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새해를 알리는 샤갈의 달력을 한장한장 넘긴다.
빛바랜 세월의 시간 사이에, 꿈과 몽환의 시간을 넘기는데,
마르크 샤갈 이상이 없을 것도 같다.
샤갈...러시아태생 초현실주의 불란서화가,
무의식속의 환상, 유머, 회화의 시적표현, 깊고 푸른 몽환,
아마 이 지구상에서
마르크 샤걀 이상의 멋진 몽환의 마술을 그려낸
<푸른 서커스>단은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환상의 색채 마술사, 샤갈, -
아버지는 청어 도매상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식료품가게를 운영하면서
작은 통나무집들을 세놓는 일을 했다.
세갈의 아홉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모이셰 세갈이었으나 유태인 학교를 다니면서 샤갈로 이름을 바꾸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유태인이었고,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어쩌면 그의 혈통이나 현상이 그의 그림 모두에서
그런 동과 서, 몽환과 현실들이 뒤섞여 꽃을 피운
멀티 컬쳐리즘의 현학성을 보여주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Marc Chagall, I and the village |
하양과 나의 벨라 Marc Chagall. Bella with white collar 1917
샤갈의 그림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 벨라였다.
샤갈은 그녀의 이미지를 그리기를 늘 즐거워하였다.
샤갈과 벨라
샤갈보다 아홉 살 어린 벨라는 보석상을 하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샤갈보다 아홉 살 어린 벨라는 보석상을 하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해마다 여름이면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샤갈이 스물 두 살 때 고향 마을의 여자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마침 그 집을 방문한 벨라와의 첫만남이 이루어졌다.
샤갈이 스물 두 살 때 고향 마을의 여자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마침 그 집을 방문한 벨라와의 첫만남이 이루어졌다.
벨라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가장 먼저 그의 마음을 끌었다.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였지만, 그 순간 샤갈의 마음은 여자친구로부터 멀어져 곧바로 벨라에게로 갔다.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다. 그녀의 눈은 내 것이다.
그녀는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소년 시대도, 현재의 나도, 나의 장래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처음 그녀를 만났는데도 그녀가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벨라야말로 내 아내가 될 사람임을 알았다. 그녀의 청백색 얼굴과 눈, 특히 그 눈은 크고 동그랗고 까맸다! 그건 바로 내 눈이다. 내 영혼이다."
반면 소녀 벨라가 본 모습은 엉클어진 곱슬머리가 수술처럼 눈썹과 코 위까지 늘어지고, 피부는 천국에서 지하로 온 사람처럼 파랗고 체구는 가늘고 긴, 다른 사람과는 뭔가 다른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었다.
'침묵의 공주'라 불렸던 벨라는 "나는 항상 꿈을 꾸었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어느 화가에게
마음을 뺏길거라고 . 그 사람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죠"라고 운명적인 만남을 회상했다.
La Mariée, 1950. Gouache pastel.
벨라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배우수업을 받고 있었으나 샤갈과 결혼하면서 자신의 꿈을 버렸다.
그녀 부모로선 결코 환영할 수 없는 결혼이었다.
그러나 내성적인데다 말까지 더듬고 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던 샤갈에게 벨라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반려자였다.
벨라는 샤갈 작품의 완성을 확인하는 판정자였으며 제목을 고르는 일도 했다.내성적인데다 말까지 더듬고 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던 샤갈을 지켜주는 사람은 적절한 판단력과 직관을 가진 벨라였다. 샤갈보다 아홉 살이나 적은 나이였지만 벨라는 마치 어머니같은 포용력을 지닌 존재였다.
샤갈 가족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하지만 벨라는 낯선 타향 땅에서 전염병으로 숨을 거뒀다. 전쟁 중이라 대부분의 약이 최전선용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품세계의 여신이며 인생의 동반자인 벨라를 갑자기 잃은 샤갈은 9개월 동안이나 붓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졌다. 벨라를 잃은 후 한 동안 샤갈의 화면은 깊은 푸른색이 지배한다. 후에 이 푸른색은 정제되고 단련되어서 가히 "샤갈의 푸른 색"이라 할 맑고 환상적인 색채에
이르게 됐다.
그녀 부모로선 결코 환영할 수 없는 결혼이었다.
그러나 내성적인데다 말까지 더듬고 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던 샤갈에게 벨라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반려자였다.
벨라는 샤갈 작품의 완성을 확인하는 판정자였으며 제목을 고르는 일도 했다.내성적인데다 말까지 더듬고 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던 샤갈을 지켜주는 사람은 적절한 판단력과 직관을 가진 벨라였다. 샤갈보다 아홉 살이나 적은 나이였지만 벨라는 마치 어머니같은 포용력을 지닌 존재였다.
샤갈 가족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하지만 벨라는 낯선 타향 땅에서 전염병으로 숨을 거뒀다. 전쟁 중이라 대부분의 약이 최전선용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품세계의 여신이며 인생의 동반자인 벨라를 갑자기 잃은 샤갈은 9개월 동안이나 붓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졌다. 벨라를 잃은 후 한 동안 샤갈의 화면은 깊은 푸른색이 지배한다. 후에 이 푸른색은 정제되고 단련되어서 가히 "샤갈의 푸른 색"이라 할 맑고 환상적인 색채에
이르게 됐다.
벨라가 세상을 떠난 뒤 샤갈은 깊은 슬픔으로 그림도 그리지 못했다.
Marc Chagall. (French, born Belarus. 1887-1985). Maternity. (1912). Gouache on paper, 10 1/2 x 7" (26.6 x 17.8 cm). Bequest of Mrs. Helen Serger in honor of William S. Lieberman. © 2006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Bride with a Fan, 1911, oil on canvas, collection of Pierre Matisse, New York
샤갈의 매니저 역을 하던 딸 이다는
아버지가 혼자 고독하게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여인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 후 '바바'라는 여인에게 매료된 샤갈은 자신의 마지막 30년 인생 동안 그녀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어 한층 더 성숙해진 작품들을 남겼다.
그 후 '바바'라는 여인에게 매료된 샤갈은 자신의 마지막 30년 인생 동안 그녀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어 한층 더 성숙해진 작품들을 남겼다.
Adam and Eve, 1912
Marc Chagall (Mark Zakharovich Shagal)
(1887 - 1985)
(1887 - 1985)
러시아 출신 유대계 프랑스 화가. 비텝스크 출생. 고향마을의 미술학원에서 배운 뒤,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왕실미술장려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는 L. 박스트의 미술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유럽근대미술에 관한 지식을 배웠다. 1910년에 파리로 가서 1914년까지 머물렀다. 그 사이에 A. 모딜리아니·C. 수틴·J. 들로네 등을 알게 되었고, 시인 B. 상드라르·G. 아폴리네르 등과도 친분을 맺었다. 또 1911년의 앵데팡당전에 첫 출품을 하고, 1914년에는 베를린 데어슈투름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지기 위해 독일을 방문,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그대로 러시아에 머물렀다.
1915년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은 샤갈 작품의 중요한 영감(靈感)의 원천이 되었다.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자 비텝스크지역 미술위원에 임명되었으며, 미술학교를 창설하였다. K. 말레비치와 E. 리시츠키를 교수로 초빙하였는데, 말레비치와의 의견대립으로 1919년 위원직에서 물러난 후, 모스크바로 옮겨 국립유대극장의 벽화를 그렸다. 1922년 베를린, 이듬해에는 파리로 돌아가서 화상 A. 볼라르의 의뢰로 N. 고골리의 《죽은 혼》의 삽화에 손을 대는 등 차츰 파리의 유력한 화가로서 주목을 받는 동시에, 환상적인 작풍은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다.
1941년 뉴욕근대미술관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서,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보냈고, 발레 의상과 무대장치를 담당하였다. 1947년 파리로 돌아갔으며 1950년에는 남프랑스 방스에 머물렀다. 1952년 V. 브로드스키와 재혼, 20세기 회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제작활동의 폭이 넓어 유채·구아슈·판화, 파리 오페라극장의 천장그림, 예루살렘 하다사병원의 스테인드글라스, 그 밖에 조각·도기·무대장치에까지 미치고 있다. 개인적이며 자전적인 내용, 러시아에 대한 향수, 유대인 특유의 전통과 상징에 대한 경애 등 그의 작품의 기조(基調)는 초기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파리에서 색채의 발견, 입체파의 영향, 상드라르나 아폴리네르 등 전위시인과의 접촉은 그의 예술에 새로운 자양분이 되었다. 색채와 형태에서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이미지를 시적으로 구성하였다. 입체파의 경향은 곧 색채가 넘쳐흐르는 보다 자유로운 스타일로 전환되었고, 그 뒤 그의 환상적 우의표현(寓意表現)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샤갈미술관에 《성서의 메시지(1969∼1973)》 작품군이 있다.
The Soldier Drinks, 1911-12, oil on canvas,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외국작가 畵壇' 카테고리의 다른 글
Manuel Hurtado 작품세계 (0) | 2007.09.11 |
---|---|
William Bouguereau (1825.11.30.~1905.8.19 프랑스 화가) (0) | 2007.09.11 |
Emil Nolde, 에밀놀데 (0) | 2007.08.19 |
'여름날의 폭풍' 주제로 한 작품 모음 (0) | 2007.08.17 |
Julien Durpre의 전원풍경 (0) | 2007.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