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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모교 초청 강연을 다녀와서 / 정소성

鶴山 徐 仁 2006. 12. 10. 10:25

 

 

 

 "대구 모교 초청 강연을 다녀와서"

 

                                                                                                                     - 정소성 -

 

11월 22일(수) 새벽, KTX를 타고 모교가 있는 대구로 향했다.
두어 달 전부터 예약이 되어있던 모교 초청 강연을 하기 위해서 였다. 대구를 떠난지 42년, 깊은 감회가 가슴을 적셔왔다. 달리는 기차 칸 안에서, 대구에 남아 있는 몇몇 동기생들과 윤종룡 선배님에게 전화를 했다. 윤 선배는 회의중이라 비서에게 메시지만을 남겼다.

동대구 역에서 택시를 달려 모교에 이르니, 총동창회 사무국장 김갑동 선생님이 나와 계시고, 이어 박정수 교장 선생님도 나오셨다. 나의 모교 2년 후배였다. 이어서 손병조 교감선생님도 운동장에서 만났다. 중학교 교장을 대신하여 박명호 교감 선생님이 나오셨다. 거교적인 환영이었다.
학교 정문에는 <소설가 정소성 교수 모교 강연 환영>이라는 플랭카드가 걸려 있었다.
대구 광역시 교육위원으로 있는 동기생 유영웅도 도착을 했고, 동기생을 대표하여 허철 동문도 나타났다. 허철은 박정수 교장선생님과 경북사대 수학과 동기생이었다.
대구매일에 오래 근무했던 여정웅 동기와 경산신문사 발행인 서재건, 동기회 회장인 이건춘 동문이 온다는 것을 극구 말렸다. 학교 측의 공식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우리 동기생들이 너무 많이 와도 사실 조금 곤란한 형편이었다.

교장실에서 잠시 담소하다가, 역사관으로 들어가 관람하였다.<모교를 빛낸 인물>이라는 전시물 속에 나의 이름도 있어서 퍽 쑥스럽고 또 미안했다. 역사관 건물은 옛날 중학교 교무실이 있던 바로 그 담쟁이 건물인데, 나는 자꾸만 그 때 당시 같이 공부했던 동기 여학생들이 생각이 났다. 그 예쁘던 어린 여학생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지금 환갑 진갑 넘긴 할머니가 되었을 것은 틀림이 없는데, 지금도 그렇게 예쁠까...
“모교가 그렇게 가보고 싶고 그리운 것은 우리가 중학교 때 공학을 한 탓이 아니었을까요?”
나는 옆에 계시는 박 교장에게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지금은 고등학교까지 공학입니다.”
“거참, 모교가 더 아름다운 꿈의 동산이 될 것입니다.”
재경 우리 동기생(15.12)들은 일년에 한번씩 송년회를 가져 만나고 있다. 주소록을 만들어 주로 경조사를 돕고 있다. 나는 여기 모임에서 사귄 분들 중에서 한 두분 여성 동기생들에게 대구 모교 초청강연을 알린 적이 있었고 동기회 홈페이지에 나의 모교 강연 소식이 떠 있다고 한다. 그 여성 할머니 동기생들로부터 강연 잘 하시고 오라는 격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교장, 교감, 김갑동 선생님의 안내로 강당으로 들어갔더니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박수를 쳐 나를 환영하였다. 42년 전 두터운 안경을 낀 작은 키의 부고생 정소성이가 저쪽 한 구석에서 박수를 치는 것 같았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나를 너무 친근하게 대하는 것같아 조금 놀랐다.

강단으로 향하는 짧은 순간 김갑동 선생님이 그런 분위기를 설명해 주었다. 사실은 2005년도에 내가 발간한 졸작 장편 소설 <바람의 여인>(실천문학사간행)을 모교에서 200 권 구입하여 전교생이 돌려가며 읽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2005년도에 한국예술문화진흥위원회에서 우수문학도서로 뽑혀, ??판사가 2천만원의 지원금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진흥위원회에서 지원대금으로 소설을 2 천권을 사서 전국 고교에 뿌린 모양이었다. 나의 책이 모교에 알려진 동기가 이것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의 저자가 동문이라 하여 초청한 것이었다.

단상에 서신 교장 선생님이 나를 과분하게 소개하였다. 이윽고 나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30분간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20분간 교육적인 이야기를 했다. 김갑동 선생님의 부탁대로 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인간의 파괴적인 요소에 저항하는 인간의 영원한 힘, 즉 사랑을 증언하고 예찬하는 데 있다. 소설의 소재는 6.25 사변이고, 대 전쟁의 참화 속에서 꽃피는 두 남녀 어린이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것이다. 그들은 모진 운명의 덫을 이기고 3,40년이 지난 지금도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소설은 되어 있다.
강단에 선 나를 보고 학생들은 마구 웃어댔다. 나는 공부만 하지 말고 연애도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하하 거리면서 박수를 쳤다. 옛날 내가 부고생일 때는 초청연사가 조금 탈선된 말을 하다가 김판영 교감선생님의 의해서 하단되었던 기억이 있다. 나도 박정수교장 선생님에 의해서 하단될까봐 걱정되었으나, 다행이 내려오라는 말씀은 하지 않았다.

내가 모교에서 맺은 인연이 일생 얼마나 나의 인생을 지배했는가를 말했다. 이성조 교감선생님은 당시 경기고교 교장으로서 나를 대학에 교수로 심기 위해 백방으로 고생하셨고, 2학년 때 담임이시던 이재철 선생님은 지방 대학에 있던 나를 서울로 당겨주셨고, 주미 대사인 일년 후배 이태식은 서울대문리대 재학시 자신의 등록금으로 나를 등록 시키고 자신은 일년 휴학했다는 이야기, 대학원 4번 등록금을 전부 지원해준 동기생 송무광 이야기, 일년 선배 윤종룡 삼성전자 부회장께서는 최근 내가 전국교수작가회의 회장이 되고 인사차 찾아간 나에게 상당금액의 후원금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의 나는 나의 서울대 인맥에 못지 않게 대구 모교의 인맥이 작용한 것같다고 했더니 다들 박수를 쳤다. 나는 서울문리대 64학번 입학생들의 모임인 마로니에회(600명)의 회장 노릇을 10년 째 하고 있다.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이상하게도 대학인맥보다도 고교인맥인 것같다고 솔직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말했다. 서로들 깊이 진실하게 사귀고 사심없이 대화하여 우정과 사랑을 쌓으라고 했다. 큰 박수를 받았다.

강연을 마치고 다시 교장실에 들려, 가지고 온 소설 열 권 정도를 기증하였다. <소설 대동여지도>(5권),<안개 내래는 강>(2권), <두 아내>(2권), <태양인>(2권) 등이었다. 내가 발간한 서른 권 정도의 장편소설들 중에서, 대구와 나의 고향 봉화를 무대로 쓴 것들만 골라 뽑은 소설들이었다. 도서관에 기증했다.
운동장으로 나와 나의 환영 플랭카드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중학교 정화자교장 선생님이 귀실하셨다는 전갈이 와서 잠시 교장실로 찾아 뵙고 인사드렸다. 동문은 아니었으나 나의 부중 여학생 동기들과 같은 해 경북여고를 나오신 분이었다. 두 교장 선생님, 손 교감선생님, 깁갑동 선생님과 함께 예약된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옛날 대구형무소가 있던 자리에 위치한 조촐한 한식당이었다. 오래간만에 고향음식을 먹으니 맛이 있었다.

아쉬움과 감사의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노모가 계시는 서대구 누님댁으로 가서 잠시 노모를 뵈었다. 피곤하여 잠시 눈을 붙였다. 지난밤 서가에서 대구로 가져갈 오래 전에 출판된 소설들을 찾느라 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던 탓이었다.

나의 부고 시절 짝꿍이던 김영배가 찾아왔다. 퍽 늙어 있었다. 영배는 친구로서 보건데 머리가 아주 우수한 녀석이었다. 우연하게 학원가에 발을 들여놓은 탓으로 공식적으로 무슨 업적을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돈을 꽤 벌었느나 자신이 직접 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털털이가 되었다고 허허거렸다.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는 허물없이 컨닝하고 여학생 꼬시고 학교에서 도망쳐나와 극장 가고 하던 짝꿍이란 것이 있다. 영배가 바로 그런 녀석이었다.  우리둘은 그야말로 고교 졸업 후 한 두 번 우연히 동창회에서 만나고 거의 만나지 못했다. 단 둘이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서울 대구가 코 앞인데 그런 일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케이불카를 타고 팔공산 정상으로 올라가 막걸리를 마셨다. 경북대학교를 지나면서 최용호 선배가 생각나 전화해서 인사드렸다. 이제 마지막 가는 팔공산 단풍이 아름다웠다. 어둠 속에 잠겨가는 대구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깊은 감회가 가슴을 메구어왔다. 이제 소설을 쓰면 얼마를 더 쓸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생각만을 했다. 대학의 선생인 나는 전업 작가가 아니다. 그래서 나의 문단에서의 활동에는 어느 정도 제약이 있다. 대학의 선생인 내가 창작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불문학이 전공인 나는 창작 못지 않게 불어와 불문학도 연구하여야 한다. 몇 번이나 대학교수직을 도중에 하차하려 했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대학에 사표를 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사로 잡았다. 여기 팔공산 중턱에 서재를 지어놓고 최후의 순간까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경주 남산을 답사했는데, 세조의 졸개들에게 쫓긴 김시습이 남산 정상인 금오산에 숨어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다는 절터를 찾았다. 부귀공명을 다 누리고 좋은 소설을 쓸 수는 없다...
영배가 동대구역까지 나와 주었다. 나는 영배 마누라 갖다주라고 황남빵 한 박스를 쌌더니, 녀석도 내 마누라 주라고 같은 것을 사주었다. 개찰구를 나서면서 녀석의 손을 잡았더니 순간적으로 눈에서 뜨거운 것이 ??구쳤다. 이번 여행에서 그 많은 은사님들이 거의 다 돌아가신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럼 우리들의 여생은...최근에 떠난 윤인우와 백승해와 김준원이가 생각났다. 녀석들 뭐가 급하다고...

기차가 막 출발하려는 찰나, 헨드폰 벨이 울려 받았더니 윤종룡 선배가 나오셨다. 강연 잘 했느냐고 물으셨다. 모교 환경이 아주 나빠졌다는데 잘 보았느냐고 물으셨다. 옛 상고 자리가 헐려 버리고 거기에 거대한 타워팰리스가 들어서서 학생들의 시야가 막혀 버렸고 학교 꼴이 말이 아니었다. 대구에서 모교에 배정되면 학부모와 학생 자신이 운다고 한다. 성적이 너무 부진해 좋은 대학에 가기 틀렸다는 것이다. 영남 수재의 거대한 산실이 정부 정책으로 여지 없이 몰락하고 만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변화하는 세월 속에서 우리는 속절없이 늙어갈 뿐인가.

대전을 지나면서 이재철 교수님(76)에게 전화를 드렸다. 강연을 잘 했느냐고 격려의 말씀을 하셨다. 지난 9월에 20여개국에서 대표가 참석하는 세계 아동문학자대회를 주최하시고 쉬시고 있다. 너무 힘드신 일을 하신 것 같다.

귀가하니 9시였다. 몸은 피로하지 않았으나 정신이 퍽 피곤하여 그대로 쓰러졌다. 오늘 하루 나를 환영해준 대구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1. 정소성 동기의 강연 장면-1

 


2. 정소성 동기의 강연 장면-2

 


3. 강연을 경청하는 모교 재학생(高) 후배들

 


4. 강연후 附中, 附高 교장 선생님과 촬영

 

 

< 글출처 : 서울군성회 홈페이지, 사진출처 : 모교 김갑동 동창회 사무국장 >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재경동기회
글쓴이 : 카페지기(여정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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