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가 노나라를 유람중에 길가에 앉아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는
"노인장! 그토록 즐거운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이유야 많소만, 천지 만물중에 오직 사람이 최
고인데 다행히도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나의 첫째 즐거움이요,
남존여비인 시대에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니
이것은 나의 둘째 즐거움이요,
목숨엔 길고 짧음이 있어 어떤 사람은 태어나
자마자 죽고 젊어서 죽고 병들어 일찍 죽거늘
나는 이렇게 95세 까지 건강하니 이는 나의
셋째 즐거움이라오,
생활의 가난쯤이야 난 본래 소욕으로 소박하
니 극히 평범한 일이며, 죽음이야 삶의 종점일
뿐인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오?"
"노인께서는 삶을 이해하는 참 지자(智者)
이십니다."
* * * * * * * *
가난한 것, 늙는 것, 죽는 것은 인간의 근심
거리임에도 노인은 낙으로 삼았다.
원숭이를 기르는 자가 먹이로 도토리를
주는데 하루는 원숭이에게 말하기를...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개를 주면 어떻냐?"
"으앙! 으앙! 으앙!" 하고 싫어했으며
"그럼 아침에 네개, 저녁에 세개를 주면
좋겠느냐?"
"낄!낄!낄!" 하고 즐거워 했다.
즉 조삼모사(朝三暮四)와 조사모삼(朝四
暮三)은 결국 같으면서도 원숭이들의 희
비(喜悲)를 엇갈리게 해놓았다. 인간들도
원숭이와 같은 착각과 어리석음을 범한다.
사실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데도 그것을
모르고 눈앞의 차별에 사로 잡혀 기뻐하
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이것은 한쪽
단면만을 옳다고 하는 처지에 묶어놓기
때문인것이다. 모순이 있는채 그대로 긍
정(肯定)도 되고, 대립하는 그대로 의존
(依存)하는 무한한 자유스런 경지에 도달
하지 않는한 사람은 그러한 속박에서 벗
어나지 못한다.
마음의 본체인 진리는
아무리 따져 봐도
이해가 되지 않나니,
지식과 알음알이로써
사고하고 추구해서
혹은 연역법(演繹法)으로나
혹은 귀납법(歸納法)으로나
혹은 삼단논법(三段論法)의
사고형식을 빌어서 분석하고
추리하여서는 얻어지지 아니하며,
생각생각 이어지는
분별심으로 미치지 못하며,
생각과 말과 글이
모두 끊어진 그 자리는
모양과 양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마음 자리를 떠나서는
생각이 나올 수 없고
주관 객관이 벌어질 수 없으며
근본 바탕인 청정한 마음은
항상 스스로 둥글고 밝아서
두루 두루 비추고 있는데
중생들이 깨닫지 못하고
보고 듣고 분별하고
아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서
그것으로 덮어 씌워 있기 때문에
밝고 오묘한 본체를
보지 못하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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