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전건축

鶴山 徐 仁 2006. 8. 6. 16:16

  (http://sanho.new21.net/)  
 각황전.jpg (106.4 KB)
 각황전(覺皇殿)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물인 각황전(覺皇殿)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으로
지리산의 억센 맥을 누그러뜨리려 세웠다는 말이 전해지는 곳으로 국보 6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부처님의 몸을 가리켜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해서 본래 장육전에는
석가여래의 모습만한 금색의 불상을 모셔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장육전은 임진왜란때 불타버려 당시의 모습이나 불상은 찾아 볼수가 없다.

본래 이 건물은 670년(신라 문무왕 10년)에 의상대사가 3층,
사면 7칸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소실된후 30년만인 1636년(조선 인조 14년) 벽암선사에 의해
화엄사는 복구되었으나 각황전만은 복구되지 못하다 1699년(조선 숙종 25년)
계파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정면 7칸 (26.8m), 측면 5칸 (18.3m), 높이 15m로
내부 전체가 한칸의 방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안에 세워져 있는
기둥 하나 하나는 한그루의 나무로만 만들어져 있다.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고
천장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주변이 경사지게 한 것은 우리 나라에서 그 예가 드물다고 한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馬山面) 황전리(黃田里) 화엄사 경내에 있는 건물.
1703년(숙종 29)에 세워졌으며,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이고 양식은 중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숙종 때 계파(桂波)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완공 후 숙종이 사액(賜額)하여 각황전이라 하였다.  

대석조 기단 위에 선 웅장한 건물로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끼고 그 위에 평방(平枋)을 둘렸다.
평방 위에는 기둥 위와 주간(柱間)에 공포(?包)를 올렸으며 공포는 상하층 모두
2출목(二出目)으로 되었다. 현재 건물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경석(華嚴經石)이 수장되어 있으며 각황전은 그 거대함과 아울러 이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도봉사


건축년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봉산 도봉사가 경매 물건으로 나왔다.

서울 도봉구 북한산국립공원 도봉산에 있는 도봉사가 경매에 부쳐진다.
사찰이 경매에 부쳐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도봉사는 고려 국사를 지낸 혜거(899∼974) 스님이 창건했으며,
거란 침입 때 고려 제8대 현종 임금이 피란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1961년 벽암 스님에 의해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지 2,250평, 건평 301평 규모의 도봉사는 불교단체 소유가 아닌
문모(48)씨 개인 소유로 돼 있으며 문씨에게 7억원의 채권을 갖고 있는
이모씨 등 2명이 경매를 신청함에 따라 시장에 나왔다.

최초 감정가는 24억3,000만원으로 땅이 자연공원구역 및 개발제한구역에 묶인데다
종교시설이라서 일반인의 응찰은 쉽지 않을 전망이며

서울북부지방법원 경매2계는 5월 22일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었던
서울 도봉사(사건번호 2005-40433) 경매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밝혔다.

경매2계 관계자는 "연기신청이 들어왔고 추후 매각기회가 잡히면
관계인들에게 통보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봉정사 극락전




지정 : 국보 제15호
위치 : 경북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태장리(台庄里) 봉정사
시대 : 고려 말기
구분 : 목조 불전

  국보 제 15호 이 건물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 목조건축 중 최고의 건물로 유명하다.
정면 3칸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전대인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어 더욱 주목되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極樂殿;국보 제15호)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1972년에 실시한 보수공사 때에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건립 후 첫 수리는 고려 공민왕 2년(1363년)에 2차에 걸친 수리가 있었고
그 후 인조3년(1635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1376년 중수된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백년 정도 앞선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이는 건축양식을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데, 고려시대 주심포 맞배집의 대표작으로
1탑식 가람배치의 특징을 살리고 있다. 1973년 건물 해체수리 때 1368년에 중수했다는
묵서가 발견됨으로서 이 건물이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물 중 최고의 건축물로 추정되었으나,
봉정사 대웅전(사진) 보수를 위해 건물을 해체하던 중 대웅전 내 불단을 1361년에 만들었다는
묵서가 발견됨으로서 오히려 대웅전이 늦어도 1361년 이전에 세운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찰의 중심 건물은 극락전이 아니라 대웅전이기 때문에
대웅전이 극락전보다 늦게 건축되지는 않을 것 것이라는 사실이 뒷받침하고 있다.
  
주요 구조를 보면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로 잡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부드러운 배흘림을 가진 기둥머리에 창방을 돌려,
기둥 위에는 2출목으로 돈 공포를 올려놓았다.
  
  이 공포는 대들보 끝을 받아 그 위의 주심도리를 받게 되며,
외포2출목 첨차는 대들보 끝에 짜여진 부재를 받고, 그 위에 외목도리를 받는다.  
대들보 위에는 앞뒤에 일종의 복화반을 두고 그 뒤에 놓인 포작으로 중종보를 받는 이중량 구조로서,
중종보는 복화반 모양의 포대공 위에서 중도리를 받는다. 중종보 중앙에는 키가 낮은
복화반 모양의 포대공이 있어 마루도리를 받치고, 마루도리는 그 앞뒤에서 솟을합장이 이를 받친다.
이 솟을합장은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짧은 것이 아니고
마루도리와 중도리 사이에서 직선재(直線材)로 되나, 그 밑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안으로 굽어 차례로 도리목을 받치며 내려가는 특수한 양식이다.
  
마루는 널마루를 깔았으며, 불당 중앙 뒤쪽에 두 개의 기둥을 세워 불단 벽을 만들고,
그 앞에 불단을 마련하였다. 불단 위에는 높은 우주를 가진 다포집 모양의 궁전형 보개를 설치했으며,
이 공포의 기둥머리나 소로는 모두 본 건물의 양식과 같이 된 5출목의 포작이다.
이 불단과 보개(寶蓋)는 모두 그 제작연대가 건물과 같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건물의 몇 가지 양식에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 건물의 공포, 특히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의 형태 및 덧보,
마루도리를 받치는 일종의 복화반(覆花盤) 모양으로 된 대공 형태 등이다.
곧 기둥머리나 소로의 굽은 그 단면이 안으로 굽은 곡선으로 되어 굽받침이 없는데,
이 형태만 본다면 부석사 무량수전의 그것에 굽받침이 없어진 형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는 의성 탑리 5층석탑의 1층 탑신의 우주 위와,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의 좌우 돌난간 기둥에 부각된 소주형의 머리에 이와 비슷한 기둥머리를 볼 수 있다.
쌍봉사(雙峰寺)에 있는 감선사부도 기둥 위의 기둥머리나 창방 위에 놓인 접시받침이
외와 곡같다는 점에서 부석사의 그것보다 앞서는 것이며, 복화반 모양으로 된 대공도
주심포집 건물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시대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팔자형 솟을 대공의 변화형으로서 오래된 양식의 하나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이 봉정사 극락전은 그 양식이 주심포집이라고 하나,
흔히 말하는 고려 중기에 중국 화남지방에서 도입된 건축양식인 주심포집과는 달리,
그 이전에 있었던 건축양식에 이 새로운 양식이 영향을 주어 세워진 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기둥의 배흘림, 공포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가구의 고격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며,
부재 하나 하나가 모두 국보적 기법을 갖추고 있어 한층 더 지보적(至寶的) 존재라 할 수 있다.


통도사삼층석탑(通度寺三層石塔)



보물  제1471호로 지정된  통도사삼층석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일반형 석탑이다.

석탑의 높이는 3.9m 기단폭은 1.8m이며, 기단은 여러 매의 장대석을 사용해 지대석을 구축한 후 올려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1개의 부재로 조성되었다.

양식적 특징으로는 첫째, 하층기단의 각 면에 우주와 탱주를 생략하며 안상을 조각했다.
신라석탑에서 통도사삼층석탑과 같이 우주와 탱주를 생략하며 기단부에 안상을 조각한 것으로는
범어사삼층석탑, 안동 옥동삼층석탑, 무장사지삼층석탑, 칠곡 기성동삼층석탑, 술정리서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옥개석의 양식으로 전각의 경쾌한 반전과 낙수홈을 들 수 있다.
보편적인 신라석탑의 낙수면은 곧게 일직선으로 조성되어 전각의 반전이 날렵하게 조성되고 있다.
이같은 예를 실상사삼층석탑과 해남 대흥사 응진전앞 삼층석탑 등에서 볼 수 있는바,
이들 석탑이 모두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을 볼 때 이 석탑 역시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옥개석의 하면에 조성된 낙수홈은 8세기 석탑에서 시작되어
신라석탑의 보편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되는 바, 이는 석탑이 목조건축의 번안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례로 볼 수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 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장을 보존하는 보고로
해인사의 현존 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고 평가.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해인사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교 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경판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고려각판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