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文學산책 마당

[스크랩] 젊은 날의 초상......이문열

鶴山 徐 仁 2006. 8. 14. 19:24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희망의 문학

탐색의 과정, 그 소설적 미학

권영민

1

이미 지나버린 일이긴 하지만, 작가 이문열(李文烈)의 「그해 겨울」(1979)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필자는 강의시간 중에 학생들과 함께 이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젊은 주인공의 격렬한 정서의 파탄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한번쯤은 <젊음의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음미해 볼 만한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에서였고, 특히 이 소설의 구조적 속성이 이른바 <피카레스크> 소설형식에도 관련되며 <탐색의 과정>이라는 신화적 의미를 지닐 수도 있음을 예시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이 소설을 함께 읽었던 학생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나타났다. 우선 상당수의 학생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 <나>를 작가인 이문열 자신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소설의 내용이 작가 체험의 소설적 형상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쉽게 단정해 버림으로써 오히려 소설보다는 작가 이문열의 이야기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의 지적인 고뇌를 어느 정도 읽어낸 또 다른 학생들은 주인공의 지나친 자기 과시, 정서적 편향성, 지적 자만 등을 지적하기도 하면서, 그러한 모든 결함이 현실적인 상황의 위압과 육체적 고통을 인내함으로써 드디어 극복되는 과정이야말로 이 작품의 감동적 요소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떤 학생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과 그들 자신의 위치를 비교해 보면서, 안일한 삶의 태도로 현실에 타협해 온 자신들의 나약한 문제의식을 몹시도 부끄러워하는 순진성을 보여 준 경우도 있었다. 이들 학생들이 지적했던 내용 중에서 지금껏 기억에 새로운 것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해 겨울」에서 주인공이 겪는 그 겨울 동안의 체험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한 체험을 겪어야만 했던 그 겨울 이전의 상황이 소설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학생들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필자 자신은 이러한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일인칭 소설에서 흔히 지적되고 있는 <사실성에 대한 환상>을 설명하기도 했고, 스토리 자체에 내재하는 회귀적인 지향성에 근거하여 작품 구조의 완결성을 애써 강조하였다. 특히 「그 해 겨울」에서 주인공이 겪는 그 겨울 동안의 체험 이전의 상황을 분명히 제시한다는 것은 오히려 소설의 긴장을 깨뜨릴 우려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작가 이문열은 「그 해 겨울」을 발표한 후에 거의 이 년에 가까운 시간적 간격을 두고 「하구(河口)」 와 「우리 기쁜 젊은 날」을 발표하여, 소설 「그 해 겨울」에 선행하는 또 다른 이야기를 소설화함으로써 「하구」→「우리 기쁜 젊은날」→「그 해 겨울」에 이르는 삼부작을 완성하고 말았다. 「그 해 겨울」을 강의실에서 함께 읽었던 당시의 필자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연유가 되어 필자는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그해 겨울」을 소설 속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좀더 자세히 읽게 되었고, 이들 세 작품이 각각 독립된 작품으로서 지니고 있는 의미와 그 전체적인 성격을 검토해 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그해 겨울」로 이어지는 이문열의 삼부작은 각각의 작품이 독립된 중간소설로서 그 균형을 갖춘 채 독자적인 의미를 구현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한 젊은 주인공(소설 속에서는 <나>라는 일인칭의 서술자로 등장한다)이 정서적 충동과 지적 모험을 겪으면서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주인공인 <나>의 경우에 겪게 되는 젊음의 시절은 외견상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그 첫 단계는 주인공이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현실 사회와는 아무런 삶의 접점도 공유하지 못한 채 유리된 상태에서 타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자기 생의 방향을 스스로 가늠하기 시작하는 고통의 시절(이 시기는 주인공이 성년에 접어드는 단계이며, 작품 「하구」를 통해 극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이며, 둘째의 단계는 모든 자유로운 사고와 비판적 행위도 용납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대학생활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자신의 내면적인 지적 욕구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채 오히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뼈저리게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고뇌의 시절(소설 「우리 기쁜 젊은 날」의 주인공 <나>는 짧은 대학생활을 거치면서 오늘의 젊은이들의 사고의 폭과 깊이 그리고 행위의 방향 등을 심도 있게 연출해 낸다)이 바로 거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세 번째의 단계는 삼부작 중에서 가장 먼저 발표된 「그 해 겨울」의 내용과 연결되는데, 지적인 욕구와 자기 감정의 충일 상태를 끝내 감당할 수 없었던 주인공이 대학 캠퍼스를 버리고 무작정 현실 속에 뛰어들어 끝없이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 헤매며, 진정한 생의 의미를 추구하고자 몸부림쳤던 방황의 시절이 그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 그리고 끝없는 방황으로 점철되어 있는 주인공의 젊은 시절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고통을 통해서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을 실감하고, 고뇌를 겪으면서 새로운 지적 세계에 폭넓게 접근하며, 방황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는 전망적인 결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주인공 자신이 겪는 모든 체험과 그 아픔은 자기 생의 새로운 발견과 그에 따른 성장을 의미하고 있는 셈이다. 확실히 주인공 <나>는 젊음이라는 말로 포괄할 수 있는 온갖 충동 속에서도 끝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힘을 지탱하며,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스스로에 의해 시인되고 충만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절망이라는 것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에게도 함께 해당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그 해 겨울」에서 볼 수 있는 소설적 서술의 유형은 세 편의 작품이 모두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회고적인 서술방법을 취하고 있는 점에서 그 일관성이 드러난다. 그러한 방법은 서술상의 초점과 성격의 핵심이 주인공인 <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일인칭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이들 작품에서는 지나버린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주인공의 오늘의 입장이 거의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1) 흔히 나아가 그 기준이 되지만,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가리켜 특히 그걸 꽃다운 시절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 항상 그러하듯, 꽃답다는 것은 한번 그늘지고 시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이다. 내가 열아홉 나이를 넘긴 강진(江盡)에서의 열 달 남짓이 바로 그러하였다.

-「하구」의 서두

2) 대학에 들어간 첫해 가을을 앞 뒤 해서 급우들 사이에는 스스로를 인자(人子)로 지칭하는 해괴한 말버릇이 유행하였다.

(중략)

그런데 내가 새삼 케케묵은 옛날 일을 들추는 것은 거기서 무슨 우스갯거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무렵의 내가 탄식하듯 중얼거리던 말 한마디를 끌어내고자 함이다. 내개 가정교사로 입주해 있던 집의 외진 공부방에서, 가르치던 아이들이 모두 잠든 후 홀로 소주병을 비울 때였는데, 그때 나는 약간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했다.

「때에 인자께서는 병든 말처럼 피로하였더라. 육신은 그 육신을 기르기 위해 오히려 여위고, 영혼은 책에 대한 갈망으로 창백했더라……」

비록 그때까지만 해도 강의실과 도서관과 가정교사로 입주해 있는 집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고는 있었지만, 피로는 이미 조금씩 내 발 밑을 파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기쁜 젊은 날」의 서두

3) 이제 그 겨울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미 한 가정을 거느렸고, 매일매일 점잖은 복장과 성실한 표정으로 나가야 할 직장도 있다. 또 나이는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어 감정은 많은 여과를 거쳐야 하며, 과장과 곡필로 이루어진 미문(美文)의 부끄러움도 알게 되었다.

지금부터 꼭 십 년 전이 되는 그해 겨울 나는 경상북도 어느 산촌의 술집에 <방우>로 있었다.

ㅡ「그 해 겨울」의 서두

이러한 간단한 인용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세 편의 소설은 주인공의 개인적 체험과 그 추억담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지난 시절에 대한 동경과 향수가 그 목표가 아님은 분명하다. 지나간 세월이 동경과 향수의 대상으로만 남는다면, 거기에 얽힌 이야기는 한낱 감상적인 개인의 회고 취향에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작가 이문열이 삼부작에 붙인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제목만 보더라도, 이들 세 작품은 가장 격렬한 삶의 순간들로 엮어지는 젊은 날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체험의 내용이 인간의 삶의 한 단계로서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인 <나>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주인공인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적인 인물들은 비록 지나가 버린 시기이긴 하지만, 한 시대의 젊은 층의 의식에 깊이 관련된다. 여기서 한 시대란 지난 1960년대(소설 「우리 기쁜 젊은 날」에 <아직  풍요의 1970년대가 열리기 전이어서> 운운하는 구절이 있다.)를 뜻하며,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그 시대적 분위기가 소배경으로 등장됨은 물론이다. 하지만 1960년대의 젊음이 겪어야 했던 좌절과 방황은 내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에서 연유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실상 그것이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구체화되기란 어려운 여러 가지 제약을 지니고 있다. 작가 이문열의 경우에는 자세히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대학중퇴>라는 그의 개인적 이력이 소설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밀착됨으로써 용케도 이 위험스런 균형을 지탱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세 작품은 모두 서사적인 자아로서의 주인공인 <나>와 현실적 자아로서의 작가 이문열의 구별이 확실치 않은 상태에 놓여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단순히, 서사적인 자아인 <나>의 체험과 그 진술이라기에는 작품의 내용이 대부분 작가의 의식에 지배되고 있는 점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삼부작으로 이루어진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그 해 겨울」은 작가 자신의 경험적 축적을 자서전적인 구성법에 의거하여 펼쳐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정은 이 세 편의 작품이 소설 속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될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 세 작품을 하나의 커다란 작품으로 생각할 때 각 작품에 대한 순차적인 경험이 전체적으로 통일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그 해 겨울」로 그 내용이 진전되면서 작품의 의미가 더욱 심화되고 그 내적 구성력이 더욱 짜임새 있게 이루어지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작가 이문열이 이 작품을 하나의 장편소설로 발표하지 않고 삼부작을 의도한 것은, 그 자신이 선택한 제재의 독특한 성질(여기서는 격렬한 삶의 순간으로 이루어지는 젊음이 바로 그것이다)에 알맞은 이완된 형식을 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연작 형태의 구성법에 의거하고 있는 이 삼부작은 확실히 한 편의 에피소딕한 장편소설과 독립된 세 편의 중편소설의 집합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기에 주인공인 <나>의 의식의 추이는 각 작품에 그려진 시간과 공간의 배경에 따라 단절과 연관을 함께 드러내면서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3

이문열의 삼부작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그 해 겨울」은 한마디로 말하여 젊음의 소설임이 틀림없다. 이문열의 작가적 관심은 그의 화제작 「사람의 아들」 「들소」등에서처럼 주로 풍자적 관심을 배제한 관념적인 주제와 맞닿아 있다. 그러기에 이들 작품은 신과 인간의 문제, 인간의 존재와 그 의미 등에 대한 열정적인 탐구작업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은 소재 자체의 경험적 확실성에 근거하고 있는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그 해 겨울」에서 오히려 삶의 현실에 더욱 밀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세 편의 작품에서 작가는 성장기에 겪어야 하는 젊은이들의 고뇌에 그 관심을 집중하고 있으며, 자신이 체험한 바 있는 젊음의 시절, 그 정신적 충격과 아픔의 시련 등을 근간으로 소설적 구성의 완결성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가의 특징적인 면모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문열의 문학세계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삶의 제의적(祭儀的) 과정과 연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삼부작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그 해 겨울」에서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는 젊음의 시기는 성년의 단계로 입문해 가는 격렬한 변화의 시기이며, 이 시기에는 겪는 젊은이들의 정신적인 방황과 그 고통은 성숙한 인간으로서 기성의 사회에 참여하기 위한 하나의 <통과제의>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통과제의>의 첫 단계에 삼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가 되는 작품「하구」가 가로놓인다는 사실은 그 제목 자체가 암시하고 있는 의미를 통해 싶게 확인할 수 있다.

작품 「하구」에서 그려지고 있는 <열아홉 나이를 넘김>시절이란 생의 과정에서 격렬한 삶의 현실과 어느 정도 유리되어 있던 유년기 또는 소년기를 벗어나는 단계에 속한다. 이 시기는 제목 자체가 말해 주듯이 긴 강물의 흐름이 이제 막 바다와 마주치게 되는 <하구>의 단계와 일치한다. <하구>에 이르면, 강물은 그 흐름을 멈추며 바다라는 이질적인 세계에 편입되어 버린다. 이때에 겪을 수밖에 없는 충격과 변화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성년에 도달하는 순간 직면하게 되는 가장 치열한 삶의 체험과 자연스럽게 대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작품 「하구」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주인공인 <나>는 할 일 없이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는 젊은이로 그려져 있다. 그러다가 형이 일하고 있는 <강진>에 일단 정착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새로운 고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경위나 그때의 내 신세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심하다. 그 열흘 전쯤 나는 어느 낯선 도시의 싸구려 하숙방에서 형에게 길고 간곡한 편지를 썼었다. 이것저것 사업에 실패를 거듭하다 그곳 강진까지 밀려나 조그만 발동선으로 모래 장사를 하고 있던, 세상에서 하나뿐이고 또 내게는 아버지나 다를 바 없는 형이었다.

나는 그 편지에서 우선 목적 없는 내 떠돌이 생활의 쓰라림과 서글픔을 은근하게 과장하게, 속절없이 늘어만 가는 나이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과는 달리 정말로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벌써부터 어른들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 넘기고 어른들의 옷을 입고, 술이며 담배 같은 어른들의 악습과 심지어는 그들의 시시껄렁한 타락까지 흉내내고는 있었지만 나이로는 여전히 아이도 어른도 아니었으며, 정규의 학교과정은 밟지 않고 있었으나 또한 책과 지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생활도 아니어서 학생이랄 수도 건달이랄 수도 없었다. 당시의 내 깊은 우려 중의 하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평균치의 삶조차 누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솔직하게 썼다. 그리고 함부로 뛰쳐나온 형의 그늘에 대한 진한 향수를 내비침과 함께. 만약 다시 받아들여만 준다면 지난날의 나로 돌아가, 무분별한 충동으로 턱없이 헝클어놓은 삶을 정리하고, 늦었지만 가능하면 모든 점에서 새로이 시작해 보고 싶다고 썼다.

약간 인용이 길어지긴 했지만, 이와 같은 연유에 의해 <나>는 결국 <형>이 생활하고 있는 <강진>에 머물 수 있게 되었고, 일단 여기서 그 동안의 무절제의 방랑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직은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접어드는 순간에, 작가 이문열은 서사적 자아인 <나>와 세계(여기서는 <강진>에서의 새로운 삶이 된다)의 직접적인 대결방식을 완화하기 위해 그 중간에 <형>이라는 매개항을 설정하고 있는 듯하다. 만일 이 중간적 매개항으로서의 <형>의 존재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면, 서사적 자아와 세계의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소설의 줄거리 가운데에서 <형>의 사업과 그 일하는 모습을 통해 삶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되는 삽화적 내용들을 통해 더욱 분명히 밝혀진다.

<강진>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나>는 갖가지 육체적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결국 고통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출구로서 대학 진학을 꿈꾼다. 그리고 결국은 소설 속의 표현 그대로 <행운은 두 번째도 내 편이 되어 나는 그럭저럭 목표했던 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을>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미숙한 삶의 경지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년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겪게 되는 괴로운 시련, 말하자면 <이니시에이션>의 의미와 일치한다. 물론 소설 「하구」에서 주인공인 <나> 의 경우에 겪게 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단순히 삶의 방향을 새로이 전환시키거나 변혁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과 시련 속에서 충격과 변화를 겪는 동안의 정신적 방황과 갈등이 곧 삶의 기본적인 리듬일 수 있으며, 그러한 리듬의 재현이 소설의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진>에서의 생활을 통해 얻어내고 있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은, <나>의 의식의 추이를 골격으로 하는 소설의 구조상 거의 무의미한 삽화로 인정될 수밖에 없지만, 생생한 삶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중요시된다. <나>는 <강진>에서의 고통스런 생활 가운데에서 <별장집 남매> <서동호와 그 부친> <모래장의 최광탁과 박용칠> 등의 인물들과 알게 되는데, 이들은 <나>에게 삶의 진실과 그 허울을 함께 암시해 주기도 하며(<별장집 남매>의 경우), 삶의  태도의 의연함과 그 정직성을 말해 주기도 하며 (<서동호와 그 부친>의 경우), 미천한 삶의 바닥에서도 자기 삶의 방식을 착실하게 터득하고 있음(<최광탁과 박용칠>의 경우)를 보여주기도 한다. <형>이라는 중간적 매개항을 놓고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나>는 스스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인식하고 폭넓게 삶의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문턱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 「하구」에서 주인공이 삶의 총체적인 인식에 도달했다거나 모든 고뇌와 시련의 과정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다분히 잠정적이며 유보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진>의 생활이 삶의 뼈저린 경험과 충격을 강조하기에 충분하며, 소설이 요구하는 서사적 자아와 세계의 구조적 대립을 어느 정도 노출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의 인식의 성장이 가능했다는 점도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그것이 <나>의 의식에 숱한 정서적 손상을 초래함으로써 또 다른 <유적(流謫)>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작가 이문열이 그려내고 있는 또 다른 그 <유적>의 과정은 <하구>를 벗어난 주인공 <나>의 짧은 대학생활을 그려내고 있는 「우리 기쁜 젊은 날」로 이어진다. 소설 「우리 기쁜 젊은 날」은 어찌 보면 삼부작 중에서, 주인공의 상황적 여건이 다른 두 편의 경우에 비해 가장 바람직했다고 할 수도 있다.  대학생이 된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선택된 위치에 오르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한 셈이다. 더구나 주인공인 <나>는 대학이라는 새로운 집단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삶의 참된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열정과 소망에도 불구하고, <나>의  대학생활은 가정교사 자리에 얽매임으로써 자기 생활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고, 그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지난날 나태했던 게으름의 습벽 때문에 학교생활 자체가 점차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터무니없는 지적 욕구로 인하여 오히려 <나>는 참다운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할 정도로 자기도취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작품 「우리 기쁜 젊은 날」에서도 서사적 자아인 <나>와 세계(대학생활)의 구조적 대립이라는 소설적 요건이 완벽하게 충족되지는 않는다.「하구」의 경우 <형>을 매개항으로 하여 이루어진 생활이 있었다면, 「우리 기쁜 젊은 날」에서는 중간적 매개항이 아닌 <길의 동행자>로서 두 사람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가(河哥)>와 <김형>이 바로 그들이다. 다분히 열정적인 <하가>와 사변적인 <김형>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나>의 만남은 지나간 1960년대의 대학생활에 적응하는 전형적인 대응방식에 속한다. 작가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젊음의 물결을 이들 세 인물의 행위와 사고를 통해 재현하고 있을 뿐, 소설의 양식이 요구하는 자아의 내적 성숙을 기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세 구절로써 <우리 기쁜 젊은 날>로 기억되는 대학생활을 청산하고 있는데, 스스로 진술하고 있듯이 <영광인 동시에 오욕이고, 비상이었으되 몰락인 그 이듬해>의 또 다른 방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보다 확실하게 알기 위해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릴 것, 더욱 큰 가치를 붙들기 위해 이미 접근해 있는 모든 가치로부터 떠날 것, 미래의 더 큰 사랑을 위해 현재 자질구레한 애착에서 용감히 벗어날 것.>

출발에 즈음하여 새로 마련한 두툼한 수첩의 맨 앞장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내 생각이라기보다는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책의 한 구절로 생각된다

4

잃어버린 옷깃의 단추를 찾는 것은 참된 의미의 탐색은 아니다. 탐색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아직껏 경험하지 못한 어떤 대사에 대한 추구를 뜻한다고 오든 W.H.Auden은 말한다. 인간은 결코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체험을 되풀이할 수 없다. 모든 순간은 언제나 새롭게 겹쳐지는 것이므로 인간의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항상 변화를 보이게 마련이다. 인간이 끝없이 열려 있는 미래의 어떤 것에 전념한다면, 그 사고는 언제나 미지의 세계로 뻗어 있는 길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비록 목적지가 보이지 않더라고 언제나 그 자체로서 확실한 방향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문열의 삼부작 중에서 그 마지막의 이야기가 되는 「그해 겨울」은 비록 고통스런 방황의 과정이긴 하지만 더 큰 것을 향한 탐색의 길과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의 방황은 이미 언급한 「우리 기쁜 젊은 날」의 결말에서 <확실한 앎, 더 큰 가치, 더 큰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 대학을 포기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방황의 과정은 광부가 되겠다는 생각, 어부가 되려던 의도와는 달리 산촌의 여관 겸 술집에서 <방우> 노릇을 하는 장면에서부터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곳에서 타락한 삶의 작태와 실상을 스스로 체득하기 시작한 <나>는 자신이 열렬히 도달하고자 하는 결단에 접근하기 위해 그 집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바다를 향한다. 태백산맥을 넘어야 하는 백 리 길에서 <나>는 몇 사람의 길동무를 만나며,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는 눈 덮인 <창수령>의 육십 리 길 재를 넘게 되며, 눈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대진>이라는 작은 포구에 도착하여 바닷가로 나가, 자신을 바다에까지 이끌었던 이유를 스스로 묻는다. 하지만 <나>의 방황에 <혼연한 종말을 가져다준 소리>를 듣지 못하며, 오히려 파도에 휩쓸려 떠오르지 못하는 한 마리의 갈매기를 보는 순간 <위기에 자극된 생명력은 갑작스런 불꽃>처럼 스스로의 의식을 일깨우게 된다. <절망이란 존재의 끝이 아니고 진정한 출발>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 <나>는 지금껏 지니고 있던 유서와 약을 자신의 감상과 함께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개략적인 내용으로 보아 소설 「그해 겨울」은 주인공인 <나>의 방황의 여로(旅路)로 그 의미가 집약된다. 흔히 소설에서의 시간은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라는 명제로서 그 구조가 드러난다. 서울을 벗어나 강원도 산골에서, 경상도의 어느 산촌, 그리고 동해바다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그해 겨울> 동안의 시간은 결국 <나>의 방황의 여로를 통해 구체화되며, 이 여로 자체가 결국은 작품의 내용을 지탱하는 구조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작품 「그해 겨울」의 소설적 공간임은 물론이다. <길>은 움직이는 삶의 과정이며, 그 자체로서 이미 생명을 지닌다. 서울에서 바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다시 서울로 이어지는 길, 그 과정의 길이에 대응하는 시간이 <그해 겨울>이라는 특정의 시간으로 귀착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인 <나>의 방황의 여로는 회귀적인 속성을 지닌다. 이 여로가 서울에서 바다라는 직선적인 것으로 끝난다면, 결국 주인공의 <결단>은 바다에서의 죽음의 의지로 표출되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결단>은 오히려 새로운 차원에서의 삶에 대한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길>의 출발지인 원점(서울)으로 회귀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바다 역시도 지금껏 우리를 현혹해 온 다른 모든 것들처럼 한 사기사(詐欺師)에 지나지 않는다. 신도 구원하기를 단념하고 떠나버린 우리를 어떤 것이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아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속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역시 눈비로 얼룩짐 그날의 수첩은 그렇게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그 갑작스럽고 당돌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에 따른 원인 모를 허탈과 슬픔에까지 극복해 낸 것 같지는 않다. 절망의 확인이란 아무리 냉철한 이성이라도 그것만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그 바닷가의 바위에 기대 한동안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진술에서 <나>의 의식은 드디어 <나> 자신이 유일한 자기임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만큼 자아의 성숙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갑작스럽고 당돌한 결론>이라고 지적되고 있는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라는 판단이 살의 진실한 의미를 뜻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탄생이며 죽음이 그 종말인 인간의 삶과 같이, 소설 「그해 겨울」로써 주인공인 <나>의 방황은 모두 끝났다. <나>는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대학생활)로부터 이탈함으로써 그 뒤에 따르는 고통의 여정을 자초했지만, 그것은 결코 고통의 시간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보다 높은 진실의 차원에서 삶에의 새로운 만남을 전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해 겨울」에서 그려지고 있는 주인공인 <나>의 방황은 덧없이 흘러 다닌다거나 정처없이 돌아 다닌다는 뜻의 방황은 아니다. 새로운 것을 구하며 방황하고, 방황하면서 더 큰 것을 찾고자 하는 데에 그 참뜻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결단>을 감행하고자 방황하는 <나>는 그러한 의미에서 탐색의 주인공이며, 대학을 버리고 고통스런 방황의 과정을 거쳐, 다시 출발지로 돌아감으로써, 격리→시련→재편입의 절차를 거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인 <나>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지속된 갈등은 결국 새로운 내일을 맞으려는 변혁의 의지에 다름이 없으며, 바로 이러한 갈등이 어쩌며 인간의 의식에 보편적으로 내재한 생의 기본적인 리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이 갈등의 리듬을 타고 새로이 전개되기 마련이다. 소설 「그해 겨울」의 감동은 바로 이러한 삶의 리얼리티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5

이제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그해 겨울」로 이어지는 삼부작이 매듭지어짐으로써 작가 이문열은 우리 시대의 격동을 지나버린 젊음의 격정 속에 함께 포괄하고자 했던 그의 작업을 일단 마무리한 셈이다. 그러나 작가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간 젊음이 아니라 오늘의 삶 그 자체이다. 이문열이 자기 체험의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이 펼쳐나갈 소설적 또다시 기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기대를 위해 「그해 겨울」의 한 구절을 들어 이문열의 목소리로 바꾸어봄으로써 그 확신을 거듭 강조해 두고자 한다.

나는 생각한다. 진실로 예술적 영혼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저한 절망 위에 기초한다고……. 그것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도전하고 피 흘린 정신 때문이라고.

출처 : 소냐의 다락방
글쓴이 : 소냐 원글보기
메모 :

'文學산책 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기다림에 지쳐버린 사랑  (0) 2006.08.15
[스크랩] 그리움!!!  (0) 2006.08.15
그리움의 향기  (0) 2006.08.14
顚南述懷전남술회  (0) 2006.08.11
가슴에 묻은 당신이 찾아오면  (0) 2006.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