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4) 화문석과 완초공예

鶴山 徐 仁 2006. 8. 4. 10:34

“전통적인 느낌의 발이 내려진 한옥 대청마루. 화문석 돗자리가 깔려 있고, 앞뜰에는 소박하고 아담한 꽃들이 피어 있다.”

여름철 전통가옥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대본의 한 구절이다. 여기서 화문석(花紋席)은 중요한 소재다. 우리 살갗에 잘 맞는 토종 깔개인 화문석이 자연친화적인 살림집인 한옥과 더없는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 화문석이 깔린 마루에 찻상을 차려 놓고 의좋은 벗과 함께 차 한잔을 마시는 정취는 한여름 전통가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 화문석은 부녀자들의 손가락 하나 하나로 엮어낸 우리 조상의 멋과 우아함이 가득 서려 있는 전통 민예품이다

▲ 완초제품은 짚풀공예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 소박하고 서민적인 인간미가 살아있다.

▲ 바닥이 둥글지 않은 팔각단합은 완초장 이상재씨가 수년간 시도 끝에 개발한 것으로 옛 전통미가 흐르면서도 현대 감각을 섞은 생활용품이다.

▲ 왕골은 사초과(莎草科)에 속하는 1~2년생 풀로서 논밭이나 습지에 심고 꽃줄기로 돗자리를 만든다.

▲ 왕골의 줄기를 피부와 수부로 분리하여 건조시킨 후 가늘게 쪼개어 말리면 화문석의 재료가 된다.

▲ 대틀에 추(고드랫 돌)를 매달아 놓은 후, 염색을 한 완초를 한올한올 열흘정도 짜내야 하나의 화문석이 완성이 된다.

화문석은 꽃모양의 자리로, 고려가 몽골에 저항하기 위해 강화로 도읍을 옮겼을 때 개성 이주민이 부업으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의 유구함과 더불어 종류와 제조기법도 다양하다. 완초(莞草:일명 왕골)를 뽑아다가 껍질을 벗겨 말려서 짠 것이 함평의 왕골돗자리이고, 껍질째 통을 쪼개 말려서 짠 것이 강화 화문석이다. 정교하고 섬세한 수공예품인 화문석의 진가는 완초 하나하나가 드러내는 문양에서 발휘된다. 원앙을 비롯한 길조나 매화, 나비 등이 새겨지며 장생(長生)을 상징하는 학, 거북이, 소나무가 화려하다. 전통 짚풀공예의 아름다움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화문석이다.

화문석은 사용 목적에 따라 변신을 할 줄 안다. 마루나 방안에 깔아놓으면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 되고, 일하는 공간에서는 유희의 장이 된다. 또 세속적인 공간에 자리를 까는 것만으로도 제사를 모시는 성역(聖域)으로 변모한다.

한국인에게 화문석은 단순한 돗자리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다. 마파람이 기어드는 여름밤, 화문석이 깔린 대청마루에 누워서 은하수를 바라보던 ‘행복한 여름’의 추억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유산이자, 계승해야 할 삶의 가치다.

사진 글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완초장 무형문화재 103호 이상재 씨

▲ 이상재 씨
강화도 교동에서 나고 자란 이상재(63·완초장 무형문화재 103호)씨가 만들고 있는 것은 올이 촘촘하고 때깔이 고운 꽃삼합(무늬를 넣은 세개의 왕골 합)의 바닥이다. 방사형으로 뻗은 날줄에 씨줄을 원을 그리며 감아 나간다. 어릴 적 집에서 부업으로 꽃삼합이나 방석을 결어 내다 팔았기 때문에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처음엔 색색으로 수놓아진 탐스러운 화문석에 반했어요.”

왕골을 쪼개고 말리고 삼고 물들이는 과정을 배워 가면서 손이 성할 날이 없었다.“인간의 인내를 시험하는 일입니다.”

제품을 만드는 시간이 너무 길고 값이 비싸므로 돈벌이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도 어려운 살림에 불평없이 수제자가 되어준 아내 유선옥(52)씨가 고맙단다.“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잡아온 왕골입니다.”

사진 글 강화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기사일자 : 2005-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