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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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입국(信仰立國) ⑤

鶴山 徐 仁 2007. 9. 23. 10:03
 
   
   
  서정후님께 드립니다.
     
신앙입국(信仰立國) ⑤

- 함흥질소비료공장에서의 김교신 -

양정고보에서 지리과목을 가르치던 김교신 선생은 그 자리를 끝내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성서조선』과 같은 불온한(?)한 잡지를 간행하고 있는 그를 일본경찰이 그냥 두지를 않았다. 일터를 잃고 고생하던 그가 새로 얻은 일터가 함흥질소비료공장의 기숙사 사감직이었다. 1944년 일본이 일으킨 미일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던 때였다. 비료공장의 노동자들을 섬길 수 있는 자리였기에 그에겐 안성마춤의 자리였다.

그런데 비료공장의 노동자들의 생활이 몹시 무질서한 점에 대해서 그는 놀라고 가슴 아파하였다. 기숙사에는 도박과 싸움질, 술과 방종으로 한심한 처지였다. 그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바꾸기로 결심을 하고는 밤이면 밤마다 도박판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기를 쉬임없이 하였다. 도박판 가운데 들어가 화투장을 움켜쥐고는 노동자들에게 호소하였다.

“여러분 조국은 일제에 먹히고 백성들의 탄식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터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하루 속히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 건실한 생활로 돌아섭시다.”

이런 그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처음엔 비웃으며 삿대질을 일삼았다. 그러나 끈기있게 설득하는 그의 정성에 차츰 감명을 받은 노동자들이 한 명씩 두 명씩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도박판이 차츰 자리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비료공장 전체에 질서가 잡히고 생산성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일본 경찰은 거기까지 쫓아 감시하며 그를 일터에서 몰아내려 하였으나 회사측에서 그를 감쌌다. 새로 온 사감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생활이 건실하게 바뀌어 가고 생산성이 오르게 되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그에 멈추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겨레사랑의 정신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까지 정성을 쏟았다. 노동운동이 건전한 생활운동에다 민족운동에까지 넓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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