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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史] 환국한 北關大捷碑

鶴山 徐 仁 2006. 2. 4. 15:35

어제 환국한 "북관대첩비"에 관한 '역사스페셜'을 보고 벅찬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힘 없는 나라가 되어 그런 수모를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좋은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북관대첩비의 환국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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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毅公 農圃 鄭文孚 (1565.2.19. - 1624.11.19.)

 

[어르신을 감히 모시게 되어 외람스러우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문부 의병장은 1565년 서울에서 태어나 11세 때부터 論語를 읽고 四書三經에 통달했으며, 天文, 算數뿐만 아니라 활쏘기까지 문무를 겸비한 선비로 성장했다.

21세에 생원과 진사시험에 모두 합격했고 23세 때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24세 때인 1588년 문과에 급제, 이듬해 승정원 주서, 부정자, 정자(정7품), 홍문관 수찬(정6품), 사간원 정언(정6품), 사헌부 지평(정5품) 등 내직을 두루 역임했다.

1591년 자원하여 북변(함경도 지역) 근무를 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전란 와중에 회령지방의 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잡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기며 왜군에 투항하자 격분한 선생은 의병을 조직, 함경도 鏡城에서 국경인 일당을 참수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어 장평전투, 임명전투, 백탑교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쳐 관북지방을 왜군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했는데 이를 통틀어 "북관대첩"이라 한다.

당시 이들 길주지역에서의 전투는 정문부 의병대장의 탁월한 지략과 전술에 의해 임진왜란 전사에 길이 남을만한 대승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조선조 숙종 때 이 전투를 기념하여 함경북도 길주에 북관대첩비가 세워졌다.
정문부 의병장은 왜군을 몰아낸 후 부역을 공평히 하는 한편, 치안질서와 혜민에 힘쓰는 등 어진 목민관의 진면목을 발휘했다.

임진왜란 이후 선생은 장례원판결사, 호조참의,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607년 다시 외방의 수령으로 나가 장단부사, 남원부사, 길주목사 등 지방 목민관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했으며 1615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혼란스런 중앙정계를 통탄하여 거절했다.

그러나 1624년 李适의 亂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모진 악형으로 고문받던 중 이를 견디지 못하고 60세의 일기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후에 伸寃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경성의 창렬사, 부령의 청암사에 배향되었고 저서로 "農圃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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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왜놈들이 한 짓을 보라! 머릿돌로 얹혀놓은 것이... 지금 사진은 이것밖에 없지만 곧 잘 복원된 옛모습의 碑를 이 사진 대신에 다시 올리게 되기를 기대한다.]

 

 

[1]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 침입한 왜군을 격파하여 대승을 올린 정문부(鄭文孚) 의병장의 공적을 기록한 비로서,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이다.

함경도 의병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른 것,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鞠敬仁)을 처형한 전말 등이 1,500자 비문에 소상히 적혀 있다.

조선 숙종 때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에 건립하였다.
1905년 러·일 전쟁 때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소장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는 주민들을 협박해서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옮겼다.

이 사실을 1978년 도쿄[東京]에 있는 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이 밝혀내었다.

'군국일본'의 상징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방치되어 있어, 비문에 이름이 있는 의병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내는 등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독립기념관 제1전시관에 있는 대첩비탁본은 중훈대부(中訓大夫) 장락원정 지제교 최창대(崔昌大)가 글을 지었고 「북관대첩비」라는 두전(頭篆)을 쓴 이는 당대의 명필인 이조참의 윤덕준(尹德駿)이요, 효릉(孝陵)참봉 이명필(李明弼)이 글을 쓴 것.]

 

[2] 선조 25년(1592) 4월 14년 왜적이 부산에 상륙한 이래 파죽지세로 북상을 하자, 4월 29일 조정에서는 왕자들을 여러 道에 보내 勤王의 兵을 招募키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로 임해군(臨海君) 진을 함경도로, 순화군(順和君) 보를 강원도로 보내었는데 상황이 급변하여, 5월 2일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가 서행(西幸)을 하게 되었으며, 당초 강원도로 들어가려던 순화군 일행이 철원(鐵原)에 이르렀을 무렵 왜적이 벌써 강원도 지방에 진입하게 되었으므로 순화군 일행은 함경도로 들어가 임해군 일행과 합류하여 회령에 머물게 되었다.

왜적은 계속 북진을 거듭하였는데 관군은 도처의 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하여 두 왕자가 머물고 있던 함경북도까지 진격해오게 되었다.

관군의 연전연패로 말미암아 극도로 혼란한 사회와 치안부재의 틈을 타 명천(明川)의 사노(寺奴) 정말수(鄭末秀)와 회령의 토관진무(土官鎭撫) 국경인(鞠敬仁), 경성의 관노(官奴) 국세필(鞠世弼)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왜적에게 내통을 하였다.

특히 국경인은 7월 23일 마침 회령에 머물고 있던 두 왕자와 배종제신(陪從諸臣) 및 그 가속(家屬)들과 남병사(南兵事), 회령부사 등을 포박하여 왜적에게 넘겨 주었다.

이리하여 반민(叛民)의 도움으로 북도(北道) 땅을 무혈획득한 가등청정(加藤淸正)은 두 왕자를 볼모로 잡게 되었다.
왜적이 침입한지 3개월만인 7월에 함경도가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반적이 북도 전역을 장악하게 되자 이를 토멸(討滅)코자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느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문부 의병장이었다.

정문부는 해주(海州)인으로서 자(字)는 자허(子虛), 호(號)를 농포(農圃)라 하였다.

선조 21년(1588)에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24년(1591)7월에 함경북도 병마평사(정6품)에 임명되었다.

선조 25년(1592) 8월에 정문부는 북도에 피난와 있던 전(前)관찰사 이성임(李聖任)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으나 군사들이 흩어짐으로써 실패하고 후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얼마 후 이붕수(李鵬壽), 종성부사(鐘城府事) 정견룡(鄭見龍), 경원부사(慶源府事) 오응태(吳應台) 등이 합세하여 군사를 다시 모았다.

대장을 정함에 중론(衆論)이 정문부를 대장에 추대함으로 정문부가 대장이 되고, 부장에 정견룡을, 별장(別將)에 이붕수를, 척후장(斥候將)에 강문우(姜文佑)를 세우고 대오를 정비하였다.

9월에 들어 길주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100여급을 격살하여 첫 승리를 거둔 후 격문을 사방에 돌려 의병의 수를 늘린 다음, 10월에 국경인 일당과 정말수 도당을 토멸시키니 마침내 명천 이북의 열읍(列邑)을 모두 수복하게 되었고, 관군이 합세하니 의병이 수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10월 30일 장평(長坪)전투에서 왜병을 820여급이나 베고 군마 118필과 수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세웠다.

11월 19일 쌍포(雙浦)전투에서는 왜적을 10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며, 선조 26년(1593) 1월 23일 단천(端川)전투 에서 왜적을 170여급이나 베는 전과를 기록하였는데, 이후로 왜병은 길주성에 웅거한 채 싸움을 하지 않아 관북의병이 길주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전선의 교착과 명나라의 출병은 왜적의 활동을 크게 제약시켜 잠시 한성방향으로 퇴군하고 있었던 가등청정이 길주의 왜병을 구원하기 위해 2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길주로 북상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정문부 부대는 1월 27일 백탑교(百塔郊)전투에서 왜적을 대파시킴으로써 왜적이 철수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 백탑교 전투 이후 관북지방에서는 왜병의 그림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왜적들에 의해 유린되었던 고토(故土)를 회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3] 1904년 노일전쟁이 발발하자 노군(露軍)을 두만강 밖으로 구축하기 위해 함경도에 진주(進駐)했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 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대장) 예하 후비(後備) 제2사단(사단장 삼호성행(三好成行)중장)의 제17여단장 지전정개(池田正介)소장이 함경북도 학성군(鶴城郡) 학중면(鶴中面) 임명역(臨溟驛)에서 이 비석을 발견하고, 이를 철거하여 1905년 사단장 삼호(三好)중장이 귀국시에 일본본국으로 탁송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비는 그해 10월 28일에 히로시마(廣島)에 도착하였는데, 그 이듬해인 1906년 5월 27일에 동경으로 이송되어 궁성내(宮城內) 진천부(振天府)에 진열되었다가 다시 정국신사 경내 유취관(遊就館)으로 옮겨졌다.

북관대첩비가 현지에서 철거된 이유에 대해 일본은 "양국의 화의(和意)를 손상할까 우려하여 옮겼다"라는 억측을 늘어 놓고 있다.

이 비를 발견한 최초의 한국인은 조소앙이었다. 1904년 최린·최남선 등과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에 파견된 조소앙은 1909년 정국신사에 갔다가 우연히 이 비를 발견하고 그 소감을 「 大韓興學報」제5호 (1909. 7, 대한흥학회)에 적어놓고 있다.

물론 이같은 사실도 1978년에 재일한국인 유학생이 남겨 놓은 이 비에 대한 기록을 접하면서, 이를 근거로 신사 경내를 샅샅이 뒤져서 찾아낸 것이라 하니 비석에 대한 국민적 망각성에 경종을 울린 결과라 하겠다.

 

[4] 대첩비의 건립연대는 숙종 35년(1709)으로서 임진왜란이 끝난지 100여년 지난 후에 세워졌다.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 세워지게 된 큰 원인으로는 의병대장 정문부가 당시 관찰사였던 윤탁연(尹卓然)의 미움을 산데 있었던 것으로서 일개 평사(評事)인 정문부가 자기 휘하에 들지 않는다 하여 정문부의 군공(軍功)을 시기하고 백방으로 모해(謀害)한 까닭에 있다.

관북지방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음에도 그 대장이 조정으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마침내는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관북사람들에게는 여간 불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뒤 함북지방민의 송원(訟寃)에 의해 신원(伸寃)이 되어 현종 7년(1666)에 비로소 정문부에게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를 특증(特贈)하고, 이붕수등 남북도 의병장 20명에게 차등을 주어 각각 증직(贈職)을 내리었다.

그 해 10월 사당(祠堂)에 현종이 「창렬(彰烈)」이라 사액(賜額)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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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비문]

 

(篆額) 北關大捷碑

有明 朝鮮國 咸鏡道 壬辰倭亂大捷碑

빛나는 朝鮮國 咸鏡道 壬辰(1592, 宣祖 26, 文祿元年) 義兵大勝碑

 

中訓大夫守掌樂院正知製敎

             兼世子侍講院輔德      崔昌大 撰
通政大夫史曹參義知製敎          尹德駿 篆
朝散大夫前行 李陵參奉            李明弼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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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倡義討倭圖]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북관대첩'에 관한 내용을 담은 18세기 기록화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가 확인됐다.

북관대첩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함경북도 길주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왜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이 장면을 담은 "창의토왜도"는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한 화첩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에 들어있다.

높이 41.2㎝, 폭 31㎝ 종이에 그린 채색화로, 1708년(숙종 34년)에 건립된 북관대첩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출처 : http://www.bukgwan.com/main_index.php ]


 
출처 : 블로그 > impressionistically | 글쓴이 : Impressed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