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박상건 기자]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 섬사람들은 백령도를 "맘대로 올 수 없고 맘대로 나갈 수도 없는
섬"이라고 부른다. 먼 바다 백령도를 오가는 여객선은 3천톤급에 이르지만 해무가 끼고 파랑주의보가 잦은 탓에 뱃길은 늘 빗장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대청도를 지나 백령도를 향하는 쾌속선 |
ⓒ2006 박상건 |
그러나 백령도 여행에 있어 이러한 군사시설 지역을 제외하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여행일 수밖에 없다. 때로 자연 풍광에 몰입되기도 하지만 긴장된 분단조국의 실상을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일도 의미 있는 여행일 것이다. 그런 백령도의 곳곳을 다 돌아보는 탐사여행을 위해 섬문화연구소 회원들은 국정원, 해병대 도움을 받아 지난 4월 7일 그 섬 백령도로 향했다.
인천항을 떠날 즈음 여객선 선장은 "해무가 낀 상태이긴 하나 파고가 1.5m 일고 있어 공해상으로 나갈 수 있는 기상으로는 꽤 운이 좋은 편이다"라고 귀띔해주었다.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백령도는 인천항에서 북녘으로 222km 해상에 떠있다. 아주 빠른 쾌속선이지만 4시간이 소요됐다. 직선거리가 아닌 공해상 남쪽 한계선을 타고 가는 곡선의 뱃길이었다.
백령도 공해상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얽혀 서로 생존과 경쟁을 위한 대치국면이 반복되는 해상이다. 백령도의 원래 이름은 곡도였다. '곡'은 '따오기 곡'자를 쓰는데 섬 모양이 따오기 흰 날개가 날아가는 모습이라는 것. 지금도 백령도는 철새들의 낙원이다. 지도를 놓고 보더라도 흰 새가 날아가는 모양새이다. 특히 청명한 날에는 섬 전체가 비상하는 철새로 장관을 이룬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배경이 되어 영락없이 한 폭의 수채화이다.
@IMG2지금의 백령도라고 부른 것은 고려 태조 때이다. 그 유래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가난한 선비와 사또의 딸이 사랑했는데 사또가 이를 못마땅해 선비를 먼 섬으로 내쫓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학 한 마리가 종이를 물어다 선비 앞에 떨어뜨리고 갔다. 그것은 사또의 딸이 보낸 편지였고 선비는 답장을 학에게 물려주었다. 사또의 딸은 그 편지를 받고 선비의 섬으로 도망쳤다. 그 섬이 하도 희고('흰백百') 날개를 펼치는('날개 령翎')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서해 5도 중 하나인 백령도는 고려 때부터 오도(五道), 서해도, 오해도(五海島)라고 불렀다. 조선(세종) 때 해주목사(海州牧師) 관할이었고 일제 말까지도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이었으니 북한의 생활 근거지였던 셈. 그렇게 해방을 맞은 백령도는 38선이 남북을 가르면서 옹진군 백령면에 속해 있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장봉도, 연평 앞바다 그리고 선미도를 휘어 돌아 소청도 대청도를 걸친 긴 항해 끝에 마침 내 백령도에 도착했다. 배가 닻을 내린 곳은 용기포항. 일반인과 군인들이 분리된 출입구를 이용한다.
일행은 미리 기다리던 안보수련원 버스를 타고 백령도 내륙 탐사에 나섰다. 백령도는 90년대 초까지 국내 13번째 큰 섬이었다. 1993년 3년에 걸친 방조제 공사와 간석지 매립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현재는 46.37㎢ 면적의 국내 8번째의 큰 섬이 되었다. 사곶해안 기슭과 화동마을을 매립해 담수호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해안선을 잇는 양쪽 방조제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 백령대교라고 불렀는데 그 길이는 10m에 불과하다. 그러니 국내 '대교'라는 이름을 단 다리치고는 가장 짧은 셈이다.
▲ 바다에서 갓 돌아온 어민들이 백령도 특산물 삐투리를 건져올리고 있다. |
ⓒ2006 박상건 |
담수호를 농수로 사용하지 못한 농민들은 관정을 파서 지하수를 끌어 올려 농사를 짓는다. 갯물이 빠진 물을 사용한 탓에 쌀 맛이 아주 좋다. 이 쌀가루에 짠 김치를 넣어 만든 것이 백령도 토속음식 '짠지떡'이다. 마을사람들의 토속음식이다. 메밀 칼국수에 이 짠지떡 그리고 막걸리 한사발이면 농번기의 시름을 풀 수 있었다.
논밭농사 외에 이 지역만의 특산물을 생산하며 소득을 높이는 주민들도 많다. 혈액순환, 피로회복, 신경통에 좋다는 백령도 약쑥은 대표적 특산품. 서해의 최북단의 해풍과 해무를 맞으며 자생한 무공해쑥이다. 주민 유옥자씨는 "어업을 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가능하면 고소득을 내는 농업을 하려는 게 주민들의 생각"이라고 전하면서 "9년 전부터는 인삼을 재배하는 농가도 늘어나고 있는데 백령도는 일조량이 적어 유실수를 심을 수 없다는 점이다"라고 안타까워 했다.
백령도는 문화유산도 많은 섬이다. 진촌리 일대 7만6천 여 평에는 패총이 널려 있다. 주변에 도끼, 토기편들이 산재해 있다. 한국문학의 무대이기도 하다.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던진 인당수와 심청이가 환생했다는 연봉바위, 그 무대가 저 편 장산곶과 연꽃이 흘러왔다는 백령도 앞바다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고봉포구 산자락에 심청각이 건립돼 있다. 건물 안에는 당시 무대를 재현하는 모형도와 심청전에 관련된 판소리, 영화, 고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천연비행장 사곶해안. 군트럭 바퀴자국이 선명하다 |
ⓒ2006 박상건 |
6·25 때 유엔군이 임시 활주로로 사용했던 이곳은 군사용 천연비행장이다. 썰물 때는 300m 이상의 단단한 도로가 생겨 군수송기 이착륙이 가능하고 자동차가 시속 100㎞ 이상 달릴 수 있는 신비의 해변이다. 이런 천연 활주로용 해변은 이탈리아 나폴리와 함께 백령도 사곶해변 뿐이다.
백령도는 어민들의 생활 근거지인 용기포, 오군포, 고봉, 사항 등 7개의 포구 외에 모두 선박 출입이 금지돼 있다. 바닷가마다 큰 쇠기둥을 박아놓은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이를 '용치'라고 부른다. 용의 이빨이라는 뜻. 간첩선의 접근을 막기 위한 안보시설물이다.
▲ 콩알만한 돌들로 해변을 이룬 콩돌해안 |
ⓒ2006 박상건 |
▲ 최전방 해병대 OP에서 내려다 본 백령도 산줄기와 남쪽 한계선 바다 |
ⓒ2006 박상건 |
참모장은 "이곳 부대는 해군과 공군이 함께 주둔 중이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완벽한 군사 조직과 무기를 갖추고 있는데 그래서 백령도 부대를 '작은 국방부?'라도 부르기도 한다"는 것. 최근 어민들의 생활이나 남북 대치 상황을 묻자, "늘 군사적으로 긴장 지대이고 좁은 어업한계선 때문에 어민들이 고기잡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어민들이 조금만 방심하면 어선이 북쪽으로 밀려 갈 수 있기 때문에 경비정과 지도선이 늘 따라붙는 가운데 조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꽃게가 많이 잡히는 백령도는 5~6월이 성어기이고 건너 편 연평도는 4월이 제철인데 어민과 군인들이 가장 긴장하는 시기란다. 이런 까닭에 이 지역에서는 야간조업을 할 수 없다. 매년 8만여 명의 여행객들이 찾는 백령도이지만 이런 대치상태 때문에 섬 곳곳이 지하벙커 등으로 요새화 되어 있었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60일 동안 전투할 수 있는 무기와 식량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게 긴장과 평화가 동시에 출렁이는 섬, 백령도.
이렇게 군사지역이면서도 해양관광의 진면목을 자랑하는 곳이 또한 백령도이다. 앞서 소개한 사곶해변, 콩돌해안에 이어 일행은 두무진으로 향했다. 차량으로 이동하던 섬내 체험코스에서 해안절경을 감상하기 위해 유람선으로 옮겨 탔다. 유람선은 대중가요를 요란하게 틀고 운행하는 남쪽 바다의 그런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어민들이 어업용으로 사용하는 조금 큰 어선이었다.
두무진 해상관광은 백령도 여행의 백미이다. 비경 중의 비경으로 불리는 두무진은 "서해의 해금강"이라고 일컫는다. 백령도 북서쪽 4km의 해안선이 온통 기암괴석들로 바다에 병풍을 치고 있다. 흑산도 홍도와 거제도 해금강, 거문도 백도의 기암절벽과는 또 다른 맛을 우려내고 있었다. 두무진 절벽은 수 천 년 동안 비바람에 깎이고 다듬어져 짙푸른 바다와 함께 호흡해왔다. 선대바위, 형제바위, 장군바위, 코끼리바위 등이 마치 투구를 쓴 장군들의 회의 장면 같다고 하여 두무진(頭武津)이라 불렀다.
▲ 물범과 가마우지 서식지인 물개바위 |
ⓒ2006 박상건 |
▲ 두무진 절벽에 설치된 해안초소 |
ⓒ2006 박상건 |
우리는 우리를 응시한 게 아니라, 장산곶 매 한 마리를 응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시인, 분단의 아린 상처 훌훌 털고 날아오를 그 장산곶매를 기다리는 초병이라고 믿고 싶은 이 낯설음의 현장. 한 편의 시가 낯설어야 작품이 된 것처럼 저 낯선 풍경도 분단조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하고 각별한 풍경인 것이다. 분단조국의 후손임을 부인할 수 없는 낯선 풍경이 풍경화가 아닌 사실화라는 점은 가슴 저미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낯설음이 사라지고, 남북 한계선을 한계 없이 넘나드는 통일의 바다를 꿈꾸는 섬이 백령도이리라.
▲ 두무진 선대암 기암괴석 사이로 지는 노을. 맞은 편이 장산곶 바다이다 |
ⓒ2006 박상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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