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敎育.學事 關係

교육개혁을 위한 한 작은 목소리(1) ~ (3)

鶴山 徐 仁 2005. 12. 1. 22:08
교육개혁을 위한 한 작은 목소리(1)
최성재   

 한국인의 첫사랑(교육), 情婦(정치)1
 
 [한국인 앞에서 교육과 정치에 대해 논하지 말라]
 
  한국은 언제나 나라 전체가 열기로 후끈거린다. 열기의 근원은 둘이다. 그것은 바로 교육과 정치다.
 이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나라를 숫제 태워 버릴 정도이다. 국민들은 아예 살이 익을 정도이다. 한증탕에 들어있는 듯하다.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은 이 한증탕을 떠나지 못한다. 땀 한 번 빼고 나면 비록 맥이 빠지긴 하지만 시원해지는 그 맛을 잊지 못한다. 한국인들은 입시와 선거라는 한증탕을 잊지 못한다. 말로는 지겹다고 하지만, 참으로 이 열기를 사랑한다.
 
  입시철만 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부모, 친척, 사돈팔촌, 동네 사람 모두가 몸살을 앓는다. 수험생은 하나같이 공주요 왕자다. 전 국민이 수험생 눈치만 살핀다. 아무리 엉터리 짓을 해도 공부 시늉만 하면 부모는 입이 있는 대로 벌어진다. 꿈이 한껏 부푼다. 맛있는 것 마구 사다 나른다.
 
  수학 능력 시험 본다고 전 경찰차와 사이드 카와 앰벌런스가 비상 대기하고 전 국민의 출근 시간이 한 시간 늦어지는 나라가 이 지구상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희한하게 수능 보는 중에는 범죄율도 뚝 떨어진다. 사실은 이 때가 한 건 올리기 제일 좋은데도 말이다. 그들마저 흥분한다. 조마조마하다. 똘마니나 애인 동생, 친동생, 사촌, 동네 아이, 고향 아이 등 한둘은 다 관계있다.
  건수는 수능 끝나고 나서 그 날 저녁부터 올려도 늦지 않다.
 
  수능철만 되면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된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유교 천도교 이슬람교 관계없다. 무신론자도 마찬가지다. 무당도 한몫 단단히 본다. 입시철만 되면 기도 제목은 어디나 똑같다.
 --우리 아들, 우리 딸 제발 시험 잘 보게 해 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선거철만 되면 모든 일이 중단된다. 사람들이 온통 정치 얘기다. 노숙자들도 밥을 굶으면 굶었지 아홉시 TV 뉴스는 놓치지 않는다. 비분강개, 환호, 야유--서울역에 난방이 전혀 필요 없다. 옆 사람과 의견이 안 맞으면 사생결단을 하고 주먹다짐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문은 정치 기사로 도배를 한다. 국민들은 이걸 한 줄도 빼놓지 않고 다 읽는다. 그 후에는 일제히 독후감 발표를 한다. 의견이 다른 사람은 슬그머니 피해서 평소에 뜻이 맞은 사람끼리 만나 입에 침을 튀기며 분통을 터뜨리고 눈에 힘을 잔뜩 주고 고함을 지른다. 칭찬과 비난이 멋진 화음을 만들어낸다.
 
  아무리 불법 과외 조치가 엄해도 한국인은 막상 자기 아들딸을 위해서라면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다. 상상을 초월한 아이디어가 총동원된다. 능력이 없어 못해 주지 능력만 닿으면 그까짓 법이야 아버지 어머니가 다 책임진다.
 
 장관도 국회의원도 판사도 교수도 의사도 검사도 경찰도 목사도 상인도 사장도 농민도 환경미화원도 경비원도 재야 운동가도 한국 사람은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건 부모가 무한 책임을 진다. 장관 자리 아까워하지 않고 국회의원 자리 아까워하지 않는다. 기꺼이 목숨이라도 건다.
  자기가 낳은 자식도 아닌 입양아에게 과외를 시켰다가 국내 최고 대학의 총장이 자리를 내놓는 적도 있을 지경이다.
 
  추상같은 선거법도 한국 정치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이제나 저제나 대통령이 제일 먼저 교묘하게 선거법을 어긴다. 선거판에 끼어 든 사람은 다 똑같다. 후보만 아니라 선거 운동원 심지어 자원 봉사자도 선거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거관리위원을 무서워하는 정치인은 숫제 희귀 동물이다. 선거관리위원은 대연각 호텔 불을 끈다고 다 깨진 바가지 들고 서 있는 기분이다. 신도림역에서 전도하는 기분이다.
 이윽고 기진맥진하여 멀건이 불구경만 한다. 성경을 내려놓고 사람 구경을 한다. 여기서 한 소리 더하면 속절없이 미친 사람이 된다.
 
 [교육은 한국인의 첫사랑, 정치는 한국인의 영원한 정부(lover)]
 
  왜 이럴까.
  왜 한국인은 교육과 정치에 이렇게 맹목적일까.
 
  그것은 교육이 한국인의 첫사랑( first lover)이요, 정치가 한국인의 영원한 정부(eternal lover)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을 위해서라면 중학생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정부를 위해서라면 팔순 노인도 눈에 뵈는 게 없는 법이다.
 
  첫사랑을 할 때는 성모 마리아보다 더 거룩하고 사랑스럽던 엄마도 귀찮기만 하고, 간통을 할 때는 50년 잉꼬 마누라도 쭈그렁 바가지로 보일 뿐이다. 첫사랑을 할 때는 하나님보다 믿음직하던 아빠도 징그럽기만 하고, 간통을 할 때는 브레드 피트 같은 남편도 추남으로 보이고 천사 같던 자식도 악마 새끼로 보이는 법이다.
 
  여기에 무슨 효도가 자리할 자리가 있고 무슨 법이 끼어들 소지가 있을까.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만 보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랴.
 
  이 때만큼 인간이 무의식 세계와 가깝게 지내는 때가 없다. 리비도 (libido)앞에 슈퍼 에고(super ego)는 맥없이 무릎을 꿇는다. 아니 안개처럼 사라진다. 설령 런던 포그가 몰려와도 더듬더듬 잘도 길을 찾아간다. 텔레파시가 발동하면 안개 속에서도 곧장 달려가 두 연인은 뜨겁게 포옹한다. 오히려 안개는 무드를 잡아주는 데 안성맞춤이다.
  도덕이 꾸중하고 법이 가로막아서 더욱 짜릿짜릿한 것이다.
 
  리비도와 에고(ego)가 혼연일체가 된다. 사는 것이 꿈속에서 꿈꾸는 것과 동일하다. 거기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도덕도 없고 법도 없다. 오직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이 뜨거운 교육 열기와 정치 열기를 제대로 살릴 수 없을까. 제대로만 살리면 우리나라는 전지구를 들었다 놨다 할지도 모른다.
  이 열기는 한마디로 기(氣)다. 기(氣)는 에너지다.
  이 에너지를 어찌하면 제대로 잘 이용할까.
  원자탄이 아닌 원자로로 만들까. (2000. 3. 18.)
  --계속--
 
[ 2005-10-26, 11:19 ]

 

 

 

 

 

교육개혁을 위한 한 작은 목소리(2)
최성재   

 한국인의 첫사랑(교육), 情婦(정치)2
 
 [한국인의 유별난 교육열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유교 경전이 과거 시험의 교과서가 되면서 일개 양민도 이론상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 될 수 있었다. 실지로 그런 일이 조선 중기 이후에는 아주 드물지만 나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의 귀족들이 몰락했다. 산과 내를 경계로 하던 그들의 어마마한 대토지와 농장(農莊)은 신진관료와 군인 곧 신흥 정치 세력에게 멋진 전리품이 되었다.
 
  조선의 태조는 조준의 2차에 걸친 상소에 따라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귀족과 사원의 손아귀에서 토지를 '무상몰수하여 무상분배'했다. 하급 무사와 하급 관리들이 귀족의 땅을 빼앗아 공전으로 대부분 할애하고 경기도의 논밭 곧 그들이 확보한 전국의 토지 50만결 중에 약 20%에 해당하는 경기도의 토지를 과전법에 의해 벼슬에 따라 골고루 나눠 주었다.
 자연 그들은 명실상부한 최상층 집단으로 올라섰다. 권력에 이어 돈까지 장악한 것이다.
 
 옛날 귀족에 대면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고려의 귀족이 수만 결을 가진 사람도 있었던 반면에 조선은 전 품계 18과 중에서 정1품인 제1과가 150결밖에 안 됨. 최하위인 제18과는 10결.), 그건 그들에게 대단한 재산이었다. 자다가도 자기 볼을 꼬집을 정도로 대단한 재산이었다.
 
  그들은 귀족의 기득권을 잘 대변하던 불교를 아예 미신과 동격으로 끌어내렸다. 권문세가 못지않게 어마어마하던 사원전도 당연히 빼앗았다.
  고려말에는 권문세가들이 나라를 사유화하는 바람에 국고가 텅 비어 재상의 녹봉이 360석이었지만, 겨우 20석밖에 못 받았다. 이젠 하급 관리도 20석은 확보했다.
 
  백성들은 고려초처럼 조세(tax)를 수확의 10분의 1만 내면 되었다. 권문세가에게 10분의 5 이상을 냈던 걸 생각하면 이건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과거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핵심 세력이야 당연히 개국 공신들이었지만, 그들이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불교를 배척하는 대신 조선의 권력자들은 유교를 유일한 종교이자 학문이자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유교 경전을 유일한 교과서로 삼았다. 검인정이 아니었다. 국정 교과서였다.
 --백성들이여, 이제 이것만 달달 외면 누구나 높은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 임금 빼고는 다 될 수 있다.
 
  고려는 비록 과거를 인재 등용의 관문으로 사용했지만, 역시 고려는 귀족의 나라였다. 과거(科擧)가 생각만큼 그렇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귀족 신분은 대대로 세습되었다.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 세금 한 푼 안 내고 군대도 안 가면서 그들은 각자가 왕후장상과 같은 생활을 했다.
 농민이 애써 지어 놓은 농작물을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 무려 다섯 배 여섯 배를 빼앗아가서 고스란히 챙겼던 것이다. 1년에 두 세 번씩 서로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교대로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원 나라는 권문세족이 이렇게 횡포를 부리면, 고려는 나라꼴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원격조정하기가 한결 좋았다. 그래서 그들은 권문세족의 횡포를 모른 척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들과 결탁했다. 물론 뇌물을 두둑이 받았다.
 
  그러던 것이 세금이 겨우 10분의 1만 내면 된데다, 일부 자작농도 생겼다. (조준은 원래 양민들에게도 토지를 나눠 주자는 제안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것만 해도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데, 과거에 급제하면 벼슬이 생기고 녹봉이 생긴다고 했다.
  고려와는 달리 재주만 있으면 양반에겐 누구나 크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조선에 들어서면서 과거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등용문이 되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양민은 누구나 이론적으로는 개천에서 뛰쳐나와 무지개를 타고 올라가 용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조선의 과거는 벤처 사업이다. 아이디어와 기술이 있으면 벤처 기업을 잘 일궈 코스닥에 등록하면 하루아침에 일확천금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보다 더 확실한 게 있었다.
  공장에서 죽어라고 일해도 입에 풀칠도 겨우 했는데, 이제 악덕 기업가가 쫓겨나고 새로이 회사를 접수한 사장으로부터 충분히 먹고 살만한 월급도 꼬박꼬박 받고 보너스도 분기마다 두둑이 받는다고 생각해 보라.
  조선 초는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이룩한 공산 혁명(토지 개혁)과 정보 혁명(벤처 열풍)이 한꺼번에 닥친 것과 같은 기가 막힌 기회의 시기였다.
 
  오늘날 정보화 시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민이 몰락하고 일부 정보화 선두 주자만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과 같은, 한 편으로는 부럽고 한 편으로는 불안하기만 한 오늘날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다 죽어가던 서민이 일제히 잘 살게 된데다 그 서민이 이론상으로는 권력과 부와 명예를 함께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코스닥이 뜨면서 젊은이들의 가슴이 얼마나 울렁거리는가.
 --지금은 무늬만 벤처인 회사가 흑자 기업인 대기업보다 시장가치가 더 높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거품 현상이 심각하다만.
 
  인생관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조선 초에 이보다 더한 변화가 있었다.
 
  오늘날의 아이디어와 기술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공부였다. 유교 공부였다. 교육이었다. 먹고 사는 걱정이 없어진 것만 해도 덩실덩실 춤을 출 지경인데, 자식 교육만 열심히 시키면 자식이 재상까지 될 수 있다니, 양반들이 교육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한국인이 이 때보다 희망에 넘쳤던 때가 없었다. 물론 일반 서민은 사실상 큰 혜택이 없었다. 노비야 말할 것도 없다. 10분의 1세금은 법이었지, 암암리에 정부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사전(private farm)에서 10분의 5를 바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사람의 자녀가 공부를 할 수 있었을 리 없다.
  이것은 오늘날 벤처 벤처 하지만, 모두들 가슴만 울렁거렸지 실지로 혜택을 보는 사람은 극히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국 예를 들면 아이디어가 발전하여 나스닥에 상장되어 뜨는 경우가 겨우 1백만분의 6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의 의식 구조가 온통 바뀌었다. 지금 한국인의 의식 구조도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조선 초의 한민족이 바로 그러했다. 설령 공부할 입장이 못 되어도 누구나 가슴에 공부에 대한 소망이 가득했다.
  교육열은 이 때 한국인의 의식을 넘어 무의식 세계로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다.
 
  한양에 온 중국 사신들은 하나같이 놀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글 읽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도 책을 거의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양반 집에서는 눈을 지그시 감고 누구나 글을 읽는 소리가 낭랑했던 것이다.
 --서양의 중세 대학생들은 밤에는 공부를 않았다. 등불이 너무 희미하다는 핑계였다.
 중국은 나라가 워낙 크고 지방 분권이 강했기 때문에, 벼슬길도 다양했고 먹고 사는 방법도 다양했기 때문에
 누구나 공부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80년대에 서울에 온 어떤 미국인이 우연히 새벽에 호텔 밖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새벽 5시도 안 되었는데 학생들이 종종 걸음으로 달리듯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아니,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학교에 가는가?
 너무도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학원에서 새벽반 수업을 들으러 간다고 했다. 학교 수업은 몇 시에 시작하느냐고 했더니, 7시 40분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 일찍 시작하느냐고 물었더니, 귀찮다는 듯이 보충수업을 하러 간다고 했다.
  이 미국인은 단언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과는 전혀 다른 시각이었다.
 --이들이 30대만 되면 이 나라에 큰 일을 일으키겠구나.
 
  맞았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벤처 기업의 주역이다. 그 당시 그들은 혹독한 주입식 교육을 받았지만, 지금 그들의 머리는 창의력으로 가득 차 있다. 정말 튀는 세대이다.
  사람은 뭔가 일단 지식을 머리속에 집어넣으면, 환경에 맞추어 그 지식을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증거이다. 사회 환경이 여전히 단순하면 그 지식을 단순하게 쓰지만, 사회 환경이 다양해지면 그에 맞춰 지식도 다양하게 응용하는 게 사람이다. 지식을 다양하게 응용하는 게 바로 창의력이다.
 
  주입식 교육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고 본다. 기초 지식, 기본 지식은 열린 교육만으로는 절대 많은 학생에게 가르칠 수 없다. 그런 교육은 까딱 잘못하면 극소수 애들만 똑똑하게 만들 뿐이다. 주입식 교육과 열린 교육을 절충해야 한다. 서로의 장점을 학생에 따라 달리 적용할 필요가 있다.
  --계속--
  (2000. 3. 18.)
[ 2005-11-10, 11:44 ]

 

 

 

교육개혁을 위한 한 작은 목소리(3)
최성재   
교육개혁을 위한 한 작은 목소리(3)

 [정치 열기는 언제부터]
 
  인류사적으로 보아 조선은 아주 특이한 나라였다.
  문신이 나라의 거의 모든 걸 장악한 나라였다. 문과에 급제한 책상물림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임금도 태종, 세종, 세조, 영조, 정조가 신하에 대해 왕권이 강했을 뿐(이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을 정도로 왕권이 미약했다), 모두 문신들의 입에 넌더리를 냈다. 연산군이 왕권 강화하기에 기가 막힌 위치에 있었지만, 왕권을 백성과 나라를 위해 쓰지 않고 신하를 괴롭히는 데 씀으로써 조선은 완전히 문신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한말에 외척이 득세하지만,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문신이었다. 그들에게 빌붙은 자는 모두 문신이었다.
 
  조선의 문신은 사실 조선 중기 이후 왕과 무신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는 상태에서 다들 현실감이 없어졌다. 이상 속에 살았다. 꿈 속에 살았다.
  인구가 많아지고 농업 기술이 발전하고 상공업이 만만치 않게 커졌지만, 이들의 머리 속에는 공자가 이상시했던 약 3천년 전의 주 나라의 사회밖에 입력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에 한없이 뒤떨어졌다. 사실 나라를 다스릴 능력을 상실했다. 조선초의 문무 조화, 왕권과 신권의 조화, 왕권과 백성과의 결합이 무너지면서 조선의 문신들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견제와 조화가 깨지면서 현실감을 상실했다.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먹거리 입거리인데, 이들은 도시 그런 것엔 관심이 없었다. 자기 배가 부르니까 남의 배는 고픈 줄 몰랐다. 당쟁에서 밀려나 낙향을 해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들은 먹고 살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토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들이 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 정치였다. 이들이 하는 일은 오로지 정치였다. 어떻게 계속 권력을 잡느냐 오직 그 생각만 했다. 권력을 잡으면 계속 토지를 넓혔다. 세금도 안 내고 군에도 안 갔다. 토지 제도가 고려말처럼 되었다. 다만, 고려 시대처럼 산과 강을 경계로 하는 대토지 소유자는 없었지만, 기껏 해야 만석꾼밖에 안 되었지만, 백성으로 보아서는 고려말이나 매한가지였다. 전정, 군정, 환곡이라는 삼정의 문란이 극치에 달했다.
 고려말보다 더 괴로웠다. 고려말에는 정 안 되면 절로 가서 불경을 외거나 심부름하면 먹는 걱정은 않았지만, 이젠 그 짓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국고가 텅텅 비었다. 양반들이 나라에 세금을 안 냈던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남쪽에서, 병자호란 이후 북쪽에서 단 한 건의 침략도 없었다. 무려 300여년 동안 전쟁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산 전세계사에서 극히 희귀한 나라였다. 칼집에서 손잡이만 빠져 나올 정도로 평화로웠다.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현실감이 없어졌다. 문신들이 마음놓고 설쳤다.
 당연히 전쟁과 관련된 어떤 예술 작품도 나올 수 없었다. 18세기 이후에는 오로지 평화와 관련된 작품만 나왔다. 미술도, 음악도, 문학도 직선이 모두 사라졌다. 오로지 곡선이었다. 칼의 직선이 사라지고 붓의 곡선이 천지에 가득 찬 것이다.
 권력을 잡은 문신들의 말만 직선이었다. 그것은 칼보다 무서웠다.
 양반들은 정말 평화롭게 살았다. 서민만 죽을 지경이었다.
 
  잠시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일제가 가르친 대로 아직까지 우리 나라는 외국에 무수히 침략만 당한 나라라고 외국에까지 가서 자랑(?)하는 걸 보면 일본인이 교육 하나는 기가 막히게 시켰구나, 라는 씁쓰레한 생각이 든다.
 
  서양은 사실 신대륙 발견 이후 어느 나라나 단 하루도 전쟁이 없는 날이 없을 정도로 전쟁이 일상사였다. 그러면서 그들의 무기와 기술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그들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서양에서 정치는 군사력을 장악한 자의 몫이었다. 정치는 귀족과 왕의 연합에서 왕에게 잠시 몰렸다가 귀족과 부르주아에게 서서히 넘어갔다. 일반 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양에서는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웃 일본은 덕천가강의 통일 후 비록 전쟁은 없었지만, 대명(다이묘, 영주)들이 여전히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가 절대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무사들이 전쟁은 없어도 언제나 칼을 차고 다녔다. 우리 나라는 고작 형방 나으리가 육모 방망이 하나 차고 다녔을 뿐이다.
  일본인들의 정신은 언제나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다.
  신분이 딱 고정되어 있어서 우리처럼 권력을 누가 잡느냐, 누가 새로운 지배 세력이 되느냐며 싸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싸우면 바로 칼과 총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감히 싸움을 걸 수 없었다.
 
  정치는 중앙 막부의 장군(쇼군)이나 지방 영주의 몫이었고 행정은 그 가신, 군사는 군인의 몫이었다. 학문은 학자가 맡았다. 언감생심 가신이나 무사, 학자가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하물며 일반인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중국도 우리 나라와는 전혀 달랐다.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서면서 지배족은 만주족이었다. 만주족은 팔기병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한 손에 장악했다. 원의 멸망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청은 한족에게 동화되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다.
  중국 문화의 왕성한 식욕에 걸려들면 뼈도 추리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문관은 피지배족인 한족에게 맡기고 만주족은 그 위에서 칼로 지배했다.
 
  쉽게 말해 행정은 한족이, 정치는 만주족이 담당했던 것이다.
  만주족은 군인이자 정치가였고 한족은 관료였던 것이다. 물론 그 아래 상인, 농민도, 수공업도 거의 대부분 한족이 담당했다.
  이런 사정이라 중국인도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권력과 일반 중국인과는 전혀 무관했던 것이다. 권력을 장악하거나 그에 가까이 갈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정치에 무관심하기 마련이다.
 
  한국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엄격히 말하면 조선 후기도 인구의 겨우 2%만이 실질적인 양반이었지만, 이들 중에서 누구든지 권력의 최상층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사람을 잠 못 이루게 하고도 남았다. 한말에 세도 정치가 득세하면서 과거에 부정이 많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여전했다.
 어찌 보면 실력 없는 자도 뇌물을 쓰면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중이떠중이까지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개 유생도 언제든지 지엄하신 상감께 상소를 올릴 수 있었다. 문과 예비학교인 성균관 유생도 언제 중앙으로 진출할 줄 몰랐기 때문에 상감도 그네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했을 정도였다.
  (2000. 3. 18.)
  --계속--
 
 
[ 2005-12-01, 19: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