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精神修養 마당

"27년 만에 본 세상..아름답고도 이상해"

鶴山 徐 仁 2007. 1. 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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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지 27년 만이었다. 전남 담양군에서 농사를 짓는 김인찬(金仁讚·41)씨는 작년 7월 각막 이식 수술을 받고 오른쪽 눈 시력을 되찾았다. 일생 동안 갈망했던 한 줄기 빛이 오른쪽 눈으로 새어든 순간 처음 본 것은 아내와 세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예쁠 줄 몰랐는데, 아내와 아이들 피부가 너무 뽀얗고 고와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눈을 뜨니 마음이 열렸다. “오늘 아침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해가 구름에 가려 하늘이 빨갛게 물들었어요. 얼마나 예쁜지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어요.”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도, 날아가는 새도,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도, 밤 하늘에 반짝이는 달과 별도 그는 마냥 아름답고 신기하고 보기 좋다고 했다. “꼭 철 안든 어린애 같죠? 세상엔 볼 게 많네요.”

 

어둠, 짙고 길었다. 7살 때 작은형과 놀다 왼쪽 눈을 다친 뒤 오른쪽 눈에도 하얗게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14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중학교를 그만뒀다. 찾아가는 병원마다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길이 없었다. 김씨는 “꼬박 10년 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먹고 자고 놀기만 했는데, 처음 3년 동안은 매일 꿈에 학교가 보였다”고 했다. 시각적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져 갔다. 어느 새 꿈도 꾸지 않게 됐다.

 

25살 때 아버지가 송아지 한 마리를 사줬다. 뿔에 받히고 뒷발에 차여가며 더듬더듬 송아지를 돌봤더니 이 놈이 자라서 새끼를 쳤다. 두 가지 소망이 싹텄다. 결혼을 하고, 눈을 뜨는 것.

 

37살에 첫 번째 소망을 이뤘다. 다니던 교회 지인이 중국 자매 교회를 통해 중매를 섰다. 중국 교포 장귀화(28)씨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에게 시집왔다. 장씨는 “이름이 착해 보였고, 사람이 착해서…”라고 했다. 아이도 셋이나 생겼다.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판정받은 그의 눈, 서울 강남성모병원이 기적적으로 살려놓았다. “다들 안 된다고 했던 소망 두 가지가 다 이뤄졌으니, 내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세상을 알아갈수록 좀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늘어간다. “그 왜, 노숙자들 있잖아요. 얼마 전에 새벽 열차를 타고 영등포역에 내렸는데, 깜짝 놀랐어요. 누워 있는 사람, 소리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아, 무섭더라고요. 세상이 뭐가 잘못된 건지.”

 

그가 사는 조용한 시골 마을까지 휩쓸고 지나간 투기 광풍도 낯설었다. 근방에 혁신도시가 들어선다는 루머가 돌면서 5만원 하던 땅 한 평 가격이 두세 배로 뛰었다. 순식간에 이 마을 땅 절반이 바깥사람들에게 팔렸다. “농사 지어서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땅 사고 팔아서 먹고 사는 시대가 됐어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뉴스를 보면 끔찍한 살인사건은 왜 그렇게 많은지. 정치인들은 왜 그렇게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많이 하는지. 나라의 어른이면 말을 좀 아끼면서 백성들의 귀감이 돼야 할 텐데….” “근데, 나 같은 사람이 뭘 알겠나요…”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27년 만에 눈을 뜬 농부 앞에 펼쳐진 2006년 대한민국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저는 희망을 알아요. 제가 두 가지 소망을 얘기했을 때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둘 다 거짓말처럼 이뤄졌어요. 그래서 지금은 믿어요.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걸.”

 

김씨가 잠든 세 아이를 바라봤다.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진다. 어둑해진 바깥에는 찬바람이 휘몰아쳤지만 방 안에는 온기가 감돌았고, 아랫목에서는 청국장 익는 냄새가 났다.


최규민 기자

 

 

鶴山 ;

우리들 대부분은 현재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큰 행복을 인지 못한 채 살아가는 시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심신이 건강하다는 것 만큼 자신에게 더 중요하고 또한 행복의 근원이 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하루 하루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면 불행은 그 모습을 감추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