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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해군 항공 창설 50년

鶴山 徐 仁 2006. 12. 25. 18:44
 

해군 항공 창설 50년을 맞이하여........


Ⅰ. 머리말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으로 플라이어호를 띄운 것이 1903년 12월 !! 그들의 욕망이 인류 역사상 길이 남을 발명품을 만들어 냈다. 간절하면 이루어지고, 필요하면 만들어진다는 말처럼 그들은 그렇게 간절하고 절실했기 때문에 훌륭한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해군에도 하늘을 향한 강한 열정과 그 필요성을 일찌감치 느껴 라이트 형제만큼의 위업을 이뤄낸 이들이 있었다.

  작년, 부대 내 신축 다목적 교육관의 명칭을 고민하던 중 해군의 초대 함대 항공 대장이신 “故 조경연 중령” 과 당시의 조종사 및 정비사들의 활약상을 알게 되었다.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고자 다목적 교육관의 명칭을 “경연관”이라 命名하고 그 곳에 당시 제작된 항공기와 해군 항공의 역사적 자료들을 전시하여 장병들에게 해군 항공의 역사를 일깨워 주고 정체성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사실 나 역시도 초군반 시절 배웠던 짤막한 초창기 해군 항공에 대한 지식 외에는 부끄러울 만큼 그 분들의 업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경연관에 전시될 자료들을 모으면서 초기 해군 항공의 모습이 어떠했으며 그 분들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해군이지만 우리 해군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가 제작된 역사를 모르는 많은 해군 장병들이 이 글을 통해 “해군 항공 50년사”를 조금이나마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Ⅱ. 해군 항공의 역사

    대한민국 건국 후 최대의 비극이었던 한국 전쟁 당시, 해군력이 미미했던 북한 해군에 비해 UN의 해군은 미군을 주축으로 양과 질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뉴저지급 전함을 위시하여 거함 거포주의에 따라 건조되어 막강한 화력을 지닌 미 전투함들의 함포 사격과 한반도 근해에 전개한 항공모함 탑재 함재기들의 대공ㆍ대지 공격이 작전 수행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항공모함 Valley Forge, Triumph, Philippine Sea, Boxer, Princeton 등에 탑재된 함재기들은 근접항공지원(CAS : Close Air Support), 항모기동부대 강습작전, 차단 및 교살 작전, 상륙부대 지원 작전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적 전력을 무력화 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중 근접항공지원 임무를 수행한 항공기들의 공격은 적의 공격을 둔화시키는 것은 물론 적으로 하여금 주간의 공격과 작업을 거의 포기하게 할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유엔군 해군항공력의 활약을 가까이서 체험한 한국 해군은 우리도 독자적으로 항공기를 보유해야겠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1. 함대 항공대의 태동

       해군의 첫 항공 조직은 1951년 4월 1일 조경연 중위(당시 계급)가 진해 해군 공창에 건설한 “항공반” 이었다. 항공반은 각 작업장에서 선발된, 해방 전 일본 항공창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기술문관 14명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항공반은 1956년 1월 26일 해군과학연구소 제1연구부 항공과로 승격될 때까지 약 5년간 활동하면서 ‘해취호’, ‘서해호(SX-1)’, ‘SX-2’ 등의 항공기를 제작하였다.

  1954년 6월 서해호의 성공적인 취역에 고무된 해군은 6월 15일 함대 사령부 내에 “건공반”을 창설하고 조경연 대위(당시 계급)를 초대 반장에 임명하였다. 건공반은 창설 한 달여 만인 7월 24일, 한국함대의 부대 개편을 맞아 함대사령부 작전선임참모 예하 “항공참모실”로 개편되었으며, 1957년 1월 1일 작전참모실 예하 “항공과”로 다시 개편되었다. 이들 조직은 해군공창에서의 항공기 제작을 지원하는 한편, 육ㆍ공군 위탁교육을 통해 조종사 및 정비사를 양성함으로써 함대 항공대 창설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항공반 조직 - ‘해취호’ 제작

해군 공창(2차) 항공반 일동

    2. 함대 항공대 창설

       해군은 1957년 7월 15일 편제개편을 통해 함대사령부 작전참모실 항공과를 분리ㆍ독립 시켰으나 실제로 계속 작전참모의 통제를 받았다. 이후 1957년 10월 12일 “함대 항공대”로 정식 발족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독립부대가 되었다.

  함대 항공대는 함대 편제상 각 전투전대와 동등한 위상을 확보하였으며, 초대 항공대장에는 당시 해군 과학연구소 제3과장이었던 조경연 중령이 임명되어 겸직하였다.

  함대 항공대는 기존의 ‘제해호’를 비롯하여, 1958년에 단발수상기 ‘통해호’ 및 ‘L-19 기종 육상정찰기’ 3대를 제작하여 총 5대의 항공기를 운용하면서 해상경비, 조난자 구조, 긴급 수송, 교육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함대 항공대는 부대규모가 커지고 출격회수가 늘어남에 따라 원활한 부대 운용과 해군사관학교 내 소음발생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1959년 2월 16일 해군사관학교 비행장에서 공군 81수리창 관할의 진해 덕산 비행장으로 부대를 이전하였다.

 

 

제해호와 해군과학연구소

제1연구부 항공과 일동

함대 항공대 창설

      3. 함대 항공대 해체

        ‘제해호’, ‘통해호’ 등 해군 함대 항공대가 운용한 5대의 항공기는 미 군사고문단의 동의없이 독자적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따라서 부품 조달을 위한 군수 지원대책이 마련되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항공기의 필수 부품들을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공급해야 했고 그나마도 순조롭지 못한 관계로 함대 훈련을 위한 제한된 작전임무만을 수행할 수 있었다.

  때로 미군 군수 검열단이 진해를 방문할 때면 항공기를 모두 거제도에 위치한 정학윤 대위(당시 조종사) 집 근처의 강이나 숲에 숨겨야 하는 등 웃지 못 할 일화도 많았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은 한국 해군의 항공기 제작 및 운용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이후 연료를 비롯하여 항공기 엔진 등이 미국의 군사원조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미 군사고문단은 음성적인 군수지원조차 규제하고 나섰다.

  운항이 불가능해진 5대의 항공기는 그대로 폐기되어야 할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항공기를 그대로 폐기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해군은 1961년 2월 23일 항공기를 모두 해양 경찰대로 이관하는 가슴 아픈 결정을 내렸다.

 

 

해경으로 항공기 이관

  그리고 항공기 운영요원은 해군이 해경 복장을 하고 지원하는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이 사실도 곧 미군에 노출되어 현역 신분으로 해경을 지원할 수 없다는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일부 해군이 전역하여 해경으로 옮겨갔으며 항공기를 상실한 함대 항공대는 1963년 3월 1일에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로써 우리 손으로 無에서 有를 이룩한 해군항공대는 5년 8개월의 짧은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Ⅲ. 초기 해군 항공기

    1. ‘해취호’

       압록강함 전기사관으로 근무하던 조경연 중위는 목포 부두에 방치되어 있는 미군 AT-6형 항공기를 보고 해군 수상 정찰기로 쓸모가 많겠다고 생각하여 함장 박옥규 중령에게 자신의 생각을 보고했다. 함장은 조 중위의 생각과 계획을 정리하여 곧바로 해군본부에 보고하였고, 해군은 이 문제를 두고 미 군정 당국과 교섭을 벌인 끝에 한국 해군에서 교육 자료용으로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항공기를 인수하게 되었다.

  해군은 이 항공기를 함정 편으로 진해로 이송하였다. 항공기가 공창으로 옮겨지던 1951년 3월 13일, 조경연 중위도 해군 공창으로 전속되고 공창장의 도움으로 “항공반”이 조직되면서 수상 정찰기 제작에 착수했다.

  제작 착수 만 4개월여 만인 1951년 8월 15일 항공반은 마지막 단계로 수상착륙장치를 부착 완료하여 수상정찰기로 개조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8월 25일 진해 해군 통제부 항무과 부두에서 항공기의 명명식을 갖고 시험비행을 실시했다.

  ‘해취호’는 당시 한국 함대에 예속된 최초이자 유일한 항공기로서 취역 이후 함대의 해상경비 작전지원, 업무연락, 인원이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1951년 11월 22일 진해 ~ 포항간 해상정찰 임무를 마치고 악기상 속에 귀환하던 중 진해 앞바다에 추락하여 항공기는 수장되고 승무원 2명(조용익 소령, 박기수 대위)이 순직하였다.

  이 사고는 함대 항공대는 물론 해군 전체에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조경연 대위와 항공기 제작팀이 ‘해취호’ 추락의 충격을 극복하고 두 번째 항공기 제작에 착수하기까지는 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야 했다.

 

 

‘해취호’ 진수식 및 명명식

    2. ‘서해호(SX-1)’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성립된 직후, 항공반장이었던 조경연 대위는 ‘해취호’ 제작시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수상 정찰기 제작’을 위한 보고서를 손원일 제독에게 제출했다.

  손 제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함정국과 병기감실에 지시하여 항공반에 소정의 예산이 지원된다. 그리고 1953년 9월 15일 진해 해군 공창장은 조경연 대위를 항공기 제작에 관한 책임자로 임명하고 그해 10월 20일 2호기 제작을 위해 경험 많은 기술 문관 23명을 모집하여 항공반을 재조직했다.


  조경연 대위는 1954년 1월 공군에서 복무하던 배덕찬 중령으로부터 180마력짜리 L-5 경비행기 엔진을 무상으로 획득하고 병기감이 지원해준 재원으로 항공기의 동체 부분을 이루는 재료와 계기 등을 일본에서 구입해 들여왔다. 준비를 완료한 항공반 요원들은 ‘정학윤’이라는 훌륭한 기술 문관의 도움으로 항공기 동체 구조와 날개각도 등에 관하여 전문적인 조언을 얻고 ‘SX-1호’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SX-1호’의 첫 시험 비행은 1954년 6월 3일 진해만에서 정학윤 문관이 실시하였는데 항공기 부양 장치 부분과 무게 중심 문제로 인해 이륙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양륙하여 문제가 있는 부분을 수리하고 2회의 시험비행을 더 거쳐 ‘SX-1호’는 실무에 투입될 완벽한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명명식은 1954년 6월 14일 항무과 부두에서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해군 참모총장 박옥규 제독, 주한 미 항공대사령관 그리고 동남아 7개국 민족 대표자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항공기의 이름은 최초 “충해(忠海)” 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이 대통령이 적절하지 않다 여기고 직접 “서해(誓海)” 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이 충무공이 백의종군 할 당시 진중에서 읊은 한시의 한 구절로 이 대통령이 진해 별장에 머물면서 난중일기를 읽던 중 이름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후 ‘서해호’는 함대에 예속되어 일본 어선들의 평화선 침범을 감시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선(浮船)의 용접 부위를 비롯한 항공기 표면이 해수로 인해 점차 부식되면서 기체 수명이 단축되었다. 해군은 이듬해 5월 운항을 중지시키고 항공기를 해체하기로 결정하였다.

 

 

‘서해(誓海)호’ 

이승만 대통령 친필 휘호

    3. ‘SX-2’

       단발육상기 ‘SX-2’는 1955년에 항공반이 제작한 시험기였다. 일본 잡지에 실린 항공기를 본떠 제작한 것이어서 완성도에 한계가 있었고 성능 및 비행 가능성도 희박 했었다.

   첫 시험비행은 성공했으나 채 50미터를 비행하지 못하고 추락하여 결국 폐기되었으며, 조종을 담당했던 정학윤 소위가 크게 부상을 입기도 했다.

 

 

‘SX-2’



    4. ‘제해호(SX-3)’

       1950년대 중반 이후, 해군은 경비작전과 해상훈련이 급증함에 따라 수상 정찰기를 이용한 공중정찰, 대공표적예인, 대공 추적훈련 등의 지원 소요가 크게 증가하였다. 반면 ‘해취호’, ‘서해호’, ‘SX-2호’ 등 그간 제작된 해군항공기는 이미 추락ㆍ해체 등으로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항공반에게는 신규 항공기의 제작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국방예산에는 함정수리 항목만 배정되어 있었으며, 항공반에는 별도의 예산을 책정하고 있지 않았었다.

  항공기 제작이 난관에 봉착하자, 당시 참모총장 정긍모 제독은 항공반을 해군 과학연구소 제1연구부 항공과로 승격시키고 초대 과장에 조경연 소령을 임명하여 항공기 제작을 지원해 주었다.

  ‘SX-3호’의 제작을 결심한 조경연 소령은 부족한 부속을 구하기 위하여 부대원을 이끌고 한국전쟁 당시 비행기 잔해가 많이 남아있다는 설악산으로 향했으나 인근 부대원들이 잔해를 수거해 간 뒤라 소득은 전혀 없었다.

  잔해 탐색에 실패한 일행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육군 항공대가 위치한 춘천을 향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비행사고로 추락한 미군 항공기의 잔해를 상당수 모아놓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일행은 미 군사고문단에 교재용으로 사용하겠다는 양해를 구하고 항공기 엔진 4대를 무상으로 획득, 덕산 비행장으로 옮기고 마침내 1956년 말 ‘SX-3호’ 제작에 들어갔다.

  ‘SX-3호’는 적재중량을 크게 늘려 6인승으로 설계한 중형 쌍발 비행정으로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선박에 대한 감시효과를 증대하기 위하여 기총, 로켓 등 각종 무장의 장착이 가능토록 설계 되었다.

  ‘SX-3호’는 1957년 3월 30일 제작이 완료되었으며, 11기 해사 생도들의 임관식이 끝난 후 해사 비행장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항공기 명명식을 갖고 ‘제해(制海)호’로 명명되었다. 취역 후 ‘제해호’는 함대 항공대에 예속되어 남해안 일대의 해상감시와 함정엄호, 대공훈련(표적예신 및 추적)지원, 함포 탄착수정, 긴급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해호’는 후일 운영요원과 함께 해양경찰로 인도되어 제주도 서귀포 남방의 밀수선의 포착을 위해 해안선을 감시비행하고 복귀 도중, 해상에 불시착하여 통신망의 미비로 표류하다가 3일 만에 일본 어선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되었으나 탑승자 구조 후 항공기를 예인하는 과정에서 로프가 끊어져 수장되고 말았다.

 

 

‘제해호’ 설계도면

지상 계류 중인 ‘제해호’

    5. ‘통해호(SX-5)’

       ‘제해호’ 제작을 계기로 1957년 10월 12일 정식 발족한 함대 항공대는 추가적인 항공기 제작에 박차를 가하였다. 추락한 L-19 항공기의 잔해를 수거하여 기체를 수리, 춘천에서 획득한 항공기 엔진을 장착하는 한편 하부에 부주를 부착하여 1958년 10월 18일 SX-5호기를 제작 완료하였다. 함대 항공대는 단발 수상비행기 SX-5호에 “통해(通海)” 라는 이름을 붙였다.

  ‘통해호’는 ‘제해호’와 마찬가지로 함대 항공대 해체 이후 해경으로 이관되었으며, 후일 부주의 부식이 심각해짐에 따라 부주를 떼어내고 육상기로 개조되었다가 기체 노후로 해체되었다.

 

 

통해호

    6. L-19 항공기 1001ㆍ1002ㆍ1003호

       함대 항공대는 ‘통해호’ 제작에 앞서, 육군 및 공군으로부터 지원받거나 자체 제작한 부속을 이용하여 1958년 4월 23일 L-19 육상항공기 1대를 취역시키고 1001호기라 명하였다. 1001호기는 주로 업무연락이나 비행훈련 등에 활용되었다. 아울러 함대 항공대는 ‘통해호’ 제작 이후 L-19기종 1002, 1003호기도 제작하였다.

  이후 함대 항공대의 해체로 그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해군 항공에 대한 필요성 인식으로 1973년 재창설되어 지금의 해군6전단에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불멸의 항공정신과 개척 정신, 도전 정신은 지금 해군6전단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앞으로 미래의 해군 항공을 키워나갈 밑거름이 될 것이다.

 


Ⅳ. 맺은 말

    경연관이 들어선 지 1년이 지났다. 그 동안 경연관은 우리 부대의 훌륭한 교육 공간,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고 무엇보다 해군 항공의 역사를 말해주는 작지만 의미 깊은 역사관으로 거듭났다.

  우리 부대를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연관을 둘러보며 초기 해군 항공의 위업을 알게 된다. 나 또한 그 곳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

  有에서 無를 창조한 그 분들의 피와 땀이 지금 여기에 흘러 이 같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 분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해군의 주력 부대로 거듭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땅속 깊이 박고 그 위에 아름드리 나무를 키워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늘을 바라 볼 때 그것은 그냥 하늘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꿈이고 희망이다. 그 꿈과 희망을 얹고 오늘도 조종간을 잡고 계기판을 확인하며 미래를 향해 시동을 건다.

 

출처: http://brd3.chosun.com/brd/view.html?tb=BEMIL064&pn=1&num=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