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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b>실학자 1명은 아니지만 여러명</b>

鶴山 徐 仁 2005. 12. 18. 17:25
1. 이수광

조선 중기의 문신, 실학의 선구자.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가 1614년에 완성한 '지봉유설'은 전 20권의 백과 사전이다. 이 책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비교하면서 우리 나라가 중국과 동등한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자세히 밝혔다. 그리고 다른 문화권을 소개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2. 유형원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치, 경제,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국가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고 사실을 중시하는 학문 태도를 주장하여 조선 후기 실학 발전의 토대를 쌓은 인물이다. 그가 지은 '반계수록'에는 토지 제도, 조세 제도, 교육 제도, 과거 제도, 관리 임용 제도, 군사 제도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이 담겨 있었다. 특히 농민들에게 땅을 고루 나누어 주자는 균전제는 이후 실학자들의 토지 제도 개혁안의 출발점이 되었다.



3. 이익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 실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정약용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익은 경제, 제도, 군사, 천문, 지리, 역사, 풍속 등 광범한 분야에서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 제도, 미신, 승려, 게으름을 국가 발전을 해치는 6가지 원인이라고 말했으며, 농업을 향상시키고 농민을 보호하자고 주장하였다.



4. 박제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를 방문하여 그 곳 학자들과 학문을 교류하면서 청나라의 문물을 수입하는 데 앞장을 섰으며, 북학파(청나라에서 발달한 실용적인 학문을 북학이라 불렀는데 이를 따르자고 주장한 실학자들)의 사상을 집대성했다. 1778년에 청나라에 다녀온 후, 청나라에서 경험한 것을 '북학의'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정치, 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 방안뿐만 아니라 생활 도구의 개선 등을 다루었다. 1786년에는 당시 임금인 정조에게 신분 차별을 없애고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을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5. 정약용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은 학문을 하는 데 이론과 실천을 함께 갖출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 그래서 우주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와 구체적인 사회 개혁의 추구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경세유표'를 통해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한 원칙을 내놓았고,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통해서는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지방 수령이나 향리들의 부정 부패를 비판하고 올바른 지방 관리의 행동 지침을 제시하였다. 1792년에는 수원 화성을 쌓는데 수레와 거중기를 직접 제작하여 성을 쌓는 비용을 크게 줄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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