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상가 밀집 지역에 쇼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 |
부자들과 브랜드 상점이 많다는 점에서 도쿄 아오야마(靑山)는 서울 청담동과 닮았다. 지난 주말 이곳 ‘이세이
미야케’란 의류 브랜드점에 들렀다가 한국 중년 부부들을 만났다. “살찌니까 뭐든 안 어울려”라며 안 사고 문을 나서는 이들에게 일본 종업원이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를 반복했다. 전에 못 보던 풍경이다. 한국 쇼핑객이 늘었다는 얘기다.
요즘 아오야마에서 한국인은 강력한 실수요자다. 오로지 명품 쇼핑만을 위해 오는 사람들도 많다. 엔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떨어지면서 명품
물가가 역전됐기 때문이다. ‘100엔당 1000원’을 유지하던 작년 말까지는 엇비슷했지만 환율이 800원 수준으로 하락하자 일본이 싸졌다.
“비행기값을 뽑고도 남는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지난달 중순 야마가타현에 갔다. 엄청난 적설량 때문에 여름까지 운영하는 스키장에서 한국인 가이드를 만났다. 한국 스키어들을 위해 고용된
한국인이다. “겨울에도 한국 스키어들이 많이 몰렸다”고 했다. 스키장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 사정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하지만 가격 경쟁력도 한몫
한다. 일본의 리프트 사용료는 4000엔 선이다. 비슷한 시기 도쿄 인근 골프장 사장을 만났다. 다른 골프장에 한국 손님들을 빼앗겼다며
울상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내년엔 사용료를 6000엔으로 내릴 작정”이라고 말했다. 가격파괴 마케팅을 펼치겠다는 얘기다. 현재 사용료는
9000엔 정도다. 일본은 골프장이 워낙 많아 사용료가 한국보다 훨씬 싸다.
설렁탕에 견줄 일본 대중식은 라면이다. 인스턴트가 아니라 설렁탕 우려내듯 국물을 우려낸다. 설렁탕만큼 고깃덩이가 풍부하게 들어간 라면은
대략 700엔 수준이다. 요즘 환율로 5800원이다. 1년 전 서울에서 먹던 설렁탕 가격이 6000원이었다. 대중식에서도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음식 역시 고급으로 갈수록 일본이 싸다. 청담동 음식값은 아오야마를 앞질러 버린 지 이미 오래다. 물론 전반적인 물가 수준은 여전히
일본이 높다. 하지만 구매력이 강한 소비자들 수준에 맞는 물건, 서비스는 상당수 일본이 더 싸다.
8년 전 도쿄에서 1년간 머문 경험이 있다. 1997년 봄부터다. 몇 달 동안 전자 상점가에서 신나게 물건을 샀다. 환율이 700원대였다.
한국보다 싼 물건이 생겼다. 전자제품이 대표적이다. 음식값도 크게 비싸지 않았다. 그러다 전철 요금 130엔이 무서워 집을 못 나선 것이 몇 달
뒤인 그해 겨울이다. 낮은 환율에 흥청거리다 나라가 부도가 났다. 환율이 1200원대로 뛰어올랐다. 가격표에 ‘7’을 곱하다가 ‘12’를 곱하니
도무지 계산이 안 됐다. 600엔짜리 카레집 앞을 뱅뱅 돌면서 세상이 무섭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요즘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이래도 되냐?”고 묻는다. 경제력이 일본을 뛰어넘은 것도 아닌데, ‘물가 역전’이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 “환전할 때 일본 돈 많이 줘서 좋던데” 정도의 반응이다. 지방선거, 대통령선거, 이념과 남북문제까지 논하면, 환율 따윈 걱정도
아니다. 나라 분위기도 그런 모양이다. 이처럼 걱정 많은 한국인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도쿄의 술값 계산서다. “야, 일본 술값, 왜 이렇게
싸!” 취기의 허장성세가 아니다. 술값도 역전된 지 이미 오래다.
선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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