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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리포트] (5) ‘학벌’ 신분사회

鶴山 徐 仁 2006. 12. 17. 16:43

 

프랑스에 대해 우리가 정확하지 못한 선입견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가 사회 시스템이다. 자유·평등·박애를 국시(國是)로 내세우고 있는 만큼 모두가 차별없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모든 사람이 균등한 기회를 누리는 평등한 사회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 프랑스는 철저한 신분사회다.21세기에 인도도 아니고, 사회민주주의의 본산인 프랑스를 ‘신분 사회’라고 단정하는 것에 반박할 사람도 많겠지만 실상이 그렇다.

▲ 이공계 최고의 명문 그랑제콜인 에콜폴리테크니크의 졸업식 장면.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사회에서 최고의 엘리트로 대접받는다.
에콜폴리테크니크 제공

소수의 엘리트들이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의 지도층을 구성하고,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이 중간층을 구성한다. 그 아래는 사회 안전망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노약자와 극빈층, 그리고 외국의 이민자들로 구성된다.

능력만큼 대접받는다

프랑스 사회를 특징짓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메리토크라시(meritocratie)’다. 대혁명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부(富)와 특권을 일부 계층이 세습하는 데 대해 많은 비판이 오갔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합의가 바로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도록 한다는 메리토크라시였다.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판가름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을 것이나 프랑스에서는 학력을 가장 공평한 기준으로 간주한다. 개인의 성취도를 학력으로 평가하고,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다른 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 프랑스의 엘리트 시스템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소수 정예로 선발해 가르치고 훈련시켜 등용한다는 점이다.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을 배출하는 고등 교육기관이 그랑제콜(Grands Ecoles)이다. 프랑스의 고등교육 체계는 아주 독특하고 복잡한데 영미식 고등교육제도에 견줘 가장 큰 차별성을 보이는 부분이다.

프랑스의 그랑제콜들은 대부분 대혁명 이후인 18∼19세기 세워졌다. 인문계, 자연계 구분없이 전 분야에 걸쳐 공·사립 학교가 전국에 수백 군데 분산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인문계의 고등사범학교(ENS)와 이공계의 에콜폴리테크니크(X)는 최고의 수재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200년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자존심’ 에콜폴리테크니크의 엘리자베드 크레퐁 부총장은 “프랑스의 고등교육은 사회를 이끌어갈 고급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그랑제콜과 대중적인 고등교육을 위한 일반 대학으로 이분화된 것이 특징”이라며 “대학과 그랑제콜은 기본적으로 지원 자격, 선발 방법, 교육 방법이 다르고 졸업 후의 역할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전문화·서열화된 학벌 카스트

일반 대학은 대학입학 자격 시험(바칼로레아)만으로 무시험 진학하는 데 반해 그랑제콜은 국가가 실시하는 시험(콩쿠르)을 거쳐야만 입학이 허용된다. 선발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바칼로레아 후 2∼3년간의 그랑제콜 준비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준비 과정은 전국 480개 고등학교에 설치된 그랑제콜 준비반(CPGE)에서 이뤄지는데 이곳 역시 고교 2년 말 학교성적이 5∼10%에 들어야 한다.

이들은 최하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그랑제콜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출세가 보장된다.

ENS나 에콜폴리테크니크 같은 국립 그랑제콜의 경우 학생들에게 월급까지 주며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킨다. 졸업생들은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로 대접받으며 많은 특권을 누린다. 졸업과 동시에 주요 부처의 관료로 임명돼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거나, 국·민영 기업체의 간부로 스카우트돼 곧바로 현장에 투입된다.

학교 순위에 따라 연봉도 다르다. 이공계 최고의 명문 에콜폴리테크니크 출신의 첫해 연봉은 3만 8000유로(4700만원 정도), 상공계 최고의 명문 고등상과대학(HEC) 졸업자 초봉은 4만유로(5000만원) 정도다.

이들 학교의 졸업 학위는 일반 대학의 석·박사 학위와는 다르다. 대학 졸업장은 고등학교 졸업장 정도로 보면 된다. 프랑스에서는 대학을 나와봐야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 없다. 대학의 박사학위도 그랑제콜 졸업장과는 비교가 안 된다.

프랑스의 그랑제콜 졸업장은 우리나라의 고시 합격증과 비슷한 수준이다. 평생을 좌우하는 명함이나 다름없다.

그랑제콜 졸업생들이 행정부로 진출하는 경우 이들은 각각 출신 학교별로 특수한 관료집단을 형성한다. 각 특수 관료집단은 고유의 호봉체계와 승진규정을 갖고 요직을 독식한다. 이들은 정·재계와 연결되어 정치인이 되거나 장·차관이 되고, 혹은 대기업의 사장이 된다. 해당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특수 관료집단에 편입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사회갈등 유발?

프랑스인들 대부분은 그랑제콜 출신들은 평등한 기회가 주어진 상황에서 남들보다 훌륭한 능력을 보였으며, 이들 선발된 인재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최근 들어 많이 바뀌고 있다. 소수의 엘리트교육에만 치중하다 보니 대학 수준이 형편없이 떨어져 교육불균형을 초래한다는 비판과 함께 지나친 학연 중시와 파벌조성, 그리고 사회 저변과의 큰 괴리 등 문제점도 지적된다.

최근 들어서는 학력에 의한 ‘부의 세습’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그랑제콜 출신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 다시 그랑제콜에 가고, 또 그 자손이 그랑제콜을 나오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 시스템이 프랑스를 서유럽의 중심국가로 만들고, 눈부신 성장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한경쟁의 글로벌 시스템에서 조금씩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lotus@seoul.co.kr

■ 국립행정학교 ENA는

프랑스의 국립행정학교(ENA)는 정치행정 엘리트의 산실이다.2차대전 직후인 1945년 당시 드골 총리가 프랑스의 행정 인재를 발굴해 훈련시킨다는 취지로 만들었다.

국립정치학교(시앙스포)나 고등사범(ENS) 등 그랑제콜 출신 학생들이 다시 경쟁시험을 거쳐 들어간다. 일반직 공무원으로 일정기간 이상 근무한 사람, 유럽연합(EU) 회원국의 공무원, 일반 기업체의 관리들에게도 일정 비율 입학을 허용하고 있다. 외국인 공무원들을 위해 13개월간의 단기 연수과정도 마련돼 있다.

학생들은 27개월 동안의 집중 교육을 받는데 이 중 11개월은 지방 행정원에서,2개월은 기업에서 연수한다. 특이한 점은 교육기간 중 성적에 따라 발령부처가 달라진다는 것. 때문에 정·재계 진출의 기회가 많고 중요한 정책을 관장하는 부처에 배속돼 출세가도를 달리기 위해서는 시험합격 이후에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NA는 지난 60년간 5585명을 배출했으며 이 중 4551명이 아직도 활동 중이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이 학교 출신이며 알랭 쥐페 전 총리, 도미니크 드 빌팽 현 총리 등 최근 10명의 총리 가운데 7명이 이 학교를 나왔다.2007년 대권에 도전하는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과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당수 부부는 드 빌팽 총리와 ENA 동기생들이다. 통상적으로 정부 각료의 35∼50%가 ENA 졸업생으로 채워지며 현재의 각료 31명 중에서도 8명이 ENA 출신이다.

유능한 행정관료를 배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폐쇄적인 엘리트주의는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 된다. 지난봄의 정적 음해사건(클리어스트림스캔들)과 관련,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은 “ENA 출신의 폐쇄성은 정책의 불투명성을 증가시켰으며 밀실정치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기사일자 : 2006-11-17    10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