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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호 _ 서울 광화문 지금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2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계기로 크게 높아진 고구려에 대한 관심에 미디어가 합세하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현재 인터넷 쇼핑몰에는 100여 가지가 넘는 고구려 관련 상품이 검색되며, 이동통신사에서는 고구려 관련 요금제를, 인터넷 강의 업체에서는 고구려 패키지 강좌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관심과 열풍은 대개‘물건을 잘 팔기 위한’상업적 활용에 그치고 있을 뿐, 정작 알고보면 우리가‘고구려’에 대해서 몰랐던 것, 잘못 알고 있던 사실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주몽’과‘삼족오’에 열광하고‘동북공정’에 분노하기 이전에 고구려에 대해서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알아두어야 할 고구려 역사 상식 몇 가지를 소개한다. ‘고려’는 ‘고구려’다? 만주에는 고려성(高麗城), 고려묘(高麗墓), 고려방(高麗房)과 같은 지명이나 유적이 많다. 헌데 잘 알다시피 왕건이 세운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주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고려라는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만주지방에 등장하는 ‘고려’는 다름아닌 ‘고구려’를 일컫는 말이다. 사서들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만 유독 고구려란 이름이 고집스럽게 등장한다. 그 영향으로 우리가 배운 국사교과서는 모두 고구려라는 표기를 통일해서 쓰고 있다. 하지만 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와 고려가 동시에 쓰이고 있으며, 일본 사서는 고려라고만 쓰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고구려라는 기록은 7번, 고려라는 기록은 70번이 나온다. 한편 고구려인들이 남긴 유적이나 유물에서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1979년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더욱 분명한 해답을 내려주고 있다. 이 비는 장수태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문 첫 줄에 ‘5월중 고려태왕(五月中 高麗太王)’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중원고구려비가 세워진 시기에 고구려인들은 고려라는 국명을 썼다는 말이 된다. 이 외에도 ‘연가7년명불상(延嘉七年銘佛像)’의 광배에도 고려란 이름이 등장해 ‘고려=고구려’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정신문화연구원의 정구복 교수는 오랜 연구 끝에 ‘고구려’라는 국호는 장수왕 10년대에 ‘고려’로 고쳐져 말기에는 완전히 고려로 칭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은 고려라는 국명도 당시 고구려가 고려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된다. 이제 중국땅을 가서 고려라는 이름을 접하게 된다면 ‘고려=고구려’임을 꼭 기억하자. 광개토대왕인가? 광개토태왕인가? 고구려 19대 왕으로 22년 동안 고구려를 통치한 광개토태왕을 부르는 호칭은 나라나 학자마다 다르다. 일본이나 중국 학자들은 ‘호태왕(好太王)’이라 부르고, 우리 나라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것으로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는 표현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는 표기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확한 표현일까.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긴 시호가 나온다. 광개토태왕릉에서 나온 벽돌에도 ‘태왕’이라는 칭호가 나오고, 중원고구려비에도 분명히 같은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공통된 호칭을 찾아보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다. 그러나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는 어느 유적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에 김부식 등 사대주의 학자들이 중국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 태왕이란 호칭을 쓰지 않고 왕이라 썼던 것이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비에 태왕이라는 호칭이 등장하고 있고, 신라는 전성기인 신라의 진흥왕순수비에 진흥태왕이라는 말이 나온다. 장수왕이 세운 중원고구려비 역시 태왕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세 왕은 모두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해 주변 국가를 복속하거나 합병하는 등 뚜렷한 업적을 남긴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밖으로 뻗어나가며 제국의 질서를 구축한 왕에게 ‘태왕(太王)’이라는 호칭을 붙였던 것이다. 당시 태왕은 중국의 천자나 황제와 같은 반열의 제국의 군주를 칭하는 보편적 용어였고, 따라서 광개토대왕도 마땅히 ‘광개토태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른 호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제부터라도 민족의 자긍심을 살리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광개토태왕의 바른 이름을 되찾아주자. 고구려는 당당한 천손국가(天孫國家)였다 고구려는 하늘의 아들임을 표방한 천손국가였다. 대표적으로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에도 시조 추모(주몽)를 “하느님의 아들(天帝之子)”이라고 기록한 대목이 나온다. 중국의 황제들은 자신만이 하늘의 아들이고 주변 국가는 모두 그 천자의 신하라 해서 ‘천자’라는 단어의 사용을 엄격하게 금했지만, 고구려는 스스로를 당당히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방했던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증표는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이다. ‘연호’란 임금이 자리에 오른 해에 짓는 칭호로, 중국의 각 왕조는 천자 국가를 자임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 반면에 주변 나라들은 제후 국가로 규정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못하게 하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는데, 고구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떳떳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했다는 것은 천제(天祭)문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은 자신만이 하늘의 아들(天子)로서 천제를 지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주변 제후국은 제후들의 부모인 종묘(宗廟)와 땅과 농사의 신인 사직(社稷)에만 제사지내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고구려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의식이 엄연히 거행돼 왔고, 그것을 이름하여 ‘동맹’이라 불렀다. 고구려인은 거친 무인(武人)들? 고구려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강인함과 용맹성을 바탕으로 한 ‘상무정신(尙武精神)’의 기질이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이 용맹했을 뿐 아니라 매우 수준 높은 문화민족이었음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90여 기가 넘는 고분벽화들. 그 벽화들은 고구려인들이 얼마나 우수한 선진문화를 꽃피웠는지 잘 보여준다. 우선 고구려인들은 노래와 춤을 즐긴 사람들이었다. 온 나라 온 마을에서 해가 지면 남녀가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노래와 춤을 즐기다 보니 음악 형태도 다양해지고 자연스럽게 악기도 발전하였다. 벽화에는 합창단과 탈춤, 북춤, 칼춤 등 다양한 춤 형식이 나타나며, 타악기와 관악기 등 벽화에 나오는 악기만 해도 24종이나 된다. 또 벽화에 나타난 여인들의 의상과 장신구, 평상과 밥상 등의 뛰어난 공예술, 갖가지 천장과 다양한 고임, 기둥과 두공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건축술, 그리고 벽화 자체가 웅변으로 증명해 주는 그림 솜씨, 이들은 모두 고구려인들의 섬세하면서도 힘찬 예술적 창조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예들이다. 고구려인들의 과학적 생활은 천문학이 대변한다. “화성(熒惑)이 전갈자리 시그마별(心性)에 머물렀다”(유리왕 13년)고 정확하게 관측할 만큼 고구려의 천문학은 다른 영역 못지 않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인은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하였는데 음양사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해와 달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24기나 되고, 보살도 사신도와 온갖 신선들 그리고 불사조 삼족오 등 유·불·선의 세계를 모두 섭렵한 고구려의 현묘지도가 벽화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이상으로 고구려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몇 토막 소개했다. 하지만 사실 고대사는 사료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해 역사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모순된 기록들이 혼란을 준다고 해서 역사의 진리가 변하고 진실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며, 그 유산도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진다면 잊혀진 역사를 반드시 되살리고, 빼앗긴 역사를 되찾아 올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서길수,『 고구려유적답사』홀본·국내성 편, 사계절, 2000 증산도 편집부,『 9천년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대원출판, 2000 MBC <느낌표> 홍보책자,『 깨어나라 고구려의 후예들이여!』, KTF 후원, 2006
세 발 달린 까마귀의 진실 지난 1999년 김대중 정부시절에 만든‘3호 봉황국새’에 금이 갔다는 감사원의 발표 이후 국민들 사이에는 차기 국새의 손잡이에 삼족오(三足烏)를 새기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다지 예쁘지도 용이나 봉황처럼 화려한 멋도 없는 삼족오이지만 고구려 열풍 속에 삼족오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얼마 전 방영된 주몽에서도 ‘주몽은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다. 삼족오의 나라를…’ 이라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등장했다. 이 대사처럼 최근 드라마에서도 고구려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삼족오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삼족오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삼족오는 ‘오(烏)’를 ‘까마귀’로 해석하느냐 ‘검다’는 의미로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조금 달라진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을 하든 공통점은 ‘태양 안에 사는 세 발 달린 검은 새’라는 점이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의미를 분석해보자. 첫째, 삼족오는 태양(광명)숭배의 원 뿌리로서, 동아시아 천자국의 상징으로 천손(天孫:하늘백성)의식을 갖고 있던 한민족 고유의 상징이다. 둘째, 하나의 몸통에 달려 있는 3개의 발은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모시던 삼신하나님의 삼신일체(三神一體) 사상을 이 땅에 구현하겠다는 철학을 담고 있으며, 또 검은 색은 오행에서 수(水)를 상징하며 생명과 역사의 근원을 의미한다. 즉, 우리 민족이 인류 태초 문명의 시원국임을 상징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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