ▲ 2003년 9월 19일, 연극인 100명이 서울 정동 세실극장에서 진보 진영에 편중된 정부의 문화예술단체장 인사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를 낭독한 사람은 배우 권성덕씨.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형(이필동)도 연극인이고 저도 연극에 관심이 많습니다. 고생하시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 드시지요."(이창동)
"편 가르기 식 인사가 도를 넘었습니다. 현장에서 실적이 미미했던 진보 진영 연극인들이 주요 단체장과 새로 생길 문화예술위원회까지 장악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정진수)
"앞으로는 오해의 여지 없이 투명하고 불편부당한 인사를 하겠습니다. 문화예술위원회 설립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겠습니다."(이창동)
이 장관의 이 말을 듣고서 연극인들은 대화가 시작된 지 30분 만에 수저를 들었다. 100인 성명을 주도한 정진수 교수는 그 무렵 노 정권측의 문화계 인사들로부터 "밥 먹자"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편 가르기 식 인사는 더 심해졌다.
2004년 3월 25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업무 보고를 했다. 그해 10월에 열릴 예정인 세계박물관대회 준비 상황과 2005년 10월로 예정된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등에 대해 보고하는 자리였다. 당시 업무 보고 자리에 참석했던 국립박물관 관계자들은 참석자 구성 때문에 깜짝 놀랐다. 민간인 4명을 불러 보고를 함께 듣도록 했는데, 그 중 2명이 문화연대 간부(강찬석 황평우)였기 때문이다. 문화재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한국고고학회와 한국미술사학회 회장도 배제됐다.
국립박물관 관계자들은 "정부정책을 마련하는 데 민간이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고고·미술사학계의 관계자는 아무도 부르지 않고 문화연대 사람을 2명이나 부른 것은 '코드' 이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때문에 문화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연대(문화연대)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6년 5월 어느 날 유진용 문화관광부 차관은 사무실에서 이백만 청와대 홍보수석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알고 보니 대학 동기데요. 한번 봐야죠." 유 차관은 서울대 무역학과, 이 수석은 서울대 경제학과 1975년 입학 동기였다.
일주일쯤 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어느 한식집. 이 수석은 양정철 홍보기획비서관, 선미라 해외언론비서관 등과 함께 나왔다. 소주와 맥주를 합친 폭탄주가 몇 잔 돌았을 무렵 이 수석이 말했다."야, 우리 대학 동기끼리 뭐 존댓말 하고 그러냐. 반말 하자." 오가는 폭탄주 속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며칠 뒤. 이 수석이 유 차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인사 청탁을 했다."이해찬 총리를 오랫동안 보좌했던 분인데 이 총리의 부탁을 받았기에 하는 거다."
이 수석은 이 사람의 경력을 이야기한 뒤 아리랑 TV 부사장으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등을 지낸 사람이었다. 유 차관이 말했다. "그건 안 돼. 아리랑TV는 영어 방송이어서 기관장급은 영어를 잘해야 돼. 방송 경력도, 영어 능력도 검증할 수 없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는 것은 적합하지 않아. 정 취직을 시켜주려면 내가 다른 자리를 알아볼게. 그 자리는 안 돼."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해줘야 돼."
"권력을 쥐었으면 무라도 잘라야 하는데 되지도 못할 데 힘 쓰면 권위도 안 생겨. 네가 보좌하는 대통령께서도 인사를 적절하게 하겠다고 공언하셨는데 그러면 되냐? 못 들은 걸로 할게."
"나는 분명히 부탁했다."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1주일쯤 뒤 유 차관은 청와대 민정비서실의 행정관으로부터 "조사할 게 있으니 집무실로 찾아 가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바로 그날 집무실을 찾은 청와대 행정관은 자료를 내밀었다. 유 차관이 이 수석 등 청와대로부터 인사 청탁을 받은 것 중 거절했던 10여 건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유 차관은 "청와대의 인사 청탁 중 들어줄 만한 것은 들어주고, 들어줄 수 없는 것은 듣지 않았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청탁은 "경력이라고는 20여 년 전 어느 극단에서 일했다가 그릇 파는 회사에서 외판원 생활을 했던 사람을 문화부 산하 기관장 시켜 달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청와대 행정관이 조사를 마치고 나설 무렵 유 차관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청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렇게 조사합니까? 이 수석에게 가셔서 반드시 말씀하십시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든지, 아니면 내가 이런 분위기에서는 일할 수 없으니까 나를 자르든지 말입니다."
1주일쯤 뒤 양정철 비서관의 얘기라는 게 청와대 직원→문화관광부 직원을 통해 유 차관에게 전달됐다."배 째 달라는 거죠? 째 드릴 게요." 양 비서관은 당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문화관광부에서 '함께 일하고 싶은 상사 1순위'로 항상 꼽혔던 유 차관은 그해 8월 8일 취임 6개월여 만에 차관에서 해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2003년 임명돼 2006년 연임된 김윤수 관장은 민예총 이사장 출신으로 취임 때부터 노 정권의 대표적인 '코드인사'로 불렸다. 김 관장은 취임 몇 달 후인 2003년 말 당시 학예연구실장이던 정준모씨를 불렀다. 정준모씨는 김 관장이 '당신은 10년을 누린 기득권 세력'이라면서 '지방 미술관장으로 보내줄 테니 자진해서 나가 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했다. 이창동 장관과도 얘기가 되어 있다는 얘기도 했다고 했다. 정씨는 거부했다.
얼마 뒤 당시 오지철 문화부 차관이 정씨를 불렀다. "관장이 마음에 맞는 사람과 일을 하고 싶어한다. 옮기시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다. 정씨는 "나도 명예가 있는데 그렇게 나가기 싫다"며 버텼다. 이후 정씨를 비롯한'기존 세력'과 김 관장의 갈등은 계속됐다. 김 관장은 정씨를 2005년 덕수궁미술관장으로 전보 발령 냈다가 2006년 1월 다시 조사연구팀장 직무대행으로 강등 발령 냈다.
이 과정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김 관장은 2006년 1월 26일 신년 기자간담회를 하면서 조사연구팀장 직무대행인 정씨와 최은주 덕수궁미술관장을 부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직으로서는 최고위직인 학예연구실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 관장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만 부르고 정작 미술관 전시를 책임지는 학예직 간부들을 부르지 않은 것이다. 이 자리에 두 사람이 찾아와 불만을 표출하자 김 관장과 가까웠던 한 사무관은 "간담회에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왜 오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라고 했다. 정씨는 한 달 후 해임됐고, 현재 행정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미술계 인사들은 "지난 5년은 국내외 미술계가 가장 발전하던 때였는데 현대미술관만 뒷걸음쳤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과천에서 서울 도심으로 이전하려는 계획, 협소한 주차장을 확장하려는 계획 등 현안은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이 바뀌면서 문화계 권력까지 대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파당 싸움이 판을 친 5년이었다고 문화계 인사들은 말하고 있다.
"편 가르기 식 인사가 도를 넘었습니다. 현장에서 실적이 미미했던 진보 진영 연극인들이 주요 단체장과 새로 생길 문화예술위원회까지 장악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정진수)
"앞으로는 오해의 여지 없이 투명하고 불편부당한 인사를 하겠습니다. 문화예술위원회 설립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겠습니다."(이창동)
이 장관의 이 말을 듣고서 연극인들은 대화가 시작된 지 30분 만에 수저를 들었다. 100인 성명을 주도한 정진수 교수는 그 무렵 노 정권측의 문화계 인사들로부터 "밥 먹자"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편 가르기 식 인사는 더 심해졌다.
2004년 3월 25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업무 보고를 했다. 그해 10월에 열릴 예정인 세계박물관대회 준비 상황과 2005년 10월로 예정된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등에 대해 보고하는 자리였다. 당시 업무 보고 자리에 참석했던 국립박물관 관계자들은 참석자 구성 때문에 깜짝 놀랐다. 민간인 4명을 불러 보고를 함께 듣도록 했는데, 그 중 2명이 문화연대 간부(강찬석 황평우)였기 때문이다. 문화재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한국고고학회와 한국미술사학회 회장도 배제됐다.
국립박물관 관계자들은 "정부정책을 마련하는 데 민간이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고고·미술사학계의 관계자는 아무도 부르지 않고 문화연대 사람을 2명이나 부른 것은 '코드' 이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때문에 문화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연대(문화연대)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6년 5월 어느 날 유진용 문화관광부 차관은 사무실에서 이백만 청와대 홍보수석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알고 보니 대학 동기데요. 한번 봐야죠." 유 차관은 서울대 무역학과, 이 수석은 서울대 경제학과 1975년 입학 동기였다.
일주일쯤 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어느 한식집. 이 수석은 양정철 홍보기획비서관, 선미라 해외언론비서관 등과 함께 나왔다. 소주와 맥주를 합친 폭탄주가 몇 잔 돌았을 무렵 이 수석이 말했다."야, 우리 대학 동기끼리 뭐 존댓말 하고 그러냐. 반말 하자." 오가는 폭탄주 속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며칠 뒤. 이 수석이 유 차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인사 청탁을 했다."이해찬 총리를 오랫동안 보좌했던 분인데 이 총리의 부탁을 받았기에 하는 거다."
이 수석은 이 사람의 경력을 이야기한 뒤 아리랑 TV 부사장으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등을 지낸 사람이었다. 유 차관이 말했다. "그건 안 돼. 아리랑TV는 영어 방송이어서 기관장급은 영어를 잘해야 돼. 방송 경력도, 영어 능력도 검증할 수 없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는 것은 적합하지 않아. 정 취직을 시켜주려면 내가 다른 자리를 알아볼게. 그 자리는 안 돼."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해줘야 돼."
"권력을 쥐었으면 무라도 잘라야 하는데 되지도 못할 데 힘 쓰면 권위도 안 생겨. 네가 보좌하는 대통령께서도 인사를 적절하게 하겠다고 공언하셨는데 그러면 되냐? 못 들은 걸로 할게."
"나는 분명히 부탁했다."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1주일쯤 뒤 유 차관은 청와대 민정비서실의 행정관으로부터 "조사할 게 있으니 집무실로 찾아 가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바로 그날 집무실을 찾은 청와대 행정관은 자료를 내밀었다. 유 차관이 이 수석 등 청와대로부터 인사 청탁을 받은 것 중 거절했던 10여 건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유 차관은 "청와대의 인사 청탁 중 들어줄 만한 것은 들어주고, 들어줄 수 없는 것은 듣지 않았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청탁은 "경력이라고는 20여 년 전 어느 극단에서 일했다가 그릇 파는 회사에서 외판원 생활을 했던 사람을 문화부 산하 기관장 시켜 달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청와대 행정관이 조사를 마치고 나설 무렵 유 차관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청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렇게 조사합니까? 이 수석에게 가셔서 반드시 말씀하십시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든지, 아니면 내가 이런 분위기에서는 일할 수 없으니까 나를 자르든지 말입니다."
1주일쯤 뒤 양정철 비서관의 얘기라는 게 청와대 직원→문화관광부 직원을 통해 유 차관에게 전달됐다."배 째 달라는 거죠? 째 드릴 게요." 양 비서관은 당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문화관광부에서 '함께 일하고 싶은 상사 1순위'로 항상 꼽혔던 유 차관은 그해 8월 8일 취임 6개월여 만에 차관에서 해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2003년 임명돼 2006년 연임된 김윤수 관장은 민예총 이사장 출신으로 취임 때부터 노 정권의 대표적인 '코드인사'로 불렸다. 김 관장은 취임 몇 달 후인 2003년 말 당시 학예연구실장이던 정준모씨를 불렀다. 정준모씨는 김 관장이 '당신은 10년을 누린 기득권 세력'이라면서 '지방 미술관장으로 보내줄 테니 자진해서 나가 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했다. 이창동 장관과도 얘기가 되어 있다는 얘기도 했다고 했다. 정씨는 거부했다.
얼마 뒤 당시 오지철 문화부 차관이 정씨를 불렀다. "관장이 마음에 맞는 사람과 일을 하고 싶어한다. 옮기시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다. 정씨는 "나도 명예가 있는데 그렇게 나가기 싫다"며 버텼다. 이후 정씨를 비롯한'기존 세력'과 김 관장의 갈등은 계속됐다. 김 관장은 정씨를 2005년 덕수궁미술관장으로 전보 발령 냈다가 2006년 1월 다시 조사연구팀장 직무대행으로 강등 발령 냈다.
이 과정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김 관장은 2006년 1월 26일 신년 기자간담회를 하면서 조사연구팀장 직무대행인 정씨와 최은주 덕수궁미술관장을 부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직으로서는 최고위직인 학예연구실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 관장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만 부르고 정작 미술관 전시를 책임지는 학예직 간부들을 부르지 않은 것이다. 이 자리에 두 사람이 찾아와 불만을 표출하자 김 관장과 가까웠던 한 사무관은 "간담회에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왜 오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라고 했다. 정씨는 한 달 후 해임됐고, 현재 행정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미술계 인사들은 "지난 5년은 국내외 미술계가 가장 발전하던 때였는데 현대미술관만 뒷걸음쳤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과천에서 서울 도심으로 이전하려는 계획, 협소한 주차장을 확장하려는 계획 등 현안은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이 바뀌면서 문화계 권력까지 대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파당 싸움이 판을 친 5년이었다고 문화계 인사들은 말하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25/20080125000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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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쥐고 흔든 '문화연대'… 노정권 버팀목 역할
[노정권 역주행 5년] <4> 코드인사에 취한 문화권력
탄핵 반대 같은 정치운동에도 가세… 후반기엔 일정 거리 두기도
문화연대는 노무현 정권 후반 들어 FTA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노무현 정권의 주요 버팀목 역할을 했다. 문화연대 출신들은 지난 5년 동안 문화계의 주요 기관장을 배출하며 문화권력의 핵심 집단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지난 1월 초 이명박 당선인의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공약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편 이 정권 들어 서울대 미학과 출신들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을 비롯해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이영욱 전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김용배 전 예술의전당 사장 등이 서울대에서 미학(대학원 과정 포함)을 공부했다. 선거 결과 임용된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역시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다. 이들 중 김윤수 관장, 이영욱 전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은 문화연대의 주요 간부를 지냈거나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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