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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帝國의 宰相 [ 4 ]

鶴山 徐 仁 2008. 2. 1. 19:58

august 의 軍史世界

 

帝國의 宰相 [ 4 ]

 

 

 

그릇의 차이

 

징기스칸의 핵심 참모가 된 야율초재는 그동안 편안하게 살던 연경 燕京 의 거처를 떠나 몽골군의 정복로를 따라 이동하였습니다.  꾀죄죄하고 냄새나는 게르에서 거쳐하면서도 학문을 닦는데 소홀하거나 자세를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으며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징기스칸이나 몽골의 지도부가 정책적인 고민을 할 때 가장 빨리 적절한 답안을 제시하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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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몽골 초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게르, 징기스칸 당시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

 

때문에 징기스칸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징기스칸은 자신이나 초기부터 함께 활약하여온 많은 수하들이 생각하지 못한 현명한 정책을 필요할 때마다 즉시즉시 내어놓는 야율초재를 너무 좋아하였고 그에게 몽고말로 ' 긴 수염을 가진 현명한 사람 ' 이라는 뜻인 우루츠사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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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루츠사리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은 야율초재 ]

 

그런데 몽골의 성골도 아니고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 낼만큼 승승장구하자 당연히 그를 시기하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三國志演義를 읽다보면 유비가 삼고초려하면서 등용한 제갈공명에 대해 초기에 가장 많은 불평을 늘어놓은 것은 바로 장비였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은 형님과 동고동락하면서 같이 행동하였는데 실력도 검증되지 않은 젊은이가 갑자기 유비의 최측근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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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량의 능력을 몰랐을 때 제일 미워하였던 것이 장비였습니다 ]

 

어느 날 야율초재가 빠오에서 좌선하여 책을 읽고 있는데 밖에서 큰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물론 야율초재를 시기한 자가 일부로 들리라고 한 것입니다.  " 나는 최고의 궁수야 !  내가 지휘하는 부대는 적을 쳐부수는데 항상 앞장서서 용맹스럽게 싸우지 !  책상머리에 처박혀 책만 읽는 자는 전쟁터에서 어디 쓸모나 있겠어  하 하 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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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장의 경험만 믿는 많은 무장들이 文臣인 야율초재를 비난합니다 ]

 

그러자 야율초재는 게르밖으로 나가 빙긋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 맞습니다.  장군 !  적을 무찌르기 위해 뛰어난 궁수와 이를 훌륭하게 지휘하는 장군과 같은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경영을 위해서는 그에 맞는 인물 또한 필요한 것입니다. "  장수는 이 한마디에 사색이 되어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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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율초재는 국가를 경영할 만한 그릇 이었습니다 ( 초원의 수도였던 카라코룸 ) ]

 

이후 시간이 갈수록 상황에 절묘하게 맞는 승전의 해법과 정확한 정책을 제시하는 그에게 감화되어 수많은 몽골의 권력자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몽골권력의 핵심 중의 핵심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징기스칸에게 계속적인 직언을 하였던 야율초재도 막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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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인들은 야율초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

 

그것은 몽골하면 떠오르는 잔인한 학살이었습니다.  몽골은 상대가 스스로 굴복하여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하면 최상의 대우를 해주며 大몽골의 일원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점은 몽골이 소수의 부족에서 팽창하여 세계제국으로 급속히 발전하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저항하면 엄청난 살육이 따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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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의 정복과정에서 많은 학살이 있었습니다 ]

 

특히, 항복을 권유하는 몽골의 사신이 살해당하거나 전투 중 몽골의 핵심인물이 사상 당하였을 경우 정복이 완료되면 저항하던 상대군 뿐만 아니라 비전투원인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무수히 죽이고 또 죽였고, 정복지는 초토화 시켜버렸는데 이러한 학살행위를 도성 屠城 이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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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카르타고 점령은 하나의 문명을 사라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이러한 방식은 현대의 관점으로 부인할 수 없는 끔직한 전쟁범죄 행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몽고습래 蒙古襲來황화론 黃禍論 으로 불리는 것처럼 동양인을 무조건 야만시하고 멸시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서양사에서 로마의 카르타고 정복이나 현대사에 있었던 나찌의 유태인학살만 보아도 그 잔혹함은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몽골만 야만으로 몰아붙일 만큼 덜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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