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전략
결국 양자 사이에 서울외곽 돌파 방법을 놓고 상당한 논쟁이 오고갔으나 해병 1사단장 스미스의 결심이 워낙 확고부동하여 10군단장 알몬드는 " 해병 1사단은 전력을 다해서 서쪽에서 공격을 계속하되 전황 진전이 좋지 않을 경우 사단의 작전지역을 변경하도록 한다. " 는 절충안을 제시하고 겨우 타협을 하여 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 영등포 외곽에서 돌파를 시도하는 해병 1사단 ]
그러나 이들의 대립은 결코 감정적이거나 서로를 시기하여 발생한 것은 아니고 아군의 승리라는 단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을 논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비록 알몬드가 상관이지만 지휘 계통으로 스미스를 누르려 하지 않았고 스미스 또한 신념에 의해 부대를 지휘하였지만 격론이후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항명하지 않았습니다.
[ 두 장군의 대립은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 작전을 숙의 중인 올리버 (左) 와 알몬드 ) ]
인천상륙작전과 후속하여 실시된 서울탈환이후 미 10군단과 여기에 예속된 미 해병 1사단은 다시 한 번 상륙작전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바로 전략적으로 대 실패인 원산상륙작전이었습니다. 원산항에 살포된 기뢰로 인하여 바다 한가운데서 10군단이 오도 가도 못하고 버벅거릴 때, 동해축선을 따라 전진한 국군 1군단이 원산을 선점하여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 행정상륙으로 전락한 원산상륙 작전 모습 ]
어쨌든 실전이 아닌 김빠진 행정 상륙이 되었지만, 평안도로 진격하는 미 8군과는 별도의 지휘계통과 작전권을 맥아더로부터 부여받은 미 10군단은 한반도 북동부의 함경도지역을 조기 석권하기 위하여 예하부대들은 각 전략 거점별로 산개하면서 한만국경을 향하여 앞으로 빠르게 내달릴 준비를 마쳤습니다.
[ 원산상륙 후 해병 1사단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북진 준비를 완료합니다 ]
그러던 중 1950년 10월 25일 낭림산맥 서쪽 서부전선의 미 8군 전면에 갑자기 출몰한 중공군의 등장은 전쟁이 새로운 시점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북진을 독려한 UN 군 지휘부는 모든 상황을 낙관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월 26일 국군 청성부대가 한만국경 초산까지 진격하였을 정도로 제대로 된 전황을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 북진을 재촉하기 위해 평양의 미 8군을 방문한 맥아더
그들은 전선의 불안한 징후를 애써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
이 시점에서 UN군 최고 지휘부가 올바른 판단을 하였다면 함경도 지역으로 진출하려고 부대를 배치하고 있던 미 10군단 ( 국군 1군단 포함 ) 에게 진격중지 명령을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명령도 없었고 미 10군단은 서부전선의 급박한 상황과 동떨어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판단 착오를 하였습니다. 중공군 출현 직후 열린 군단 작전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 알몬드 (中) 와 10군단 지휘부 ]
" 군단은 동북지역의 한만국경선으로 계속하여 신속히 진격한다. 국군 1군단은 동해안 축선과 무산가도를 따라 북으로 전진하여 두만강 하류에 도달한다. 미 3사단이 원산에 도착하면 미 해병 1사단은 전선을 인계하고 장진호방향으로 진격한다. 미 7사단은 이원에 상륙 후 혜산진방향으로 진격한다. "
[ 이원에 상륙한 미 7사단 ]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의 강한 저항에 마주쳤을 때 이런 작전 지시가 나온 것은 august 개인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아무리 미 8군과 미 10군단의 작전권이 분리되었다 하더라도 전선의 좌익이 생각하지 못한 위기에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별도의 진격을 개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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