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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통일 후유증’에 피 흘리는 예멘

鶴山 徐 仁 2007. 9. 8. 15:32
 
옛 남예멘 출신 예비역 차별대우 반발 대규모 시위, 군경과 유혈충돌
현역군인 복귀 요구하고 일부는 ‘분리 독립’ 주장… 남북 긴장고조

홍해의 관문인 아덴에서 옛 남예멘 출신 전직 군인들이 지난 8월 2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남북 예멘은 1990년 통일됐고, 시위가 일어난 아덴은 통일 전 남예멘의 수도였다. 옛 남예멘 군인은 이날 시위에서 북예멘 출신이 주도하는 현 정부에 대해 자신들의 현역 군인 복귀 등을 요구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시위대와 보안군 간 유혈충돌은 이날 아침 1500여명의 시위대가 아덴 중심가의 중앙광장을 향해 행진을 시작하면서 벌어졌다. 전투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을 발사하고 물대포를 쏘면서 시위대 해산을 시도했다. 시위대는 타이어를 태우면서 저항했다.  수백 명의 시위대는 아덴의 다른 지역에서도 경찰과 충돌했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경찰은 시위 주도자인 나세르 알 누바 예비역 준장(남예멘군 출신)이 지지자에게 도로 차단을 요구하자 시위대를 공격하고 누바 준장을 검거했다. 시위는 약4시간 후에 진압됐다. 보안군은 현장에서 100여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당국은 아덴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렸고, 병력 수천 명을 배치해 거리 순찰을 강화했다. 통금령에 따라 상점은 강제로 문을 닫아야 했다.


당국은 다른 지역에서 시위대가 아덴으로 유입되는 걸 막기 위해 도시의 주요 진입로를 봉쇄했다. 이렇게 되자 아덴 인근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AP통신은 경찰 당국자의 말을 인용, 지난 8월 6일 아덴의 북쪽 지역인 아우데르·탈레아·라다판 등 남예멘의 3개 주에서 예비역 군인 수천 명의 시위가 벌어지는 등 시위가 확산되었다고 보도했다.


지난 8월 2일 아덴에서 발생한 시위대와 군경의 충돌로 적어도 세 명이 부상했고, 그 중의 한 명은 아덴의 곰호리이아 병원에서 숨졌다고 한 의사는 전했다.(AP통신) 이 의사는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익명을 요구했다. 경찰은 이와 관련해 성명에서 시위대의 사망을 부인했다고 예멘 관영 사바통신이 보도했다.


▲ 군사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는 예멘의 군인들. (photo AP)

이번 사태에 앞서 지난 7월 7일에도 옛 남예멘 출신 예비역 군인 수천 명이 아덴 도심의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당국은 당시에도 군을 배치, 평화로운 집회를 사전 봉쇄하려 했으며, 시위 지도자인 압둘칼림 타벳 예비역 준장과 나세르 알 누바흐 예비역 준장을 연행했다고 예멘타임스가 보도했다. 옛 남예멘의 지지 기반인 예멘사회당(YSP)의 아이다로스 알 나큅(Naquib) 대표는 이번 사태에 대해 “내전을 빼놓고는 1967년 독립 이후 아덴에서 일어난 가장 심각한 폭력 사태”라고 말했다.


남예멘 출신 군인이 들고일어난 건 통일 이후의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다. 남북 예멘은 권력분점을 약속하고 합쳤다. 하지만 통일 직후 양측 지도자 간 갈등이 빚어졌다.  4년 뒤에는 내전을 벌였다. 당시 군이 통일되지 못한 게 내전으로 쉽게 비화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국가는 통일됐지만 군은 통일 전처럼 남북이 독자적인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내전에서 인구가 1800만명인 북예멘이 인구가 200만명에 불과한 남예멘을  이겼고, 패전한 남예멘 군대는 해산됐다. 이때 강제로 전역된 남예멘 출신 군인이 최근 다시 ‘복직’을 요구하며 예멘의 안정을 흔들고 있다.


한 시위대는 “우리는 러시아에서 교육받았고, 우리 중 일부는 군지도자였으며 공군 조종사였다”면서 “1994년 내전 이후 우리는 해고당했다”고 익명을 요구하며 말했다고 예멘타임스는 전했다.


알리 압둘라 살레(Saleh) 대통령 정부는 지난 7월 초 남예멘 출신 군인이 단체행동을 벌이자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한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살레 대통령은 남예멘 출신 장교 493명의 승진과 강제로 전역된 장교 637명의 복직을 명령했다.(예멘타임스) 정부는 다섯 명의 장관과 십수명의 주지사 및 지방관리로 구성된 관련 위원회를 만들고 남예멘 군 출신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이 같은 정부의 움직임은 처음이다.


▲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한 경찰의 거리 봉쇄로 한산한 아덴 시내. 살레 대통령의 사진이 보인다. (photo AP)

하지만 해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살레 대통령 등 북예멘 출신이 압도하는 현 국가 구조에서 남예멘 출신은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예컨대 내전 이후 6만명의 남예멘 군인이 강제전역 조치됐다. 상당수는 해외로 도주했다. 이후 대사면령에 따라 해외 망명자가 귀국했다. 하지만 이 중 극히 일부만이 현역 복귀가 허용됐다. 대부분은 북예멘 출신이 압도적인 군에 복귀하지 못했다. 현재 군 복귀를 희망하는 예비역의 규모는 모두 7106명으로 파악된다. 남예멘 군인 출신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예비역조정위원회에 접수된 내용이다.

남예멘인은 정부직에서도 소외되고 있다고 불만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900달러(약 90만원)로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이 나라에서는 공무원 자리가 주요한 소득원일 수밖에 없다. 내전 이후 북예멘 출신이 남예멘의 땅을 많이 소유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도 주요한 불만 중 하나이다.


지난 5월 22일은 예멘 통일 17주년 기념일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옛 남예멘 각지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로 얼룩졌다. 최대 규모의 시위는 하드라무트 주의 무칼라에서 일어났으나 이웃 도시에서도 시위에 참석했다. 라흐지·아덴·아비안에서 시위대는 검은색 깃발을 흔들며 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대는 공공연히 남예멘의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이번 남예멘 군인 출신 시위 사태에서도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성명이 나왔다. 당국은 분리주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다. 아덴의 아흐메드 알 코흘라니 주지사는 “연행된 시위대 전원을 석방했고, 추가적 검거도 중단했으나 국가 통일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사람 5, 6명에 대해서는 법적 절차를 계속 밟는다”고 말했다.(예멘 옵저버) 하지만 약효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남북 예멘 간 긴장이 다시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



예멘 근·현대 소사
19세기 말
- 영국과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남북으로 분리
1918 - 북예멘,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
1962 - 북예멘, 혁명 통해 예멘아랍공화국 수립
1967 - 남예멘, 영국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1972 - 남북 예멘, 1973년까지 통일하기로 합의
1973 - 국경 무력분쟁 발생 
1988 - 남북 상호자유왕래조치
1990 - 예멘 통일



/ 카이로 = 최준석 조선일보 특파원 jschoi@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