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스크랩] 18. 전쟁 희생자들을 국립묘지에서 해방시켜라

鶴山 徐 仁 2007. 8. 15. 12:45

 

  캐나다 토론토에서 연수특파원으로 지낼 당시 나는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국내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기자로 활동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것을 캐나다에서 절감하게 되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전쟁기념탑

(Memorial Tower)에 흥미를 가져 캐나다를 비롯해 미국을 여행할 때마다 전쟁기념탑과 충혼탑(cenotaph)

만을 집중적으로 취재했다. 이러한 경험은 내 가치관과 국가관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귀국한 뒤

<월간조선>에 <대한민국의 평화와 캐나다의 전쟁>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모든 도시의 시청, 의사당 등 주요 공공건물 앞에는 똑같은 탑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는 캐나다의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본다.

   토론토 중심가 퀸 스트리트 서쪽 시청 건물 앞에 서 있는 탑신에는 '1914~1918, 1939~1945, 1950~1953'

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이 숫자들은 각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의 기간을

뜻한다. 이 탑의 이름은 '우리나라의 영광스런 죽음에게(To Our Glorious Dead)'이고, 그 밑에는 이런 문장

이 새겨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숨진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토론토 시민들에 의해 기증됨."

 

  온타리오주 남단에 위치한 인구 32만의 도시 런던의 중심가에는 빅토리아 공원이 있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철모를 쓰고 전투복을 입고 총을 든 군인의 동상이 서 있다. 풍상에 시달려 청동빛을 띠고 있는 동상의 탑신

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런던 출신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대영제국을 위해 싸운 젊은이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곳에서 숨진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

  

  런던에서 북동쪽으로 30여 분 정도 달리면 셰익스피어 축제로 유명한 스트라트포드가 나온다. 이곳의 저수

지 옆에는 자그마한 기념공원이 있고 역시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은 용맹스런 군인의 모습이 아니라 비통해

하는 두 남자의 형상인데 그중 한 남자는 부러진 칼을 들고 서 있다. 셰익스피어의 고향 이름을 딴 도시답게

탑신의 글귀 또한 문학적이다.

   "그들은 무력을 깨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캐나다 최고의 명문인 토론토 대학 교정에는 밀리터리 타워(Military Tower)가 있다. "토론토 대학 학생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가 숨진 이들의 영광스런 기억을 위해."라고 새겨진 벽면의 글귀 밑에는 전쟁터에서 숨진

이들의 이름이 무려 3면에 걸쳐 전사 당시의 소속부대 및 계급과 함께 알파벳순으로 새겨져 있고 매년 1월 휴

전기념일이면 벽면 앞에 수수하고 작은 꽃다발들이 놓인다.

 

  공원이나 대학 같은 곳에만 이런 기념물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토론토 중심가에 있는 이튼 백화점 6층의 가

전제품 매장에서도 캐나다인들의 애국심과 만날 수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두 점의 동판(銅板) 부조물이 조

명을 받고 있다. 그 중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산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부조물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

혀 있다.

  "315명의 남자들은 이튼사의 많은 동료들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용감하게 위험과 곤경에 맞섰고 마침내

자유, 정의, 그리고 인류애를 위해 생명을 내던졌다. 이들을 영원히 기리면서, 1914~1918."

  또 다른 부조물은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적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러 나가 숭고하게 희생한 163명의 이튼사 직원들을 자랑

스럽게 기억한다. 누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그들의 이름을 여기에 기록했다. 1939~

1945."

 

   토론토의 지역신문인 <토론토 스타>지 사옥에도 전사자 추모 현판을 만나게 된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 나

가 희생된 직원들을 기리는 기념물 앞에서 방문객들은 <토론토 스타>의 전통과 정신을 느끼게 된다. 또한 토론토

에서 두뇌가 우수한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어파 캐나다 칼리지(Upper Canada College)의 본관에 들어서면 양

쪽 벽면에 어린 나이에 전쟁에 나가 숨진 학생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물론 캐나다나 미국에도 국립묘지가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관리하는 국립묘지 외에도 도시, 대학, 회사, 신문사 등은 그들 나름대로 그곳 출신의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중앙정부와 자치단체, 학교, 기업, 언론사 가릴 것 없이 모두 한마음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나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캐나다에 오기 전까지 내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배들의 희생을 진심에서

우러난 마음으로 추도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머리로는 추도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웬지 가슴은 뜨거워지지 않았다.

   그저 습관적으로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가 뜬 기억밖에는 없다. 내 가족 중에 전쟁 희생자가 없어

서였는지 모른다. 보훈가정이 아닌 경우 6월 6일 현충일이나 6월 25일 한국전쟁 기념일 외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이

들을 기릴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런 내가 너무나 뜻밖에도 이국 땅에서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

절절히 느끼며 내 자신의 무지함을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동안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전쟁에 나가 희생된 사람들을 너무나

소홀히 다뤄왔다는 점이다. 수도 서울이 전쟁 중에 잿더미로 변했지만 오늘날의 서울 어디서도 전쟁의 흔적을 찾아

내기가 어렵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울 어디서도 전쟁의 흔적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재

집단이라는 서울대 캠퍼스를 돌아봐도 서울대 재학생으로 한국전쟁에 나가 숨진 이들을 기리는 초라한 충혼탑 하나

도 없다. 심지어 YS 대통령도 1993년 2월 대통령 취임사를 하면서 전몰 장병의 희생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니 더이

상 할말이 없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상기하고 전몰 장병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동작동 국립현충원까지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곳

에 잠들어 있는 가족들이 없는 한 국립묘지는 가기 어렵고 낯선 곳일 따름이다. 나는 아직까지 국립묘지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나는 <대한민국의 평화와 캐나다의 전쟁>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우리의 전쟁 희생자들을 국립묘지나 전적지의 울타리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자기 고향, 모교 등지로 옮겨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희생이 50년, 100년이 지나도 살아 있게 된다. 유물이 아닌 생활 속에서 호흡할 수 있을 때만

이 그들의 숭고한 정신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이 애국심을 강조할 때마다 미국에서 유학 중인 이스라엘 대학생과 아랍 출신 대

학생들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이스라엘 학생들이 불타

오르는 애국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없다. 

 

   모든 국가는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무를 지고 있다. 정부가 국가로서의 책무를 성실히 다한다고 느낄

때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이 저절로 싹트는 것이다. 이스라엘 대학생들은 어려서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이스

라엘 정부가 자국민의 안녕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를 보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애국심을 키운다.

 

  유태인들의 나라사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때로은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그들은 조국애를 실천하는 데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어빙 모스코비치의 예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미국 플로리다 출

신의 백만장자인 어빙 모스코비치는 동(동)예루살렘의 아랍 땅을 몰래 사들였다. 그런 뒤에 이스라엘 정착민이 입주

하도록 해 팔레스타인 땅을 사들이는 게 독립 국가 창설을 막는 최상의 방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 이스라엘의

생존 비밀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개개인이 이렇게 조국애로 충만해 스스로 실천할 때 그 사회가 외부의 어떠한 공격

이나 위협에도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1995년 6월 22일 제주도 남쪽 바다에서 선박이 출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의 전세 선박 미네랄 탐피아호

와 한진 해운 소속 한진 마드라스호가 충돌하면서 미네랄 탐피아호에 타고 있던 선원 27명 전원이 실종됐다. 실종자들

중에는 이스라엘인 9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곧바로 구조작업이 시작되어 사체 2구를 건져냈지만 일주일 뒤에 500명 이

상이 숨지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이 해상 충돌사고는 금방 뇌리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한국 정부가 인양작업을 중단하자 예루살렘 경찰청 내에 이 작업을 지휘할 본부를 설치하고 며칠

뒤 아틀란틱 디펜더호를 사고 해역으로 급파했다. 이 배는 모두 6구의 사체를 추가로 인양했는데 이 중에 이스라엘인은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측의 전문가들은 인양작업이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아틀란틱 디펜더호보다 더 큰 규모의 선박을

요청하여 켄드릭호가 급파됐다. 이스라엘 정부가 1995년 말까지 사체인양작업에 필요한 선박과 장비 대여, 잠수부 고용

등에 쓴 돈은 500만 달러, 한화로 32억 원에 이른다. 물론 이 돈은 국가예산으로 충당되었다.

 

   이렇듯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인이 이역 만리에서 숨을 거두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시신을 찾아 유가족의 품에 안겨

주는 것을 국가의 의무로 여기고 있다. 정부의 이런 노력을 보면서 이스라엘 국민이 정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95년 가을 암살된 이즈하크 라빈 이스라엘 수상은 1967년의 6일 전쟁 당시 참모총장으로 전쟁을 지휘했다. 라빈은 6일

전쟁이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 병사들은 무기가 우세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사명감과 임무에 대한 정당성의 확신, 조국을 향한 깊은 애정,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유태인들이 이 나라에서 자유롭게 독립하여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결의 때문에 승리를 거

둔 것이다. 이 군대는 인민으로부터 왔고 인민으로 돌아간다."

 

 

 

출처 : 영어공부는 팝송과 함께
글쓴이 : 김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