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백유선 기자]
나는 차(茶)를 잘 모른다. 물론 즐겨 하지도 않는다. 그저 차라고 하면 커피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도 자판기 커피. 그러니 차를 안다고 하기 어려울 수밖에….
지난해 이른 봄, 서산의 한 선원(禪院)에 들른 적이 있다. 겨울 참선 수행기간이 끝나고 스님들이 떠나버린 큰 선원. 혼자서 선원을 지키고 있던 스님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유난히 차를 좋아하는 이 스님은 직접 물을 데워 차를 끓여준다. 마시는 법도 익숙지 않아서 스님이 하는 대로 따라 마셨다.
한 잔 마시고 나니 스님은 다시 빈 잔을 채워준다. 또 마시고 나면 채워주고. 찻잔이라고 해야 양이 겨우 한 입 정도밖에 안 되어서 대여섯 잔정도 마신 것 같다. 그제야 나는 차는 이렇게 계속 채워가며 마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화가 즐거워서인지 차 맛은 생각나지 않는다. 스님이 좋은 차임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정성스러운 대접이 고마워서 그저 맛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렇게 난 차를 모른다.
가끔 즐기는 차도 있다. 다름 아닌 '곡차'. 불가의 고승들 중에는 술을 곡차라고 부르며 즐기는 분들도 있었다. '곡식을 빚어 만든 차'라는 뜻이니 곡차라는 말은 스님들의 재치가 느껴지는 단어다. 깨달음을 추구하며 수행을 생활로 하는 스님들의 여유라고나 할까. 물론 스님들은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계율에 어긋나는 일이니.
다원, 차를 모르던 내게 성큼 다가서다
향과 빛깔로 맛을 느끼며 마음을 다스린다는 차. 그 차나무를 재배하는 보성의 차밭(다원, 茶園)에 다녀왔다. 지난 추석, 성묘 후 갑작스레 찾게 되었다. 차라고는 커피와 곡차밖에는 몰랐는데. 차밭이라….
보성의 녹차 밭, TV 광고나 영화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사진작가들의 주요 촬영대상이 되는 곳. 사진이나 TV에서 보면서 그 풍경에 늘 감탄했다. 하지만, 전남 보성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어서 직접 가 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늘 환상적인 사진 속 풍경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언젠가는 꼭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추석 성묘를 갔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멋진 차밭 풍경이 날 유혹했다.
곧바로 차밭 행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새로 구입한 내비게이션의 힘이 컸다. 지난여름 남쪽 지방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몇 차례의 실수로 낭비한 시간이 아까웠다. 쉽지 않은 먼 답사 길인데 길을 잘못 찾는 실수로 1~2시간을 허비한 일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답사 후 곧바로 내비게이션을 마련했다.
해왔던 공부가 우리 역사인지라 성묘 길은 늘 답사 길이다. 서울에서 본가인 광주까지 가는 길, 또 광주에서 조상 묘가 있는 전남 장흥까지 가는 길이 성묘 길이다.
특히 광주에서 장흥까지 가는 길 근처에는 문화유산이 많다. 화순의 조광조 유배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비한 사찰인 운주사, 목탑과 부도로 유명한 쌍봉사, 세계 문화유산인 화순 고인돌군, 현 조계종의 뿌리인 신라 말 선종사찰 장흥 보림사 등이 주로 들렀던 곳이다.
이번 성묘 길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랜만에 또다시 보림사나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림사는 오래전 고인이 된 할머니가 나를 위해 기도한 곳이어서 더 애착이 가는 장소다. 그런데 갑자기 보성의 차밭 풍경이 떠올랐다.
해마다 세 번씩 성묘를 가면서도 그동안 보성의 차밭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야 한다는 점과 아주 멀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을 통해 보성의 차밭이 조상 묘에서 겨우 1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묘 후 곧바로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들판을 가슴 가득 담으며 내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르다 보니 어느새 차밭 모습이 보인다. 주차장을 비롯해 입구가 잘 정비되어 있다. 보성의 차밭은 이미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안내문을 보니 보성의 차밭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알려진 '대한다원'이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이다.
대한다원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여느 관광지처럼 입장료(1600원)까지 받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에서 얻는 수입보다 입장료 수입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녹색과 곡선이 어우러진 향기로운 수채화
입구의 삼나무 숲길은 마치 산림욕장 같은 모습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예고편. 이윽고 나타난 차밭 모습은 새로운 세계다.
녹색과 곡선이 어우러진 풍경이 산등성이까지 펼쳐져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모습.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신선함.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라 그런 느낌이 더 강했을 것이다.
천천히 걸으며 차 향기를 느껴본다. 물론 차나무에서 차 향기가 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차향으로 가득하다. 이 풍광을 가슴 가득히 담기에는 아직은 더운 날씨. 뜨거운 햇볕은 차밭의 아름다움을 상상했던 것만큼 충분히 느끼는 것을 방해한다.
이곳을 찾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5월 전후, 처음으로 차를 따는 시기라고 한다. 녹색의 물결이 절정에 달하는 때다. 이미 차 수확이 끝난 10월, 녹색의 찻잎은 많이 노쇠한 듯 검은 빛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차나무의 행렬은 여전히 새롭고 시원한 느낌이다. 아마도 차를 즐겨 마시며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그 느낌을 가슴 가득히 품고 음미했을 것이다. 먹지 않고도 배가 부른 그런 느낌이겠지.
차밭을 구경하며 최근 몇 년 사이에 성묘 문화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찌 보면 성묘 그 자체에 충실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성묘와 함께 자연과 역사를 느끼는 것이 문화가 됐다는 생각이다. 혹시 나만 그런지도….
근처 두 곳의 차밭을 더 구경하고 나니, 멀리 바다가 보인다. 아이들은 차밭의 풍광보다 더운 날씨가 싫단다. 이 녀석들을 보니 눈앞에 보이는 바다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아이들을 생각하다가 보니 어느덧 차는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건만, 차를 모르는 내게도 보성의 차밭 풍광은 새로운 세계에 다녀온 느낌으로 여전히 눈앞에 선명히 남아 있다. 기회가 되면 좋은 계절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신비함이 극에 달해 보일 것 같은 아침녘 산보. 역시 꼭 해보고 싶다. 운무에 쌓인 골짜기 사이를 녹차 향 실린 맑은 공기와 함께하는 상상. 참으로 즐겁다.
/백유선 기자
▲ 보성의 차밭. 여기는 여전히 녹색이다. |
ⓒ2006 백유선 |
지난해 이른 봄, 서산의 한 선원(禪院)에 들른 적이 있다. 겨울 참선 수행기간이 끝나고 스님들이 떠나버린 큰 선원. 혼자서 선원을 지키고 있던 스님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유난히 차를 좋아하는 이 스님은 직접 물을 데워 차를 끓여준다. 마시는 법도 익숙지 않아서 스님이 하는 대로 따라 마셨다.
한 잔 마시고 나니 스님은 다시 빈 잔을 채워준다. 또 마시고 나면 채워주고. 찻잔이라고 해야 양이 겨우 한 입 정도밖에 안 되어서 대여섯 잔정도 마신 것 같다. 그제야 나는 차는 이렇게 계속 채워가며 마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화가 즐거워서인지 차 맛은 생각나지 않는다. 스님이 좋은 차임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정성스러운 대접이 고마워서 그저 맛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렇게 난 차를 모른다.
가끔 즐기는 차도 있다. 다름 아닌 '곡차'. 불가의 고승들 중에는 술을 곡차라고 부르며 즐기는 분들도 있었다. '곡식을 빚어 만든 차'라는 뜻이니 곡차라는 말은 스님들의 재치가 느껴지는 단어다. 깨달음을 추구하며 수행을 생활로 하는 스님들의 여유라고나 할까. 물론 스님들은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계율에 어긋나는 일이니.
▲ 보성의 차밭(대한다원, 이하 같음) |
ⓒ2006 백유선 |
향과 빛깔로 맛을 느끼며 마음을 다스린다는 차. 그 차나무를 재배하는 보성의 차밭(다원, 茶園)에 다녀왔다. 지난 추석, 성묘 후 갑작스레 찾게 되었다. 차라고는 커피와 곡차밖에는 몰랐는데. 차밭이라….
보성의 녹차 밭, TV 광고나 영화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사진작가들의 주요 촬영대상이 되는 곳. 사진이나 TV에서 보면서 그 풍경에 늘 감탄했다. 하지만, 전남 보성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어서 직접 가 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늘 환상적인 사진 속 풍경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언젠가는 꼭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추석 성묘를 갔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멋진 차밭 풍경이 날 유혹했다.
곧바로 차밭 행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새로 구입한 내비게이션의 힘이 컸다. 지난여름 남쪽 지방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몇 차례의 실수로 낭비한 시간이 아까웠다. 쉽지 않은 먼 답사 길인데 길을 잘못 찾는 실수로 1~2시간을 허비한 일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답사 후 곧바로 내비게이션을 마련했다.
▲ 보성의 차밭 |
ⓒ2006 백유선 |
특히 광주에서 장흥까지 가는 길 근처에는 문화유산이 많다. 화순의 조광조 유배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비한 사찰인 운주사, 목탑과 부도로 유명한 쌍봉사, 세계 문화유산인 화순 고인돌군, 현 조계종의 뿌리인 신라 말 선종사찰 장흥 보림사 등이 주로 들렀던 곳이다.
이번 성묘 길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랜만에 또다시 보림사나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림사는 오래전 고인이 된 할머니가 나를 위해 기도한 곳이어서 더 애착이 가는 장소다. 그런데 갑자기 보성의 차밭 풍경이 떠올랐다.
해마다 세 번씩 성묘를 가면서도 그동안 보성의 차밭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야 한다는 점과 아주 멀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을 통해 보성의 차밭이 조상 묘에서 겨우 1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보성의 차밭 |
ⓒ2006 백유선 |
대한다원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여느 관광지처럼 입장료(1600원)까지 받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에서 얻는 수입보다 입장료 수입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녹색과 곡선이 어우러진 향기로운 수채화
▲ 대한다원의 삼나무길 | |
ⓒ2006 백유선 |
녹색과 곡선이 어우러진 풍경이 산등성이까지 펼쳐져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모습.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신선함.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라 그런 느낌이 더 강했을 것이다.
천천히 걸으며 차 향기를 느껴본다. 물론 차나무에서 차 향기가 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차향으로 가득하다. 이 풍광을 가슴 가득히 담기에는 아직은 더운 날씨. 뜨거운 햇볕은 차밭의 아름다움을 상상했던 것만큼 충분히 느끼는 것을 방해한다.
이곳을 찾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5월 전후, 처음으로 차를 따는 시기라고 한다. 녹색의 물결이 절정에 달하는 때다. 이미 차 수확이 끝난 10월, 녹색의 찻잎은 많이 노쇠한 듯 검은 빛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차나무의 행렬은 여전히 새롭고 시원한 느낌이다. 아마도 차를 즐겨 마시며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그 느낌을 가슴 가득히 품고 음미했을 것이다. 먹지 않고도 배가 부른 그런 느낌이겠지.
▲ 보성의 차밭 |
ⓒ2006 백유선 |
▲ 보성의 차밭, 봇재다원 |
ⓒ2006 백유선 |
▲ 보성의 차밭, 몽중산다원. 찻잎이 새로 나와 녹색이 싱그럽다. |
ⓒ2006 백유선 |
며칠이 지났건만, 차를 모르는 내게도 보성의 차밭 풍광은 새로운 세계에 다녀온 느낌으로 여전히 눈앞에 선명히 남아 있다. 기회가 되면 좋은 계절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신비함이 극에 달해 보일 것 같은 아침녘 산보. 역시 꼭 해보고 싶다. 운무에 쌓인 골짜기 사이를 녹차 향 실린 맑은 공기와 함께하는 상상. 참으로 즐겁다.
/백유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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