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의 생명적 관계 (이창남의 누드의 세계)
전규완
누드는 대체로 두 가지의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하나는 자연의 대상물 중에서 인간의 미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요, 둘째는 관습적인
세계에서 해방되어 자연으로 복귀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시도하는 예술행위이다. 따라서, 누드는 인체의 형태미나 자연미 등을 내용으로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벌거벗은 인간의 육체에서 인간이 자연의 하나임을 인식시키고, 디오니소스적 해방감과 도취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드는 호숫가나 냇가, 언덕이나 바위 위 또는 틈새, 아니면 숲속이나 잔디밭, 혹은 목장 등 여러 자연물에 융합시키거나 풍경 속에 동화시키면서,
인간의 형태미를 창출하고자 애쓰게 된다. 그러므로 그 인체의 아름다움은 아폴론적이거나 비너스적이다. 그러나 누드는 그 어느 것이든 직접적인
에로티시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사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사진이 카메라의 사실적 묘사성이라고 하는 메카니즘적
특성을 숙명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드를 찍는 사진가들은 이 관능적 감각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상하게 비틀린 자세라든가, 눈을 바로 뜨지 못하고 있는 시선이라든가, 부자연스럽게 가리고 있는 손 등, 웬지 찍는 사진가 스스로가 수줍음을
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누드에 익숙지 아니한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러한 경우는 흔히 목격되고 있다. 물론 예술에 있어서
에로티시즘을 세속적인 관능과 혼동하여서 죄악시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에로티시즘은 인간 실체의 일면을 승화시킨 예술적 표현의 하나요, 예술은
인간이라는 주체의 체험을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는 그 에로티시즘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한 작가의 의식이 어느 만큼 본질적 표현에
충실하느냐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창남의 누드는 이러한 테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는 누드의 일반개념에 대한 리액션(Reaction)을 기초로 하여 누드의 개념을
외연적(外延的)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누드 사진에 있어서 에로티시즘을 승화하기 위해선 강한 이미지의 형상화나
이데아(Idea)의 개입이 필요하다. 강한 포름으로 형상화하여 성공한 예를 빌 브란트(Bill Brandt)에게서 볼 수 있으며, 메시지를 담은
누드로서 에로티시즘을 승화시킨 것으로 50년대의 윈 벌록(Wynn Bullock)의 누드에서 볼 수 있다. 윈 벌록은 현저한 관념의
감정이입(Empathy)을 성공시킴으로써 누드의 관능성을 내면적으로 인식시키고 있다. 이창남의 사진에서 관능성을 찾기는 힘들다. 그것은
그의 누드가 메세지를 담고 있는 강한 형상성과 영상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누드를 주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때론 빌 브란트(Bill Brandt)와 같은 형상미를 보이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제리 웰스만(Jerry Uelsmann)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지만, 전혀 궤(軌)를 달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여성의 나신(裸身)을 매재(媒材)로 하여 인간에 대한 원초적 인식을 대입(代入)하고, 인간과 자연의 생명적 관계성을
연역적(演驛的)으로 추구함으로써, 그의 이데아와 감정이입을 정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에로티시즘을 튠 아웃(Tune out)시키고,
주제의 명증성(明證性)을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그로부터 메시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작업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누드를 첨경처럼 담고
있는 그의 자연은 대부분 생명이 없는 원초적 자연이며, 배경의 한 요소로 박혀 있는 듯한 여성의 나신(Naked)은 생명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일체를 이룬 자연으로서의 한 요소로 환치(換置)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그의 자연은 죽은 듯하나 생명의 부활을 얻은 듯 생명력을
회복하고 있으며, 생명이 있을 법한 나신 - 인간의 육신은 생명을 초월한 자연으로서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연과 인간의 생명의 관계성은
우리 인간과 예술의 진테제가 아닐까?
인간은 생명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자연은 생명이 없는 것일까? 생명이 유일한 존재수단인 인간은 자연과 동일한 개념으로
복귀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것은 그의 사진의 실마리요, 영원한 수수께끼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진은 누드라기보다는
하나의 존재론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도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으며, 흔히 누드 사진에서 일실(逸失)하기 쉬운 주제의 명증성도 얻고 있는
것이다. 예술, 특히 시각예술에 있어서 메시지란 말은 결코 관념적이란 말과 같은 말이 아니다. 사진은 시각의 도상화(圖像化)와 내재된
담정의 역동작용에 의해 강력한 호소력을 갖게 되어 있다. 예술에 있어서 내재된 감정(passion)이란 곧 직관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해석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관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해석적 입장에서 관념은 작가의 측면에서 예술적 승화의 총체인 것이다. 이 말은
이데아와 감성의 조화는 곧 작가의 노련한 영상력과 내연된 파토스(pathos)에 의해 예술적 승화를 이룩할 수 있으며, 또 이것 없이는 예술이란
경지에 이르기가 힘들다는 말인 것이다.
그의 사진은 황량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것은 초광각렌즈에 의한 즉물적 영상처리에서 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시선을
무한의 시간대로 유인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공간의 통시적(通時的) 효과인 것이다. 대체로 사진의 공간성은 현실을 정착시킨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 있어서의 공간성은 4차원 공간에서 현실을 초월하고 있다. 대부분의 상업사진가들이 그의 직업적 관성 때문에 이 사진의
공간성을 조형적 공간으로만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으로써 공간의 통시성을 상실하고 사물은 정체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초광각렌즈에 의한 왜곡과 퍼스펙티브로 시선의 원심점(遠心點)을 무한대에 두어 심리적 시간대를 확장하고, 자연의 원초성(原初性)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각적 교두보가 바로 하이퍼리얼리즘적 묘사의 극명성에 있으며, 그로 인해 자연과 누드의 물화(物化)가 형성된 것이다. 예술의
객관화는, 다소 이율배반적이기는 하지만, 생명력의 요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이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자연의 일반개념을
깨뜨리고 있으며, 누드를 다루고 있으나 누드의 통속개념을 벗어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그의 영상개념의 하이테크닉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을 인간 생명의 동일한 원천으로 해석하고 집요하게 그의 관념을 추구하고 있다..
사실 자연은 우리에게 '아름답다'라든가, 경이로움 등 다소 감상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점이 많다. 또, 많은 풍경 사진가들이 자연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뉴 토포그라픽(New Topographic)에서 자연을 순수한 객체로 묘사하여 과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과의 관계를 냉엄하게 묘사하고 있는 흠이 있다. 자연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 때로는 평행적으로 존립해 오고 있다. 휴머니스틱하지
아니한 자연은 인간에게 한낱 종이 풍경화에 지나지 아니하다. 그는 이 자연과 인간의 평행개념으로 파악하고, 그 어느쪽에도
프라이오리티(priority)를 줌이 없이 동일화시키는 메시지를 이미지로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생명의 원천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의
사진에는 '에덴의 동산'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회화성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단편적으로 종교적 뉘앙스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곧 종교현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경건성 때문일 것이다. 그의 풍경 속에서 아름다운 수목이나 탐스럽게 피어오르는
구름 등 자연의 일시적 현상은 되도록 포착하지 아니한다. 그러한 것들은 현실감을 표출시킴으로써 영상을 구심화(球心化)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누드에서 생명의 유한성을 망각시키고 자연과의 동일선상에서 생명을 파묻어 놓고 영속적인 생명의 시금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사진의 배경이 한국이 아니고 외국이며, 누드의 인물이 외국여성인 것에 대해 회의적인 내셔널리스트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설정해 놓고 볼 때, 장소적 의미와 인종의 뜻을 신경과민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주제의 한계성을 기속(羈束)하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가 다음의 프로젝트를 아프리카로 정해 놓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국에 눈을 두려고 하는 소이도 그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의 사진이 완전히 이러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만은 없다. 강한 구조적 구성이라든가, 연상(連想)에 의한 상징적
영상, 또는 지나치게 형상화된 누드의 앵글 등은 오히려 그의 주제의식을 약화시키고, 상식적인 스타일리스트로 군살이 생기게 될 우려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형태미보다는 내면성과 공간성을, 현실적 생명성보다는 통시적 생명성을, 그리고 누드의 철저한 자연화를 더욱
이룩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관능적일 수밖에 없는 알몸이 메시지를 담고 예술로 승화하는 길이 될것이며, 그의 강한 개성적인 누드의
사진예술을 창조하는 왕도가 될 것이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지만, 사진도 인간성의 완성에 그 참뜻이 있다. 누드사진도 예외일 수 없으며,
그 길로 향하는 길목을 바로 찾는 것이 사진가가 할 일이라고 믿는다.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그의 '예술사의
철학(philosophy of Art-History)'에서 예술은 하나의 도전이라고 했다. 예술가는 시지프스(Sisyphus)의 신화에서처럼
끝없는 도전으로 그 생명을 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