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支刀
백제왕이 일왕에게 하사한 철제 칼로서, 일본 나라[奈良]현 텐리[天理]시에 있는
이소노가미[石上]신궁에 봉안되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에 백제가 왜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는 74.9㎝로서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
칼이다.
칼의 몸 좌우로 각각 가지칼이 3개씩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칼몸의 앞과
뒤에는 60여 글자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고, 그 외곽을 가는 금선
으로 둘렀다.
칠지도의 명문은 이소노가미신궁
대궁사(大宮司)로 있던 간마사도모[菅政友]가
1870년대에 처음으로 확인한 이래 지금까지 그 명문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다.
칼의 제작연대를 비롯해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것인가 하사한 것인가를 둘러
싸고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일본학자들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인하여 고대 일본이 가야지역을 200년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한 근거로까지 이용되었다.
최근의 명문해석에 의하면, 그 제작연대는 369년(근초고왕 24)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태화(泰和) 4년 5월 16일 병오(丙午) 정양(正陽)에 100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는데,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며 편안히
후왕에게 나누어 마땅하다.
(아무개가 이 칼을)
제작했다"라는 것과 "선세(先世)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었기 때문에 성상(聖上)의 말씀으로 짐짓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백제의 우위를 명백히 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명문에는 백제왕의 '말'을 극존칭인 '성음'이라고 표현한 데 반하여
상대방인 왜왕에게는 경어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형의 하행문서양식으로 되어 있어 이같은
해석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부월(斧鉞)이나 도검(刀劍)의 하사는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신표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주목할 때, 백제왕의 칠지도 하사의
동기는 왜왕에 대한 일본열도 내에서의 일종의 대표권을 승인하는, 양국간의 종주
·신속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는 백제왕이 그 권력범위를 확대하려는 데
근본목적이 있었다.
한편 칠지도의 형상은 단군신화에 보이는 신단수와 같이 신앙의 대상을 도형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백제왕권이 하늘과
연결되는 신성성, 즉 초월적인 권위 및 사방천하관(四方
天下觀)이 반영되어 있으며 천손을 자처한 백제왕의 역할과 권위를 과시하는
주술적 성격의 성구(聖具)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칠지도의 일부로 생각되는 유물이 부여 군수리 절터의 탑기둥 구멍 밑에서 출토된
바 있어 주목된다.
더 상세한 내용은 아래의 블로그에서
참조하세요.
[ http://blog.daum.net/skj2475/4776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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