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쌍계사 벚꽃 길엔 꽃망울만 부풀어 오르고

鶴山 徐 仁 2006. 4. 16. 11:13

 

[오마이뉴스 최성수 기자]
▲ 산동마을, 산수유 꽃 피어 봄 오다
ⓒ2006 최성수
구례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봄이 가득했습니다. 터질듯 부풀어 오른 벚꽃 망울들은 부질없이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섬진강 물살은 제 울음을 안으로 감춘 채 몸 뒤척임도 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꽃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꽃이 눈물짓게 하는 것은 그 꽃을 함께 보던 사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쌍계사 십리 벚꽃 길을 걸으며 나는 아직 피지 않은 벚꽃들에 대한 그리움과 이미 피어 더없이 쓸쓸한 매화꽃의 봄날을 생각했습니다.

산동마을,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피다

결혼을 한 뒤, 약초 공부하는 남편과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고 사는 제자 현삼이가 봄꽃이 좋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현삼이, 그 친구를 떠올리면 나는 내 생의 가장 환하고도 쓸쓸한 한 시절을 기억하게 됩니다. 전교조 관련으로 학교에서 쫓겨났던 그 해 여름, 학교 밖 학교인 문예교실에서 만난 내 제자 현삼이는 늘 바지런하고 열정적인 친구였습니다. 그 때 그 아이는 고 3이었고 나는 서른 초반이었습니다.

▲ 산수유 두 그루 마주보며 웃고 있는 산동마을의 봄
ⓒ2006 최성수
돌아보면, 서른 초반의 나이는 봄날이었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터무니없는 열정과 의욕이 봄꽃처럼 터져 오르던 시기였으니까요. 그 환한 봄날, 갈 곳이 없는 삶을 살아야 했던 아득함이 열정과 공존하고 있었으니 환하고도 쓸쓸한 시기일 수밖에요.

현삼이의 전화를 받고 그때 우리 모둠이었던 친구들 몇과 우리 가족은 봄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구례구역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우리는 마치 인생의 소풍을 떠나는 나그네처럼 삶아온 계란을 까먹고 싸온 김밥을 나누어 먹으며 신이 났습니다. 기차 차창으로 부서지는 햇살조차 눈부신 봄날이었으니까요.

달리는 햇살 속에서 나는 얼마 전 <한겨레 신문>에 썼던 현삼이에 대한 이야기도 떠올렸습니다.

▲ 제 몸 뒤채는 소리도 없이 흐르며 봄을 불러오는 섬진강
ⓒ2006 최성수
현삼이가 결혼을 했다. 현삼이는 내 제자다. 제자는 제자지만, 학교에서 가르쳐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제자다. 그래도 나는 다른 어떤 제자보다도 현삼이를 소중한 내 제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현삼이를 만난 것은 그 애가 고등학교 3학년 때다. 그때 나는 교사 문인들의 모임 '교육문예창작회'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그 단체에서 여름이면 청소년 문예교실을 열었다. 그해, 나는 그 교실 한 모둠의 담임이었다. 그리고 현삼이는 내 모둠의 학생이었다. 공동 창작에도 열심이었고 종합 발표회 준비에도 열성적이었던 현삼이는 키는 작지만 마음은 한 없이 큰 친구였다.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를 열창할 때는 진지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상고에 다녔던 현삼이는 졸업 후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몇 해 뒤, 내게 찾아온 그 애가 불쑥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 회사 그만 뒀어요. 배낭 메고 한동안 세상을 떠돌고 싶어요." 그런 말을 남기고 그 애는 푼푼이 모은 돈을 다 털어 배낭여행을 떠났다. 어느 때는 네팔에서 엽서가 날아오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인도 소식을 담은 이야기를 전해 오기도 했다.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 애는 다시 취직을 했고, 대학에도 들어갔다. 세상을 떠돌며 배운 생생한 경험이 그 애의 삶에 큰 자양분이 되었을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외로움이 컸던 그 애에게 나는 아마도 부모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결혼식에 앞서 그 애는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선생님, 저 결혼해요. 부산에서 하는데, 선생님께서 오셔서 축하의 말씀 한 마디 해 주세요." 나는 그 애의 결혼식에 가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삶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을 살라는 당부의 말을 했다. 그 애가 살아온 삶의 곡절을 잘 아는 나로서는, 결혼 후의 삶이 의무보다는 즐거움이 되길 바라서였다.

결혼 뒤, 현삼이는 남편과 함께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지리산에서 조그만 농사를 지으며 약초 공부를 한다고 했다. 평소 산을 좋아해 주말이면 산에서 살다시피 하고, 산을 찾아 네팔을 떠돌기도 했던 그 아이에게 지리산은 얼마나 잘 어울리는 삶터인가.

자신이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하며 살기에도 생은 짧다. 바쁜 일상에 쫓겨 살아가다가 나는 때때로 지리산으로 들어간 현삼이를 생각한다. 시간에 떼밀리지 않고 살아가는 그 아이의 삶이 내가 꿈꾸는 삶이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우리의 생이란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과의 소중한 관계 때문에 더 빛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차가 구례구역에 도착합니다. 역에는 제자 부부가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손을 흔드는 젊은 부부의 얼굴에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봄은 봄이었습니다.

▲ 섬진강 가, 늘어진 벚꽃에 감겨 일렁이는 봄볕
ⓒ2006 최성수
"산동 산수유 축제가 오늘부터예요. 거기 들렀다가 가죠."

현삼이가 높고 맑은 소리로 제안을 합니다. 그 목소리에도 봄볕이 묻어 있습니다.

산동 산수유 길에는 온통 차량 홍수였습니다. 산수유 꽃망울은 흐드러지는데, 그 파스텔 톤의 흐릿한 꽃송이 너머로 봄이 저만치서 오고 있었습니다. 봄은 꽃망울에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봄은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오는 것입니다. 길을 메우고 서서 꽃구경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엔 지난겨울의 길고 매서웠던 추위는 기억조차 없어보였습니다.

세상천지 온통 메마른 시절,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피어나는 꽃이 있어 우리네 땅 비로소 봄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잎보다 먼저 꽃이 피는 봄꽃은 그래서 더 빛나는 것이겠지요.

섬진강 길 따라 꽃송이들은 피어나고

산동을 나와 하동으로 가는 길, 차들은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나은 편이에요. 벚꽃이 한창일 때는 아예 움직일 생각을 말아야 한다니까요."

"동네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올 생각도 안 해요. 벚꽃이 질 때까지 집안에 갇혀 지내는 걸요."

▲ 꽃들 어울려 피어 이 땅에 봄 온다
ⓒ2006 최성수
제자 부부가 그런 말을 합니다. '벚꽃이 질 때까지 집에 갇혀 지내다니, 그야말로 꽃감옥이군'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벚꽃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어느 봄날, 섬진강 강변을 거쳐 쌍계사 십리 벚꽃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지는 벚꽃처럼 어쩌면 내 생도 스러지는 시기가 된 때문이겠지요. 분분히 지는 꽃잎을 맞으며 생의 어느 한 순간, 이렇게 아름다운 날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서 있다시피 한 차에서 내려 그냥 섬진강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햇살에 아롱대는 섬진강 몸피가 마음을 가라앉게 합니다. 강가로 일찍 핀 벚꽃이 하늘하늘 바람에 꽃잎을 흔들고 있습니다. 흔들리고 흔들리며 피는 봄꽃들처럼, 우리의 삶 또한 흔들리며 저 물살처럼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리산 계곡에도 봄빛은 가득하고

마당가에 나와 서니, 아침 햇살이 눈부십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뒤뜰의 물앵두나무가 아침 햇살에 빛납니다.

지리산 자락에 묻혀, 지리산 나무처럼 서로 순하게 살아가는 제자 부부는 아침 준비에 바삐 움직이다가 나를 집 뒤 텃밭으로 끌고 갑니다. 작은 텃밭에 고랑을 일구고 갖가지 애채들을 심어놓았습니다. 뾰족뾰족 솟아오른 새싹들을 보니, 신혼인 제자 부부가 그 새싹을 닮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아침을 먹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납니다. 산 속에 깃들여 염소를 키우고 약초를 키우며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합니다.

▲ 제자 부부가 깃들여 사는 집. 집처럼 그들도 순하게 기대 산다.
ⓒ2006 최성수
▲ 걸어 말리는 약초. 그들의 삶도 저렇게 소박하기를...
ⓒ2006 최성수
때때로 우리를 경계하는 새 소리만 울리는 지리산에서는 우리도 한 마리의 산새 혹은 봄볕이 됩니다. 세상을 떠나 또 다른 세상에서 만나는 것들의 눈부심! 아, 봄은 정말 눈부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지도 모릅니다.

죽음의 계절을 이겨내고 눈부시게 솟아오르는 봄꽃송이들과 그 꽃송이를 끌어당겨 세상에 풀어놓는 햇살이며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른 새싹들이며 얼음 녹은 골짜기를 휘돌아 흐르는 봄 물살들은 모두 눈부심입니다.

산길에서 내려오는 걸음, 물소리에 홀려 물가로 내려섭니다. 큰 바위 등짝으로 햇살이 자락자락 내려앉습니다. 그 햇살을 풀었다 묶었다 하며 봄 물이 흐릅니다. 바윗덩이의 옆구리를 치고, 혹은 머리통을 넘어서며 흐르는 물소리가 상쾌합니다.

▲ 지리산 계곡, 물줄기 신명나게 흘러 봄이 왔음을 알린다
ⓒ2006 최성수
내가 두고 온 세상의 모든 근심들이 다 씻겨 나가는 듯합니다. 한동안 물가를 떠날 줄 모르고 미적거린 것은, 이 봄이 너무 빨리 지나갈까 저어해서이고, 흐르는 물줄기에 내 속된 마음 다 못 씻을까 하는 쓸데 없는 조바심 때문입니다.

쌍계사 근처는 온통 차 밭입니다. 좁고 긴 골짜기, 변변한 농토도 없는 곳이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것은 차가 재배되고 지리산의 넉넉한 품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차밭에도 봄이 가득하다. 저 싱그러운 봄 빛깔!
ⓒ2006 최성수
차 밭도 봄기운을 받아 더 싱그러운 빛깔입니다. 정말 봄이 오기는 왔나봅니다. 남쪽에서 시작해 북으로 북으로 치닫는 봄볕을 만나러 떠난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납니다. 그리운 사람을 미리 만나기 위해 마음 조급히 달려가는 첫사랑의 열병처럼, 봄꽃을 만나러 떠난 여행은 설렘과 눈부심이었습니다.

저무는 기차 역, 플랫폼에서 손을 흔드는 제자 부부의 손끝에도 봄 햇살은 어룽대고 있었습니다. 이제 지리산의 봄빛도 머지않아 내가 사는 서울, 잡답과 혼돈의 땅에도 찾아올 것입니다. 그날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아마 지리산에서 먼저 만난 봄 때문일 것이고, 그 지리산 자락에 깃들여 살아가는 내 제자 부부의 작고도 소박한 마음을 엿본 때문일 것입니다.

▲ 물앵두 활짝 피었다. 마음도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