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精神修養 마당

지나간 사랑의 주머니를 비워 놓아야

鶴山 徐 仁 2007. 12. 1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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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간 사랑의 주머니를 비워 놓아야    

     


  • 사랑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몸을 섞을 때


    남자와 여자가 몸을 섞을 때 비로소


    한 칸의 집을 마련했다 믿는다


    그러나 영원한 우리의 곳이 어디 있으랴


    우리의 사랑은 결국


    마지막 티끌마저 쓸어가고


    다시 문밖에 서게 한다


    사랑이 사랑으로 끝나지 못하고


    사랑이 상처로 끝나는 것은


    끝없는 우리들의 갈망과 절망


    흐르는 물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국


    몸을 섞을 때 꽃이 피고


    꽃이 질 때


    사랑은 다시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선다


                                                                           〈박철/사랑〉

     


    주머니 탈탈 털어버려야 할 것이 많았던, 마음의 수첩에서 지워버려야 할 이름도 많았던 어느 해 세(歲)밑에 여자인 후배 시인이 한 남자를 잊지 못해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이었던 그 남자는 그녀에게 하나의 세계였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하나의 세계를 가지는 것이라는 걸, 여자가 남자를 잊는 일이 하나의 세계를 온전히 비워내는 일이라는 걸 후배의 마르지 않는 맑은 눈물을 통해서 그때 보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건 전쟁도 병도 맹수도 가난도 배고픔도 아닌 ‘망각’(忘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망각은 어떤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잊어버린다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라고 초등학교 교과서는 가르쳤습니다.

    사랑을 하고, 어른이 되고, 세상을 살면서 저를 가르쳤던 국정 교과서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잊지 못하며 사는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망각은 오히려 사람에게 큰 위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앞에서 울고 있었던 후배 시인은 한 남자를 3년 사랑했습니다. 사랑이 끝난 지도 3년이 흘렀지만 그녀는 아직 그 세계를 다 비워내지 못해 울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잊는 일은 힘든 일이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사랑과 헤어지는 일, 사랑을 잊는 일, 다 같은 무게의 아픔일 것입니다. 그건 또 남녀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 사랑의 강도(强度)에서 차이가 있을 뿐 헤어지는 일과 잊는 일은 같은 뿌리를 가진 슬픔의 병일 것입니다.

    잊지 않고서는 잊히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잊는다는 그 아픈 슬픔의 통과의례를 치르지 않고서는 지워지지 않는 색깔을 가진 상처입니다.

    후배 시인이 한 남자에게 뿌리내린 사랑의 깊이를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눈물을 이해했습니다. 이해했지만 이제 더 이상 울지 말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라고 권했습니다.

    그때 우는 후배를 위해 박철 시인의 ‘사랑’이란 시를 읽어주었습니다. 박철 시인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직설적이었습니다. 사랑은 남자와 여자가 몸을 섞을 때 비로소 한 칸의 집을 마련했다 믿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집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통속할 때 영원한 사랑의 집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기에 사랑이 피운 꽃이 질 때 다시 다른 세계를 찾아 물처럼 흘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고여 썩지 않는 사랑을 가질 수 있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읽어주는 시를 들으며 이미 부서진 사랑의 집에 연연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집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후배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후배의 울음이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를 잊는 일을 온몸으로 견디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후배의 눈물이 맑게 빛나는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울음 뒤에 오는 또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사람도 아름답습니다. 부서진 사랑으로 하여 지금 또 누군가 소리 없이 울고 있다면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지나간 사랑의 주머니를 비워 놓아야 새로운 사랑이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물처럼 흐르는 사람의 사랑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 끝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정일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