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사년 을해(乙亥=西紀 1,335) 십월 십일일에 함경남도 영흥군 흑석리(黑石里) 사저(私邸)에서 탄생하였다. 이름은 단(旦), 자(子)는 군진(君晋), 최초의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中潔), 호(號)는 송헌(松軒)이라 불렀다.
아버지 환조(桓祖)의 이름은 자춘(子春)이고, 어머니의 성은 최씨였다.
이문(李門)의 시조(始祖)는 신라시대에 사공(司空=토목과 건설을 맡은 관직)이란 벼슬살이를 하던 한(翰)이란 사람이었는데 태조는 이의 이십이대 손(孫)이다.
그런데 시조 이하 십칠대(代)까지에는 영명(令名)을 날리는 자가 없었으므로 한 개의 평범한 집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십팔대 손 목조(穆祖) 곧 안사(安社)대에 이르러 전주에서 함경남도로 이사해 살다가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게 되어 의주(宜州=오늘의 덕원)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때는 바로 고려 고종 말년이었다.
중국의 원(元)나라(몽고족)는 오늘의 영흥 지방에 쌍성총관부(雙城摠官府)를 두고 그 이북의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때에 목조 안사는 원나라에 투신하여 멀리 북쪽 알동(斡東=간도지방)으로 또 이사하여 남경(南京=국자가)에서 오천호(五千戶)란 직명(職名)을 가진 지방관리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인 익조(翼祖) 행리(行里), 익조의 아들인 도조(度祖) 춘(椿), 도조의 아들인 환조(桓祖=태조의 아버지) 등은 모두다 대대로 습직하여 원나라의 천호(千戶)란 지방관이 되어 지냈다.
그러나 익조는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거소(居所)를 도로 남으로 옮겨 덕원에서 와 살았다. 그러나 환조는 다시금 영흥지방(쌍성)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영흥서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환조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사, 오년 두해에 고려조정으로 들어와 공민왕의 지우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환조는 공민왕 오년에 고려의 장수 유인우(柳仁雨)를 도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격하파고 함주(함흥)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이 때문에 환조는 고려 삭방도(朔方道=함경도)의 만호겸병마사(萬戶兼兵馬使=외직으로 무관 벼슬)로 등용케 되었다.
이씨의 흥륭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환조의 천수가 길지 못하여 사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는데 그의 슬하에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을 원계(元桂), 차남을 성계(成桂=곧 태조), 삼남을 화(和)라 불렀다. 그러나 장남과 삼남은 정실의 소생이 아니었으므로 이남인 성계가 망부의 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성계는 일대(一代)의 영웅이었으므로 그 기개, 용력, 그 배포가 십인, 백인에 뛰어났다. 특히 소년시대부터 궁술(弓術)의 묘를 터득하기 시작하여 만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또한 외모가 당당한데다 신채(神彩)가 몸에 감돌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자못 컸다.
소장시대의 태조는 엄격하고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평거(平居)에 있어서는 항상 눈을 감고 지냈기 때문에 그에게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 사람을 접하게 되면 어느 때나 화기융융 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존재로만 보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도 보았다. 성계는 육척 장신의 소유자인데 귀가 남달리 크고 또 기묘하게 생겼던 모양이다.
명(明)나라 사신(使臣) 왕태(汪泰)는 성계의 귀가 남달리 크고 기묘함을 보고 그의 일행에게 대하여 "참 묘한 귀다! 그런 귀는 생후 처음 본다."하고 놀랐다.
또 상명사(相命師) 혜등(惠등)은 어느 때 그의 친지에게 "내가 사람의 상을 봐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성계처럼 앞날이 환하게 티인 사람은 처음 보았다."하고 느낀 바를 말했다.
친지의 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뭣이 어째? 제아무리 잘 된다 할지라도 총재(總宰=오늘의 내무부장관)밖에 더 되겠나?"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러나 혜등은 머리를 저었다.
"총재밖에 더 안 돼? 모르는 소리 말아! 내가 본 것은 그게 아닐세."
"어떻게?"
"군장(君長)이 될 상을 지니고 있어. 좀 기다려 보게! 이성계가 왕씨를 대신하여 꼭 임금이 될 터이니…"하고 쾌히 대답하였다.
승(僧) 무학(無學)이 안변 설악산 토굴 속에 기거하고 있을 때에 성계는 그리로 찾아가 다음의 꿈을 해몽케 하였다. 그 꿈의 하나는 자기가 어느 파옥(破屋) 속에 들어갔다가 세 개의 <서까래>를 가로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꾼 것이었다. 성계는 이 꿈의 해몽을 청하였다.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은 먼저 치하하고 해몽하기를, 등에 삼연(三椽)을 짊어진 것은 <임금 왕(王)>자(子)를 형용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성계는 또 다른 하나의 꿈을 내놓고 이것의 해몽을 청하였다. 그것은 꿈에 꽃이 지고 거울이 떨어지는 것을 본 것이었다. 이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은 또 해몽하기를 꽃이 졌으니 열매가 생겨질 것이고 거울이 떨어졌으니 반드시 무슨 소리가 났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성계는 이말을 듣고 기쁨에 넘쳐 그날부터 절을 창건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창건케 하여 절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지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태조 친필의 <석왕사> 석자는 없어지고 다만 각판(刻板) 만이 남아 있을뿐이라 한다. 성계가 정승 지위에 있을 때는 꿈에 하늘의 신인이 금척(金尺)을 내주면서 말했다.
"경시중 부흥(慶侍中復興=시중은 고려시대의 정승 벼슬)은 남달리 청렴하기만 한데다 이미 늙었고 또 최도통사(崔都統使=도통사는 고려시대의 외직으로 국방군을 거느리는 무장 최영(崔瑩)은 남달리 직(直)하기만 해서 나라를 바로 잡음에 있어 적재가 못된다. 그래서 이 금척을 그대에게 주노니 이것을 지니고서 나라를 바로 잡음에 힘쓰라."
위에 말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전설과 꿈 이야기가 전해 오지마는 그것들은 거의 다 신화(神話) 같은 이야기들이다.
다음으로 이성계가 사술(射術)의 기재(奇才)였음에 대하여 써보고자 한다. 성계는 유년(幼年)시대부터 활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 활을 대로 만들지 않고 싸리나무로 간(幹)을 삼고 여기에 깃을 붙임에 학령(鶴翎)을 사용했고 또 초(哨) 만드는 데는 미각( 角)을 사용했다.
그래서 크기가 배(梨) 만했으며 촉(鏃)이 무겁고 간(幹)이 길어서 보통 궁시(弓矢)보다 배나 무거웠다.
성계는 청년시대에 아버지 환조를 따라 사냥을 하게 되었다. 이때 환조는 태조가 갖고 있는 살을 빼앗아 보면서 말했다.
"이 살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것을 땅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성계는 이것을 내버리기 싫어 땅에 떨어진 살을 주워서 살통에 꽂고 앞에 서서 갔다.
이때 노루 한 마리가 산록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성계는 노루가 나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일시(一矢)를 가하였다. 노루는 맞기가 무섭게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런데 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성계는 이 노루에게도 일시를 가하여 죽게 하였다. 이와같이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일곱 마리를 잡아 아버지 환조는 이를 보고 한편으로는 놀라면서 한편으로 기쁨에 넘쳐 크게 웃어댔다.
이 노루사냥이 있은 지 며칠 안 되어 이번에는 홍원군(洪原郡) 소포산(昭浦山)으로 가서 노루 사냥을 하였다. 때 마침 노루 세 마리가 떼를 지어 나와 있었다. 이를 본 성계가 우선 노루 한 마리에게 일시를 가하여 죽게 하자 나머지 두 마리는 나란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성계는 이 두 마리를 일시로 잡을 작정을 하고 또 한 살을 쏘았다. 성계가 작정한 대로 화살은 두 마리의 동부(胴部)를 관통하고 나아가서 여력으로 나무를 뚫었다. 성계의 종자(從者) 이원경(李原景)은 나무에 박혀 있는 살을 뽑아 가지고 성계에게로 갔다.
이때 성계는 원경에게 물었다.
"이제야 돌아오니 뭣 때문에 그리 늦어졌노?"
"살촉이 나무에 깊이 박혀서 뽑아내기에 시간이 가서 늦었습니다."
대답을 하자 성계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근사한 말이다. 그랬을 것이다. 나의 시력(矢力)은 노루 세 마리를 한 살로 동관(胴貫)하였을지라도 그만한 힘이 남게 될 것이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또 성계가 어느 때 임강현 화장산(臨江縣華藏山)에서 사냥을 하게 되었다. 산 속에서 사슴이 나타나서 성계가 이를 쫓아가다 보니 높이가 수십척이나 되는 절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절벽의 지세는 사람이 오르락내리락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계는 이를 불문에 붙이고 말을 올라 채찍을 가하면서 절벽 밑으로 내려갔다. 말이 마침내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계는 어느 사이에 사슴에게 일시를 가하여 죽게 하였다.
이런 것들을 보면 성계의 용맹과 담력이 어떠하였슴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번은 여조(麗祖) 삼십일대왕 신우(辛禑)를 따라 해주에서 사냥을 하게 되었다.
이때 왕은 따라온 여러 신하에게 "오늘의 사냥은 짐승을 잡는데 반드시 등어리를 쏘아서 잡아야 한다. 이에 위반한 것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하고 주의를 시켰다.
성계는 평소에 사냥을 할 때에도 기러기의 바른편 시골(翅骨)을 목표로 하여 사냥을 해왔기 때문에 목표지정의 사냥이 그리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날 사십여마리나 되는 사슴을 쏘아 잡음에 있어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등어리만을 쏘아 잡아 일등상을 탔던 것이다.
또한 황상(黃裳)이란 사람은 일찍부터 원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활쏘기로 이름을 천하에 날렸다. 그리하여 그는 고려 공민왕조로 들어가 찬성사(贊成事=고려시대의 정이품 벼슬, 평장사와 같음)를 지냈는데 성계는 일찍이 그와 회동하여 사술시합(射術試合)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백오십 보 밖에 과녁을 만들어 놓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였다.
성계는 일찍부터 시합 장소로가 쏘기 시작했다. 그는 백발백중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는데 낮쯤 되어서 황상이 나와서 쏘기 시작했다.
그는 수백 발 중 오십 발만은 연발 연중하고 그 후부터는 혹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했다. 그러나 성계는 수백 발을 쏨에 있어 단 한 발도 실패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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