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이승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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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산 억새꽃밭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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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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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호수 주차장에서 내려 등산로 입구에 들어서자 무장한 군인 한 명이 안내를 한다. 오늘은 사격훈련이 있는 날이니
팔각정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 된 셈이다. 모처럼 마음먹고 명성산을 찾은 날은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12일이었다.
등산로는 몇 곳이 있었지만 오르기가 가장 편안한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거쳐 억새밭 평원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삼각봉을 거쳐 정상까지 오를 계획이었다. 입구에서 잠깐 올라가자 등룡폭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름만 폭포지 시원한 물소리나 쏟아지는 물줄기는 보고 들을 수 없었다.
한 달 이상이나 가뭄이 계속되어 골짜기의 물이 거의 고갈상태였다. 폭포의 바위절벽은 평소에는 썩 볼만 했었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 바위절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은 어른 몇 사람의 오줌줄기에 비유될 만큼 아주 작은 양이다. 그것도 맑은 물이 아니라 흙탕물이다.
역시 근처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에게 물으니 어젯밤에 비가 내려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발밑의 흙이 약간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단풍을 기대했던 올가을의 단풍은 너무 오랜 가뭄으로 예년보다도 훨씬 볼품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길에서 만나는 나무들 대부분이 노랗고 빨간 고운 단풍은 보기 어렵고 그냥 푸석푸석 말라버린 잎들이 그대로 낙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어젯밤 비가 조금이라도 내렸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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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넓은 산자락을 온통 뒤덮은 억새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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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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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꽃 색깔이 조금 다른 것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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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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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하늘에서 요란한 헬리콥터 소리와 방송이 들리기 시작했다. 산불방지를 위해서 산림청에서 나온 것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방송하는 소리를 소음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군부대에서 사격훈련을 알리며 위험지역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방송인 것 같았다.
길 옆 오른편은 군에서 쳐놓은 철조망이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갔을 때 갑자기 바로 발밑에서 터지는 듯하는 포사격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니 우리일행들 뒤를 따르던 여성등산객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설마 이쪽으로 대포알이 날아오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켰지만 계속해서 쿵쾅! 따따딱! 울리는 사격소리가 바로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것 같아 공포감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떤 등산객들은 서둘러 내려가는 모습도 보인다.
등산로는 완만한 흙길이어서 별로 힘도 들지 않고 감촉이 좋다. 조금 익숙해진 사격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올라가자 거짓말처럼 시야가 툭 트이며 억새꽃 평원이 펼쳐졌다. 비스듬한 산자락 가득히 하얀 억새꽃이 흐드러진 모습을 보자 일행들이 입을 딱 벌린다.
"히야! 장관이다. 이 산 속에 이런 곳이 있었네."
"정말 대단하구먼, 자 우리들도 사진 좀 찍자고."
경치 좋은 곳을 발견하면 한 컷의 사진으로라도 남겨놓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인 모양이다. 먼저 도착한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좋은 곳을 찾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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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꽃 숲에들면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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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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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목화솜처럼 하얗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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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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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에 누가 있어
이 산록에 누가 있어
흰머리 풀어헤친 그 사연을 들어줄까
찬이슬 황량한 바람
산허리를 휘감아 돌 때
들리는가, 보이는가, 애절한 그 울음이
천 년 세월 가을마다
회한과 슬픔으로
하얗게, 새하얗게 사위어간 욕망이며
반세기 전 그 포성과 총소리
아직도 변함없이 귓전을 때리는데
누군지도 모른 채, 죽이고 죽은 수많은 젊은 넋들
억새꽃 평원에서
마음의 귀 기울이면
가슴 속까지 울려오는 저 흐느낌 소리
억울함과 외로움에 잠 못 이루고
깃들지 못하고 맴도는 바람을 따라
한 줄기 혼불을 놓아 흔들리는 꽃이리.
- 자작시 <명성산 억새꽃>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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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와 단풍과 숲의 어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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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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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밭에 이름모를 꽃도 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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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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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평원 중심부의 평평한 곳은 어른들의 키보다도 크게 자란 억새들이 목화솜처럼 새하얀 꽃을 피워 황홀한 풍경이다. 약간 경사진 양쪽 산자락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키도 작고 꽃의 색깔도 조금 옅은 흰색이다. 그렇게 흐드러진 억새평원은 한쪽 산자락을 완전히 뒤덮은 채 주변의 나무들과 어울려 정말 기막힌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억새꽃 평원 가운데로 열린 길을 따라 팔각정 쪽으로 올라가자 오른 편에 약수터가 나타났다. '천년수(千年水) 궁예약수'다. 안내판에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적혀 있는데 약수는 말라 있었다. 이 약수는 물맛도 좋은데 고려조 이전에 태봉을 세웠던 궁예가
태조 왕건에게 쫓기다가 이곳에서 머물 때 마시던 약수라고 전한다.
이 명성산이라는 이름도 바로 그 궁예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궁예는 왕건에게 쫓기다가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는데 그 자신이 처량하여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그 슬픔이 얼마나 깊고 컸던지 따르던 신하들과 말까지 함께 울었는데 그 울음소리가 온산을 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 이름을 울음산이라고 하였는데 한문자로 같은 뜻의 명성산(鳴聲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 억새꽃 평원도 본래는 삼림이 울창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6·25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수많은 격전이 벌어져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때 이 산이 완전히 포탄으로 초토화되어 억새밭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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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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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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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동산의 이방인 같은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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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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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 억새밭 사연이 참 많구먼, 궁예의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고, 전쟁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그 흘린 피가 억새꽃으로 피어난 것이잖아."
그랬다. 처음에는 대단한 영웅이었던 궁예가 태봉이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말년에 방탕하여 신하였던 왕건에게 쫓겨 들어와 이곳에서 죽었으니 그 한이 오죽했겠는가.
6·25 한국전쟁 때는 뺏고 빼앗기는 공방을 벌이는 동안 피아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 서로 무슨 나쁜 감정이나 원한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그러나 전쟁은 그들을 서로 죽이게 만들었다.
참 아까운 젊음들이 이 억새평원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다가 부모형제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은 그 젊은이들의 원통함과 슬픔을 어떻게 말이나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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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각정으로 오르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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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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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이슬과 황량한 바람이 부는 명성산의 산자락을 하얗게 뒤덮은 이 억새꽃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 기억하고 있을까. 천 년 전 그 궁예의 슬픔과 반세기 전의 그 전쟁 중에 이름 없이 피 흘리며 스러져간 젊은 넋들을….
팔각정에 올라 둘러보는 억새꽃 평원은 좀처럼 보기 드문 아름다운 모습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 등산을 포기하고 자인사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서는 억새꽃들이 토해내는 속 깊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승철 기자
덧붙이는 글
명성산 가는 길
승용차: 의정부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포천을 지나 산정호수 가는 길 이정표를 따라 가면 됨.
대중교통: 수유역에서 와수리, 동송행 버스 타고 '운천' 하차
동서울터미널 신철원, 김화행 버스'운천' 하차
운천터미널에서 산정호수까지 시내버스 30분 간격 운행(15분소요)
의정부역에서 138-6 번 좌석버스를 타면 산정호수까지 갈 수 있음(단, 차편이 많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