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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쳤고 2002년 이후 일본 후쿠이현립대 특임교수로 재직 중인 원로 경제사학자 안병직 교수. 그가 북한전문 인터넷매체인 ‘데일리NK’와 한 인터뷰가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지금의 20~30대에게 안병직 교수는 낯선 이름이지만 40대 이후의 세대에는 ‘안병직’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묵직한 중량감으로 다가온다. 안 교수는 1960~1970년대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사학자였다. 학계에서 안병직 교수와 함께 이른바 진보 지식인 그룹을 형성했던 인물은 변형윤, 박현채, 백낙청 교수다.
3선 의원인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이 서울대 재학시절 안병직 교수에게 경제사를 배웠다. 김문수 의원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된 이후 노동운동가의 길로 뛰어든 것은 안 교수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김 의원은 공해관리기사2급, 안전관리기사2급, 열관리기능사, 환경관리기사 2급의 자격증을 갖고 있다. 김 의원의 경우에서 보듯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게 안병직 교수의 영향력은 컸다.
서울대에서 한국경제사를 강의하는 이영훈 교수는 안병직 교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이 교수는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의 안병직 교수의 학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안 교수께서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주로 강의실에서 가르친 것은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론’이었다. 안 교수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사실상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마오이즘(Maoism)적 성향이 강했다.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이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안 교수는 1985년 일본에 가서 일본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사고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안 교수는 일본 교수들로부터 북한의 낙후된 모습, 북한의 실체를 간접 체험하고나서 생각이 바뀌어 귀국하게 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주사파들이 뒤늦게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자신의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이미 주창자에 의해 버려진 이론을 갖다 사용했다.”
안 교수는 ‘근대조선의 경제구조’ ‘근대 조선공업화의 연구’ ‘한국 경제성장사’ 등 실증적인 경제사 연구를 통해 한국 경제성장사의 정립을 시도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 교수를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사학자로 부르는 까닭은 앞서 언급한 대로 그가 1970년대 학계에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창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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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이후 종속이론과 연결되면서 1980년대 초 학생운동권에서 유행한 매판(買辦)자본론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광복 후 한국이 주권을 회복을 하긴 했지만 미국과 일본의 외국 자본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일제 식민지 체제와 다를 바 없는 신(新)식민지 체제라는 게 매판자본론의 요체다. 이는 북한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안 교수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근거로 저개발국의 자본주의 발전 가능성을 부정했고 1970년대 말 한국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사회주의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했다. 안 교수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 타도에 나서기도 했다.
안 교수의 학문적 입장이 바뀐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85년부터 2년간 도쿄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였다. 안 교수는 일본에서 돌아와 1987년 ‘낙성대연구소’를 세워 후학들과 경제사를 연구했다. ‘낙성대연구소’ 출신의 모 대학 교수는 “안 교수가 정말 큰 변신을 했다”고 말한다. ‘낙성대연구소’에는 한때 이정우 교수(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도 드나들었다고 한다. 안 교수는 변신을 하는 과정에서 가까운 학자들과 많은 갈등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결별한 사람도 여러 명 된다고 한다.
그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스스로 폐기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선다.
한국은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중진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안 교수는 2002년 3월, 일본 후쿠이현립대로 떠나기에 앞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솔직한 자기고백을 한 바 있다.
“나는 한국 자본주의가 1970년대 말에 붕괴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1980년 그 무도한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에 도리어 경제가 살아났다. 현실을 원망할 게 아니라 내 시각을 바꿔야 했다. 1985년 3월부터 2년간 일본 도쿄대에서 소련·중국·북한의 연구자들과 교류하면서 ‘사회주의는 전혀 전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후반은 자본주의의 세기였고, 선두에 서서 이 세계자본주의를 이끌고 가는 국가는 한국, 중국, 싱가포르, 대만 등 신흥공업국이었다. 이들은 선진국이 수세기에 걸쳐서 축적한 자본과 기술을 토대로 발전하기 때문에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것이 중진 자본주의론의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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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과학자 김용준 교수의 공개발언 역시 울림이 크다. 고려대 명예교수인 그는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서 각각 한 번씩 강제로 교단에서 물러나야 했던 소위 해직교수 출신이다. 그런 그가 지난 9월 10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친일파로 몰리고 있는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인촌 김성수를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은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물을 커다란 테두리에서 바라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같은 잣대로 현 정권과 북한을 들여다볼 것을 주문한다.
“지금 보면 ‘산업화 세력’의 자기희생이나 반성이 없어요. 그런 면에서 노무현 대통령 쪽의 생각이 이해되지요. 하지만 나는 같은 잣대를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정희를 재던 자를 가지고 북한을 재고, 자기들을 재야지요.”
정성기 경남대 교수의 자기비판도 지금 이 시점에서 되새겨볼 만하다. 정 교수는 2002년 ‘탈분단의 정치경제학과 사회구성’(한울아카데미)을 출간해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한 성찰과 역사적 책임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서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다니면서 1988년 종속적 독점자본주의 입장에서의 사회변혁을 제기한 ‘8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전개와 과제’를 발표하는 등 논쟁에 직접 가담했던 인물이다. 정 교수는 “학생들에게 세상을 잘못 보게 하고 오도한 데 대해 가르친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하는 사회구성체 논쟁은 기본적으로 우리 현실에서 출발한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적 자생성이 떨어졌다. 1970년대에 우리 학계에서 제기된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반성, 전통에 대한 재인식, 한국적 사회과학에 대한 모색이 이어지지 못하고, 마치 패션처럼 마르크스주의가 학계를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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