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政治.社會 關係

간첩과 빨치산이 통일애국자로 둔갑한 현장

鶴山 徐 仁 2005. 11. 30. 17:11
간첩과 빨치산이 통일애국자로 둔갑한 현장
미래한국   
  실천승가회가 지난 5월 만들어
 “애국통일열사 마지막 빨치산 돌아오소서”
 
 경기도 파주시에 간첩(間諜)과 빨치산이 묻힌 ‘통일애국투사묘역’이 조성돼 있어 물의를 빚고 있다.
 
 문제의 묘역은 실천불교승가회(효림, 성관)가 지난 5월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 내 공원형태로 조성한 것으로서 여기는 남파간첩 출신 금재성, 최남규와 빨치산 출신 류낙진, 정순덕, 손윤규, 정대철 등 비전향장기수 6명의 유해가 안치돼있다.
 
 이 곳은‘불굴의 투사 통일애국투사묘역 연화공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석조(石彫) 현판과 함께 비전향장기수 5명에 대한 묘비와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 이들 비문은 남파간첩에 대해‘의사(義士)’, 빨치산출신에 대해‘애국통일열사’라 부르며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연화공원 입구 모습
 
 “애국통일열사 정순덕 선생.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전사, 하나 된 조국 산천의 봄꽃으로 돌아오소서”
 정순덕의 묘비
 
 “애국통일열사 류낙진 선생. 민족자주조국통일의 한길에 평생을 바치신 선생님, 우리민족사에 영원히 빛나리”
 류낙진의 묘비
 
 “애국통일열사 손윤규 선생. 조국통일을 위해 투쟁하시다가 비전향으로 옥중에서 생을 마친 열사 여기에 잠들다”
 손윤규의 묘비
 
 “의사(義士) 故 최남규 선생. 해방 후 청진 교원대학 지리학교수로 교육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57년 구속되어 29년의 감옥생활에서 지조를 지켜내신 민중의 벗. “백두”옹 여기에 잠들다”
 최남규의 묘비 뒷면
 
 “의사(義士) 故 금재성 선생. 일제강점 하 민족해방투쟁으로 3년의 소년 옥과 해방 후에는 조국통일을 위해 57년 투옥되어 30년의 형옥 속에서도 전향을 하지 않고 당신의 지조를 지키며 빛나는 생을 마치다.”
 
 금재성의 묘비
 
 실천승가회는 묘역조성 당시 “비전향장기수 묘역을 열사(烈士)들의 묘역으로 확장해갈 계획이다”고 밝힌 바 있다.
 
 묘역이 위치한 보광사의 한 관계자는 간첩과 빨치산 출신 묘지에 ‘통일애국투사묘역’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에 대해 “좌우이념을 떠나 한평생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리자는 차원에서 유족들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곳(보광사)에 모시려 했던 비전향장기수 중 상당수가 북한으로 송환되고 있는 현실이어서 이 곳은 일종의 거쳐 가는 곳에 불과하다”며 “통일이 되면 일부 극우세력이 제기하는 문제들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보광사에 묘역이 조성된 이유에 대해서는 “보광사는 불교계 ‘진보세력’인 실천승가회의 본부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연화공원 조성위원 명단
 
 실천승가회 집행위원장인 보광사 주지 일문 스님은 지난 6월‘불교신문’인터뷰를 통해 “나를 버리고, 이기심을 버릴 때 불교가 말하는 불국정토 즉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빨치산은 그들이 생각한 조국을 위해 ‘나’와 ‘이기심’을 버린 사람들이라 생각한다(출처: 승가회 홈페이지 6월23일 기재)”고 말했다.
 
 오마이뉴스는 5월29일 묘역준공식을 현장 보도한 바 있는데, 이날 운동권관계자들의 멘트 중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는 저자들에 의해 흩어졌다 때론 철창 안에 모이기도 했으며 여러 형무소에 갈라놓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결코 헤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올해는 분단 60년을 연장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 민족의 힘을 모아내 반드시 외세, 미국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비전향장기수모임인 통일광장 임방규 대표)”
 
 “경기도 보광사 이 땅은 美제국주의가 점령하고 있는 점령지인데 우리가 동지들을 이곳에 모셔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반드시 진정한 우리 조국 땅에 모실 수 있도록 하겠다. 이 자리는 비록 작지만 어느 국립묘지보다 의미가 크다(범민련남측본부 이종린 명예의장)”
 .............................................................................................
 
 ‘통일애국열사묘역’에 묻힌 간첩*빨치산들 면면(面面)
 
 ▲류락진(2005년 4월 사망) - 죽는 날까지 大韓民國 파괴활동 매진(?)
 
 류락진은 6.25사변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57년 가석방된 후 63년 ‘혁신정당’사건으로 구속돼 67년 석방됐고, 71년 다시‘호남통혁당재건委’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8년 가석방됐다.
 
 출소 후 운동권을 상대로 빨치산 강연을 벌여 온 류낙진은 94년‘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돼 8년형을 선고받고 99년 광복절특사로 석방됐다.
 
 93년 1월 조직된 구국전위는 ‘조선노동당’의 남한 내 지하조직으로서 창립선언문과 강령 및 규약에서 북한의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조직의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규약 중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구국전위는 위대한 金日成 동지께서 창시하시고 친애하는 지도자 金正日 동지께서 발전 풍부화시켜 오신 새로운 노동계급의 혁명적 세계관이며 남반부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완수의 가장 정확한 학설인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유일한 지도이념으로 삼는 주체(主體)형의 金日成주의 지하조직이다”
 
 류낙진의 反국가활동은 99년 석방 이후에도 죽는 날까지 계속됐다. 그는 2002년 백운산지구 빨치산위령비 비문(碑文)작성 사건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류낙진은 이적단체(利敵團體)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다 2005년 사망하는데, 그의 가족들은 부의금 5천만 원을 통일운동에 써달라며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탁했다.
 
 류낙진은‘어린 신부’로 인기를 끈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조부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조선일보를 포함한 대부분의 미디어들은 ‘문근영 외조부 통일운동가 류낙진 氏 사망’등의 제목으로 연예면(面)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최남규(1999년 사망); “백두산 장군에 대한 충성”으로 전향 거부
 
 스스로 “백두산 장군(김정일)에 대한 충성” 때문에 전향하지 않았다고 밝힌 최남규는 1912년 함경북도 명천 태생으로 청진대학 지리학 교수로 재직 중 57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그는 남파후 서울서 간첩활동을 벌이다 57년 9월12일 동료 공작원의 밀고로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고 73년 만기출소했다.
 
 최남규는 출소 후 3년 간 엿장수 생활을 하다 75년 7월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돼 89년 풀려났다. 그는 출소 직전인 89년 5월11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 ‘그날 그때가 올 때까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가고픈 내 고향에 가고파도 내 못가네. 광복된 이 조국에 38선 웬 말인가 이 땅 뉘 땅인데 주인행세 누가하고 아름다운 금수강산 짓밟질랑 말고서 돌아가라, 사라져라, 어서 꺼져버려라. 고-홈 고-홈 양키 고 홈”
 
 ▲정순덕(2004년 사망); 63년 체포된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1933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25사변 발발 후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남편을 따라 1951년 스스로 빨치산이 됐다.
 
 정순덕은 국군의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쫓겨 가 빨치산 활동을 지속하다 63년 11월 체포됐다. 이후 정순덕은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 간 복역하다 1985년 8월 가석방됐다.
 
 정순덕은 지난 2003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왜 북한에 가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전향서를 썼다고 하지만, 강제로 한 거니까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금재성(1998년 사망) 인민군 제대 후 간첩으로 남파
 1924년 충남 대전 출생인 금재성은 보통학교 졸업 후 원산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44년 금촌 소년 형무소에 투옥됐다. 금재성은 출소 후 45년 공산당에 입당해 독찰대(헌병) 원산지구 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6.25사변 발발과 함께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정전(停戰) 후 제대해 원산 주을전기전문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중 56년 정치공작원으로 남파돼 고향인 대전에서 간첩활동을 벌였다. 그는 이듬해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고 72년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손윤규(1976년 사망) 빨치산 활동하다 사형받아
 
 전북 부안 태생의 손윤규는 해방 후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6*25사변 당시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55년 경찰특무대에 구속돼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76년 옥사(獄死)했다.
 
 김성욱`김필재 기자
 
[ 2005-11-30, 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