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체제 종식 후, 한국은 이념적 反共국가에서 보통국가를 거쳐, 左派(좌파)정권下에서 좌경화가 가속되어 왔다. 반면 일본은 사회 전반이 급속히 보수화·우경화되고 있다. 한국의 좌경화 노선과 일본의 우경화 노선이 갈등·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韓·日 양국은 1965년 국교 정상화 이래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기반 위에 「韓·美동맹」과 「美·日동맹」이라는 강력한 「접착제」가 있어 동맹을 유지했다. 어찌 보면 냉전이 韓·日 양국관계를 묶어 왔던 접착제였다고 할 수 있다. 냉전이라는 접착제가 없어지면 결합·결속이 떨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냉전체제 종식 후 안보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韓·日 양국의 입장차는 점점 확대되어 왔다. 한국은 동맹관계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이끊임없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안보태세 정비를 소홀히 했다.
냉전체제가 종식되었을 때 일본사회에서는 美·日동맹을 계속 유지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심각한 논란이 있었다. 일본은 「냉전 후에도 美·日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본은 19세기 말 이래 國運(국운)을 걸었던 몇 차례의 전쟁에서 동맹을 잘 맺었을 때에는 승리했고(英·日동맹을 배경으로 淸·日전쟁, 러·日전쟁 승리), 동맹을 잘못 선택했던 태평양전쟁에서는 패전해 역사상 처음으로 타국에 점령당한 뼈아픈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
세계사상 최단기간에 압축성장과 민주화를 달성하고, 서울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치러냄으로써 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 데 역사적으로 기여했던 한국은 안보환경 변화에 대해 거의 무감각했다. 아니 「안보환경 변화를 무시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과도한 자신감으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관대해지고, 主敵(주적)인 평양 독재체제의 야만성과 위협을 무시할 때, 일본은 안보문제를 냉정하게 再점검했던 셈이다.
일본은 냉전종식 후 주변 관련국들과 安保(안보) 대화부터 시도했다. 일본 당국은 우선적으로 한국과 안보대화를 원했지만, 북방외교에 몰두해 있던 盧泰愚(노태우) 정권은 일본 측의 희망과 접근에 응하지 못했다. 韓·日관계의 異常(이상)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양국이 전략적으로 간격이 벌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다.
1990년 평양 측의 核무기 개발 의혹이 표면화되었으나, 정작 당사국인 한국은 1991년 12월 실효성을 전혀 보장할 수 없는 「한반도 非核化 선언」 으로 대처했다. 일본이 위화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 각계의 소위 진보세력들은 自國(자국)의 안보문제에 관념적·위선적 평화주의로 대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 사회에 변화를 바라는 욕구를 증폭시켰다.
金正日, 日本 사람들을 각성시키다
북한에 피랍된 일본인 중 사망한 것으로 드러난 요코다 메구미(피랍 당시 13세)씨의 어머니 사키에氏가 2002년 9월17일 저녁 도쿄에서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옆에서 통곡하는 사람은 요코다의 아버지. |
욕구불만 상태의 일본 사회에 국가의식·안보의식을 각성시키고, 보통국가化의 명분과 기회를 제공한 것은 金正日이었다. 일본은 1998년 8월 대포동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어 발사되자, 즉각 對北 식량지원 등을 중단했다. 3개월 후엔 정찰위성 보유를 결정하게 된다.
그 이전엔 일본이 정찰위성을 보유한다는 것은 공론화조차 금기시되는 분위기였다. 일본은 숙원사업을 金正日의 도발 덕분에 손쉽게 해결했던 것이다. 1999년 3월 일본 영해를 침범했던 북한 공작선의 도주 광경은 일본의 有事法制(유사법제)를 신속히 정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이 對北 강경책만을 쓴 것은 아니다. 냉전종식 후 유라시아 地圖(지도) 색깔이 어지럽게 바뀌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日·北관계 정상화를 시도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는 한국과 공동개최했던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평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일본 측은 日·北 교섭,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지원 등 金正日 정권과의 접촉에서 피로감과 혐오감만을 느끼게 됐다. 일본은 점차 당근보다 강경책으로 기울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이 우경화하고 있다」고 비난이 일었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다섯 차례 對北제재를 단행했다. 작년 金正日의 미사일 連射(연사)와 核실험 도발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제재조치는 물론, 미국 등과 긴밀한 협조下에 유엔의 對北제재조치를 주도했다.
일본이 이처럼 변하는 동안, 한국은 뚜렷한 전략 없이 韓·日관계를 방치해 왔다. 국내의 전통적 反日감정을 우려해 당연히 했어야 할 일본과의 전략적 대화에 소극적이었다. 金泳三 정부 이후 역대 한국정권의 정책노선은 기본적으로 「과거」와의 정치적 투쟁과 포퓰리즘이 주축이었다. 左派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안보전략·정책까지 좌경 민족주의의 포로가 되었다.
푸른 리본을 단 일본 각료들
韓·日 양국이 전략적으로 충돌하는 결정적 장면은 金正日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서 나타난다. 左派정권의 反美·反日, 대륙 지향은 필연적으로 對中 관계에서 韓·日 양국이 충돌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안보전문가들은 金正日의 核실험을 「일본판 쿠바 위기」 혹은 「일본판 9·11」과 같은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일본 사회에는 「自國民을 대량 餓死(아사)시켜 가며 만든 金正日의 원자폭탄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컨센서스가 형성됐다.
일본 사회는 盧武鉉 정권과 한국 사회가 과연 金正日의 원폭을 제거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한다. 盧武鉉 정권이 「金正日이 核실험에 이르게 된 것은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등 北核 제거보다 평화적 해결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韓·日 양국의 金正日에 대한 국가적·국민적 정서는 너무나 다르다. 일본 사회의 金正日에 대한 혐오감·경계심은 냉전시대 한국의 反共이 무색할 정도다. 金正日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는 일본인의 국가의식과 인권의식·동족애를 일깨운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작년 9월 출범한 아베 정권은 全각료로 구성된 「납치문제대책본부」를 발족시켰다. 총리가 본부장이다. 아베 총리는 『金正日에게 납치된 自國民(자국민)은 최후의 한 명까지 구출하겠다』는 결의를 재삼 천명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납치된 自國民을 구출하겠다는 「싸우는 자세」가 국민들에게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될 수 있었다. 납치 피해자를 구출하기 위한 초당파적 국회의원 모임을 결성했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각료 등 많은 일본인이 양복 깃에 푸른 리본을 달고 있다. 金正日에게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탈환하자는 다짐의 표시이며, 인도주의와 애국심, 동포 사랑의 상징이다.
탈북자 문제에 소극적인 韓國民을 경멸
아베 총리는 외국 방문 중에 이 푸른 리본을 달고 간다. 일본 정부는 평양 측과 접촉하는 모든 기회에 납치된 일본인 구출 문제를 제기하도록 했다.
일본 사회는 납북자나 탈북자 문제에서 보이는 한국 사회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표현을 삼가지만, 경멸적 태도를 감추지 않는 사람이 많다. 특히 한국 당국이 6者회담에서 일본 측이 납치일본인 문제를 거론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으로 전해지면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나빠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일본의 한 유력 정치인은 『盧武鉉 대통령이 마치 金正日의 동생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작년 6월 제정된 일본판 「북한인권법」은 납치된 피해자들뿐 아니라, 탈북자도 보호ㆍ지원토록 규정하고 있다. 매년 「세계인권의 날」인 12월10일부터 16일까지 1주일간을 북한의 인권침해 실상을 알리는 주간으로 정했다.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북한당국...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