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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舊譯仁王經의 口訣硏究(其一)

鶴山 徐 仁 2005. 10. 1. 11:07

 

 

舊譯仁王經의 口訣硏究(期一)

南豊鉉

沈在箕

Ⅰ. 緖說                                             Ⅳ. 舊譯仁王經의 口訣의 解讀

Ⅱ. 舊譯仁王經의 口訣의 解讀方法                        1) 吐와 借字

Ⅲ. 朝鮮王朝口訣의 性格과 借字 槪觀                     2) 語順

   1) 漢文釋讀口訣의 性格                              3) 音讀과 訓讀

   2) 漢文釋讀口訣의 借字와 그 略體                  Ⅴ. 結語


Ⅰ. 緖 說


<Ⅰ> 우리 나라 古代의 文字生活은 漢子를 輸入한 때로부터 本格化하였으리라는 생각이 지금까지의 通念이 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痛念은 동시에 漢字文化를 선진문화로 하여 우리 나라 文化가 그것에 順應하고 그것을 消化한 다음, 그 漢字文化에 挑戰하여 새로이 獨自的인 固有文字文化를 創造하고 發展시켰다는 것으로까지 擴大解釋을 可能케 한다. 確實히 漢字文化는 東洋文化의 모든 特質을 含蓄的으로 代表하는 核心일 뿐 아니라 우리의 固有文字文化를 낳게 한 觸媒劑였다.

 지난 해 가을 高麗時代 舊譯仁王經上의 落張 五枚 發見紹介되고 거기에 쓰인 墨書가 口訣의 原初的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推測된다는 口訣源流說이 提起되었을 때, 우리는 漢字文化 속에서 우리의 先大人들이 어떻게 固有文字를 만들기 위하여 오랜 歲月 努力하여 왔는가를 깨닫고 그들의 叡智와 勤勉에 感服한 바 있었다.

 本稿만을 읽는 讀者를 위하여 資料에 대한 간단한 解題를 덧붙인다.

1973年 12月에 忠淸南道 文化財委員會가 忠南文化財 발굴사업의 일환으로 忠南 瑞山郡 雲山面 文殊寺의 金鋼如來座像의 腹藏品을 調査하였다. 이 舊譯仁王經上의 資料는 그 腹藏品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部分은 落張으로 舊譯仁王經上의 二, 三, 十一, 十四, 十五의 五張뿐이다. 同時出品된 資料가운데서 年代를 分明히 알 수 있는 것에 壽昌二年(1097 A.D.)과 至正六年(1346 A.D.)의 刊記가 적힌 發願文이 있었다. 이것들을 根據로 하여 우리는 舊譯仁王經上에 쓰인 口訣資料들이 十四世紀의 言語資料라는 心證을 굳힐 수 있는 것이다.

 仁王經이 우리 나라에 傳來한 年代는 六世紀中葉으로 推定된다. 新羅 眞興王 12年 (551 A.D.)에 高句麗에서 歸化한 惠亮法師가 百座講會를 처음으로 연다(三國史記 卷 44 居柒夫條). 이것이 仁王經 및 仁王?國思想이 우리 故土와 因緣을 맺은 처음이 되는데 그 후로 이 仁王經은 高麗朝 全代를 亘하여 끊이지 않는 信仰의 對象이었다. 한때는 宋나라 制度를 본받아 임금의 行次앞에 仁王經을 받들고 가게 하는 일까지 있었다. (始今駕幸時 奉仁王船若經前導 遵宋制也 ; 高麗史 卷 10 宣宗二年 二月乙亥) 이러한 史實로 미루어 보아 仁王經資料가 發見되었다는 것은 곧 그것이 高麗代의 資料임을 疑心할 餘地가 없게 한다.

 이 資料의 版本은 高麗大藏經과 비슷한 木版으로 版廓이 (橫) 52.8㎝ × (縱) 22.2㎝이고 一行에 十七字씩 二十五行이 쓰여져 있다. 字體가 至極히 優雅한데 아직 이와 같은 다른 木版資料가 紹介되지 않고 있다. 板本自體만으로도 貴重한 資料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木版印刷된 舊譯仁王經上의 落張 五枚에는 墨書로 從來의 口訣字와 같은 글씨가 原文 左右에 쓰여 있다.

 이제 이 口訣資料를 逐字的으로 審議하려는 것이 本稿의 目的이거니와 이에 앞서 다시금 確認하고 지나가야 할 몇 가지 問題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漢字借用表記體系의 全貌를 把握하는 일이고 끝으로 分明하게 밝힐 것은 口訣의 生成과 그 變遷의 全貌를 살펴보는 일이다.

 먼저 漢字借用表記體系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文字가 없는 言語社會에서 그 言語를 表記하는 方案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이미 存在하는 文字를 輸人借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表記하고자하는 言語의 特質에 맞는 새로운 文字를 創造하는 일이다. 우리 民族의 경우에 後者의 方法은 朝鮮王朝 世宗代에 와서야 成就되었고 우리 古代의 祖上들은 일찍이 高度한 文字文化의 極盛을 누리는 漢字를 輸入借用하는 前者의 方法을 擇하였었다. 이웃하고 있는 他文化의 文字를 借用하는 경우에, 그 文字를 利用하는 方法에도 두 가지의 方案이 存在한다. 첫째는 그 文字의 字型을 그대로 쓰는 것이고 둘째는 그 輸入文字의 字型을 表記하려는 言語와 그 言語社會의 實情에 맞추어 變改하여 쓰는 경우이다. 여기에서 그대로 쓴다고 할 때에도 그 文字가 漢字와 같은 表意文字일 경우에는 釋(또는 訓)과 音의 두 가지 要素가 文字에 結合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釋借냐 音借냐 하는 두 갈래를 또 생각할 수 있다.

 우리 祖上들은 이러한 借用의 모든 方法을 다 動員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次序가 있었다. 初期段階에서는 釋과 音의 兩面으로 漢字를 利用하였는데 그 方法은 漢字借用表記의 根本原理가 되어 後世에까지 모든 借用體系의 根幹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字型의 面에서는 略體를 考案하여 쓰는 方法이 開發되었으며 釋借와 音借의 두 갈래는 다시 그 中間的인 借用方法인 釋音借의 方案이 하나 덧붙게 되었다. 한편 音借는 한 音節 全部를 借用하는 것이 아니라 反切法에 依한 音節末音따위만을 借用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이들 借用을 우리는 흔히 完全釋借(또는 全釋借)部分釋借(또는 釋音借) 完全音借(또는 全音借)部分音借라고 불러왔다. 그러한 借用의 實例들은 앞으로 本考가 進行되는 동안 充分히 提示될 터이지만 問題는 이러한 借字의 原理를 어디에서 攄得하였겠는가 하는 점이다.

 幅 넓은 借字運用의 妙는 분명 우리 先朝의 슬기임에 틀림없었으나 그러한 借字의 原理는 아마도 漢字自體가 이미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온당할 것 같다. 漢族의 言語를 表記하기 爲한 手段으로서의 漢字는 비록 그 出發이 象形과 指事를 바탕으로 하여, 表音文字 生成의 正軌를 따르고 있으나, 어떤 言語에도 存在하는 語彙로서 音相만을 取해야하는 擬聲語따위의 表記를 爲해서는 不得己 假借의 方法이 利用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假借는 漢字가 지니는 重要한 機能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러한 漢字六書(象形․指事․會意․形聲․轉注․假借)의 基盤위에 漢字가 어떤 形式으로든 表記해야 했던 最初의 外國語는 아마도 佛經의 原語가 되는 싼스크리트(梵語)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 梵語佛經을 飜譯할 때에 그 梵語의 音相대로 표기해야 했던 많은 固有名詞 또는 飜譯이 不可能하거나 飜譯할 必要가 없는 語彙들은 不可不 漢字의 假借法이 援用되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佛經上의 不飜語 表記의 傳統은 漢字文化가 韓半島에 傳來되었을 때 佛經과 함께 同時에 전래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推定은 이미 여러 사람의 累次에 걸친 漢字借用表記의 實相을 檢討함으로써 論證되었다. 例컨대 三國時代의 語彙表記가 偶然의 一致로 돌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共通借用字를 三國(高句麗, 百濟, 新羅)의 用例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 言及하거니와 이러한 事實은 三國時代 우리 祖上이 漢字의 借用表記를 試圖할 때에 그 模型이 存在했음을 暗示하는 것이 되며 萬一 그러한 模型을 指摘한다면 그것은 佛經飜譯의 傳統과 關聯짓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以上의 背景으로 形成된 漢字借用表記는 그 規模와 發展의 推移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표로 나타내 보려고 한다.

漢字借用表記體系

 

國語表記

 

固有名詞表記體系……

(㉠借名)

 

 

 

 

文章表記體系

 

詩歌表記體系

(㉡借名)

 

 

 

散文表記體系

(㉢借名)

 

 

 

 

 

飜譯表記․漢文原典의 飜譯體系……

(㉣借名)

 


<Ⅱ> 위의 표에서 ㉠에 該當하는 慣用된 術語는 지금껏 存在치 않는다. 萬一 우리가 여기에 適當한 術語를 붙여주도록 許諾받는다면 우리는 이것을 暫定的으로 “借名”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各種의 이름을 漢字借用에 依해 表記했음을 나타내주는 用語가 되기 때문이다. 이 “借名”은 漢字借用의 基本原理인 音借와 釋借가 三國時代 固有名詞를 表記하는 手段으로 便宜에 따라 援用된 것을 가리킨다. 그로말미암아 어떤 固有名이 音借와 釋借의 두가지 方法으로 두루 適用 表記되었을 경우에 우리는 결과적으로 두가지 表記를 가지게 되었고 釋讀의 方式이 없어진 오늘에 와서 그것이 두 개의 다른 音으로 읽히는 結果가 되었다. 假令 ‘赫居世’와 ‘弗秬內가’, ‘荒宗’과 ‘居柒夫’ 따위가 현대의 우리로서는 아주 다른 音相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當時에는 그것이 音借表記인지 釋借表記인지를 區分함으로써 하나의 音相으로 統一시켜 읽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元曉’는 아마 釋借表記가 아니었던가 하는 疑問이 最近에 提起되었다. 이러한 事實에 根據해서 古代 國語의 音韻이나 語彙의 語源을 漠然하게나마 硏究할 수 있었던 것은 這間 國語學界의 커다란 기쁨이었다.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 나타난 人名 地名 官名에 대한 綿密한 硏究는 바로 이 借字表記의 正確한 理解를 通해서만 可能했던 것이다.


 <Ⅲ> 이와같은 固有名詞表記 곧 借名이 어느 程度 一般化되는 것과 同時에 우리 先祖들은 國語의 文章까지도 같은 方法으로 表記하려는 欲求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 欲求를 充足시키는 방법은 두가지 方向으로 展開되었다. 그 하나는 詩歌表記體系이며 또 하나는 散文表記體系였다. 위의 表에서 보인 바와 같이 前者는 鄕札이라는 名稱으로 오랫동안 慣用되었고 後者는 흔히 吏讀라는 名稱으로 通用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두 用語 “鄕札”과 “吏讀”는 피차에 同一한 借字原理를 바탕으로 生成된 것임에도 不拘하고 鄕札에 대해서는 鄕歌表記에 局限시킬 수 있었으므로 一旦은 詩歌表記形式이라는 槪念設定을 할 수 있음에 反하여 吏讀에 대해서는 簡潔하게 規定할 수 없는 複雜한 內容이 엉기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왔다. 우리는 이제 이 問題를 至極히 基礎的인 事項으로부터 檢討해 보려고 한다.

 文章을 구분할 때에 詩歌와 散文으로 兩分하는 것은 매우 오랜 傳統이면서 움직일 수 없는 分類方式이 되어 오고 있다. 그러면 그 두가지 文章形式 곧 詩歌와 散文은 言語가 지니는 어떤 機能과 函數關係를 가지는가부터 생각해 보자. 言語가 遂行해야하는 가장 本質的인 機能을 생각해 본다면 論者에 따라 여러 가지 分類가 可能하겠으나 우선 다음과 같은 常識化된 몇가지 項目을 指摘할 수 있다.

 첫째는 情報的인 機能이다. 말하고자 하는 事象을 正確하게 記述함으로써 누가 보아도 同一한 結論에 이를 수 있게 한다. 다시말하면 客觀的 事實을 筆者나 話者의 作爲的인 意圖(感情的 要素로서의 意圖)없이 客觀的으로 記述하는 方法에 의해서 성취된다. 知識이나 事實의 傳達을 위해서는 더없이 소중한 言語機能의 하나이다.

 둘째는 表出的인 機能이다. 이것은 筆者나 話者自身의 感情․情緖를 一方的으로 나타내는 것을 目的으로 한다. 이때에 讀者(聽者)는 筆者(話者)의 感情을 理解하려는 態度를 取할 때에만 그 存在理由가 있다. 좀더 과장하여 말한다면 하소연하는 데에만 쓰이는 言語의 機能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指示的 機能이다. 筆者(話者)가 讀者(聽者)에게 어떤 行爲를 하도록 命令하고 要求하며 그 命令․要求한 바가 實踐에 옮겨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넷째는 美學的 機能이다. 表現된 傳達文字體가 獨自的으로 하나의 美的 世界를 構築하는 것이다. 表現된 言語自體에서 우러나오는 美의 世界이기 때문에 다른 對象이나 筆者․讀者와의 關係없이 이룩되는 機能이다.

 이 외에도 우리는 觀點과 必要에 따라 言語가 지니는 機能을 더 追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네 개의 機能만을 가지고 그것이 詩와 散文으로 具體化할 때에 생기는 問題點들을 생각해 보자. 詩歌形式은 위의 네가지 機能 중에서 주로 表出的 機能과 美學的 機能에 充實하려고 選擇하는 文章形式이 되다. 情報的 機能이나 指示的 機能은 散文의 形式을 通하는 것이 보다 便利한 方法으로 認識되고 있다. 散文도 물론 表出的 機能과 美學的 機能에 適用될 수 있는 文章形式이기는 하나 詩歌 形式을 취할 때만큼 强力한 效果를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한편 詩歌 形式을 통하여 情報的인 機能이나 指示的 機能이 成就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效果的 方法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볼 때에 “詩”가 言語로써 만들어진 獨立된 事物이라는 詩論家들의 眞率한 表情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번 注意 깊은 關心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일단 完成된 詩는 그 詩가 構築한 音聲世界와 音味世界가 渾然한 融合을 이루어서 하나의 獨立된 世界를 만들고 스스로 事物化한다. 이러한 事物化․客體化를 强하게 意識하면 할수록 詩를 다른 言語로 飜譯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妄發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詩가 散文과는 次元에 있어서 懸隔하게 다르다는 嚴格한 區分意識의 妥當性이 있다. 이러한 論旨는 詩를 理解할 때에, 詩가 만드는 意味의 世界에 그 詩를 構築하고 있는 言語의 音聲要素를 不可分離的으로 包容시킨다는 말이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詩의 存在는 表意性과 表音性이 合致될 때에만 그 生命이 있는 것이고 散文의 경우에는 表意性 하나만으로서도 그 存在의 可能性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以上에서 論述한 前提들을 參考하면서 이제 우리는 다시금 우리들의 問題인 鄕札과 吏讀에 눈을 돌려 보자. 지금까지 文章形式에 있어 詩와 散文이 지니는 基本的인 差異를 看過했던 많은 論者들은 吏讀式 散文의 오랜 經驗 끝에 鄕札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른바 漢字借用을 통하여 國語文章을 表記하는 가장 完璧한 段階에 到達하였다고 말하여 왔다. 結果를 가지고 말할 때 이 主張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主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鄕札式 表記에 의해 散文을 完成한 實例도 나와야 할 뿐아니라 그 量도 많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鄕札式 表記形式을 통해 散文을 完璧하게 記述한 例는 아직까지 發見된 바가 없다. 왜냐하면 散文은 단지 意味의 傳達 즉 情報的 機能을 遂行하는 것으로 그 글이 지닌 使命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鄕札表記의 完璧性은 鄕歌自體의 性格이 이미 規定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Ⅳ>한편 吏讀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散文表記體系를 나타내는 用語로 쓰여 왔으나, 現在로서 鄕札이 鄕歌라고 하는 單一한 文學장르에 固定시킬 수 있는 바와 같은 方法으로 單一한 文學장르나 文體를 指稱하지 못하는 實情에 있다. 散文이 지니는 用途의 多樣性과 “吏讀”라는 用語가 比較的 後代(주로 朝鮮王朝)에 와서 吏屬들의 公文書作成樣式에 關聯하여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本稿에서 “吏讀”를 간단히 國語散文表記體系 全般을 나타내는 術語로 삼고자 할 때에 이에 대해 疑懼心을 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充分히 想像할 수 있다. 그러나 散文表記體系를 一旦 “吏讀”라고 하는 것 亦是 하나의 便法임을 밝혀야 하겠다. 그리고 일단 “吏讀”라는 術語속에 상당히 오랜 期間에 걸친 國語散文表記體系를 網羅하는 것이라면 吏讀에 關한 生長異滅의 一代記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正道일 것이다.

 吏讀의 母胎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미 固有名詞表記에 釋借와 音借를 利用하는 [借名]에는 익숙해 있었으나(借名은 漢文속에 쓰이고 있었다) 아직 國語式의 散文文章을 만들어 내려는 慾求가 現實化하지 않고 潛在하고 있었던 段階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潛在期間이 끝난 뒤에 漢字借用의 方法으로 우리 文章을 적은 初期의 具體的 實例는 壬申誓記石銘이다. 이것은 漢字借用에 의한 散文文章表記의 初期的 方法의 實現物로 注目되어 왔다. 이 壬申誓記石銘의 文章은 原則的으로 漢字를 解讀함으로써 國語文章으로 理解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後代의 吏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文法形態의 表示는 다만 “可容行誓之”에서 “之”字를 終結語尾形態로 取扱할 수 있다는 可能性外엔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國語散文으로 理解하려면 漢文에 對한 相當한 造詣가 要求된다는 것도 想像하기 어렵지 않다. 重要한 점은 이 散文文章이 國語語順에 따라 釋讀을 하면서 適當한 國語의 屈折形態를 揷入해야하는 不完全하나마 그런대로 國語語文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壬申誓記石銘의 文章을 吏讀를 얘기하는 前段階에 반드시 言及하였고 “前吏讀”라는 用語로 處理하려한 見解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 壬申誓記石이 刻銘되기 前後하여 所謂 吏讀資料로 생각되는 金石文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高句麗城壁石刻銘  (446~449AD)(*表는 推定年代)

        2. 瑞鳳塚錄合杆銘    (*451AD)

        3. 蔚州川前書石銘原銘(*525AD)

        4. 壬申誓記石銘      (*552AD)

        5. 戊戌塢作碑銘      (*578AD)

        6. 南山新城碑銘      (*591AD) 

        7. 廣開土大王碑      (414AD)

        8. 永川菁堤碑丙辰銘  (*536AD)

        9. 眞興王巡狩碑      (568AD)

위의 資料에서 7.8.9는 ‘借名’의 例를 보이는 것으로 漢文이라고 해야할 것이고, 1.2.3.4는 國語의 屈折形態를 나타내는 것이 極히 制限되어 있으며, 5.6은 어느 程度 體系가 잡힌 國語散文表記體系로서의 吏讀가 形成되었음을 보인다. 이들 文章을 仔細히 檢討해 보면 部分的으로는 漢字借用語가 쓰이고 또 部分的으로는 釋讀字(完全釋借字)가 쓰이고 있어서 一見하여 國語散文體의 原始形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아직 音借字가 나타나지 않은 점은 그만큼 國語散文表記로서의 未熟性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未熟性은 統一新羅代에 내려와서야 克服되기 시작한다. 統一新羅期의 吏讀資料로 注目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0. 旡盡寺鍾銘     (745AD)

        11. 新羅帳籍       (755AD)

        12. 葛項寺石塔銘   (758AD)

        13. 禪林院鍾銘     (804AD)

        14. 窺興寺鐘銘     (856AD)

 위의 資料가운데서 12는 音讀字(完全音借字) [彌]를 보이는 最古의 資料로 注目을 받는다. “阿彌陀佛”이라고 할 때의 “彌字”의 경우처럼 佛經의 不飜語나 三國時代 借名에서 使用된 例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散文表記에 나타나기 始作한 事實은 그 散文表記體系가 國語의 實相에보다 가깝게 接近하고 있는 證左가 아닐 수 없다. 13에서는 [爲]가 []를 나타내는 釋讀字로 쓰임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漢語動詞가 어떻게 國語로 歸化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實例가 되고 있다. 14에서는 [乃]가 分明한 音讀字로 읽힐 뿐아니라 [願爲乃者]에서 (等)이 形式名詞[]를 表記하여 釋音의 一部 즉 []에서 []만을 取한 例가 보인다. 全體的으로 이들 자료를 完全하게 解讀한다는 것은 無望하지마는 大意를 把握하고 部分的으로 用字의 實相을 찾아보는 作業을 通하여 이 統一新羅期에 오면 더욱더 國語散文文章에 接近하고 있는 事實이 確認된다. 이것은 借字表記의 多樣化를 通해서만 可能한 것이었다. 즉 釋借에 있어서 完全 釋音을 取하는 [爲], 部分釋音을 取하는 []의 사용이 이루어졌기 떄문에 보다 充實한 國語散文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純粹國語 散文으로의 傾向은 高麗時代에 오면 더욱 精緻해지고 完璧해지리라는 豫想을 하게 된다. 一面에 있어 그러한 結果를 보게 되는 것이지만 高麗時代에 와서 全般的인 事情은 훨씬 複雜해진다. 이 時代의 資料로는 다음같은 것들이 있다.

        15. 鳴鳳寺 慈寂禪師凌雲塔碑陰記  (941AD)

        16. 淨兜寺 造塔記                (1031AD)

        17. 通度寺 國長生石標            (1085AD)

        18. 高達寺 元宗大師惠眞塔碑陰銘  (977AD)

        19. 景禪寺 金鼓銘                (1201AD)

 위의 資料들은 크게 두가지 文體로 大別된다. 15, 16, 17은 過去의 어떤 資料보다도 純粹國語散文에 더욱 接近되어 있어서 어떤 意味에서는 吏讀式 散文表記의 完成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만하다. 특히 16은 高麗時代 散文表記의 가장 完璧한 模範이라고 할만큼 豊富한 屈折 形態와 純粹國語語彙의 漢字借用, 그리고 國語語順에 따른 配列을 보인다. 그것은 吏讀文의 典型이 되기에 充分한 것이다. 그러나 18, 19는 보다 漢文으로 보일 수 있는 要素들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高麗末로 내려오면 올수록 虛辭表記에는 多樣한 發展을 보이면서도 漢字熟語 및 漢字語가 漸次로 增加하여 漢文的인 色彩를 濃厚하게 나타내는 吏讀資料가 생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散文의 情報的 機能에 對해 눈을 돌려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散文 특히 지금까지 基本資料가 되었던 佛家類의 塔碑등은 그 內容이 바르게 傳達되는 것만이 가장 重要한 課題였다. 앞서 말한 바처럼 表意性의 成就만이 散文의 重大目標이기 때문에 上述한 金石文은 오랜 漢文과의 接觸에 依해 아주 自然스럽게 漢文의 原文體에 牽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事實은 接觸된 두 言語(여기에서는 古典漢文體와 純粹國語文體)사이의 拮抗作用으로 說明하여야 할 것이다. 吏讀의 基本志向은 純粹한 國語散文을 表記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漢字를 借用하여야했고 그 漢字로 쓰여진 文章 곧 漢文을 通해서만 文化水準을 높일 수 있었던 三國時代以來 高麗朝의 千餘年은 은연중 吏讀가 漢文化하려는 趣向도 아울러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相反된 두가지 길은 똑같이 比例하여 發展하였다. 純粹國語散文으로 보다 完全하게 使用表記할 수 있는 能力이 增大하는것과 同時에 漢文으로 表記할 수 있는 能力도 增大되었다. 그리하여 朝鮮朝에 오면 드디어 大明律直解나 養蠶經驗撮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漢文語句 사이에 部分的인 純粹國語表記만이 吏讀의 命脈을 維持하게 되었다. 特히 15世紀에 와서 訓民正音이 創製되고 諺解가 簇出하게 되면서 吏讀로써 純粹國語散文을 表記하겠다는 理想은 霧散되어 버리고 吏讀는 그 글짜가 指示하는 바와 같이 吏屬들의 公私文書 文件表記樣式으로 그 機能을 固着시키게 된다. 이 時期에 있어서 吏屬은 嚴格한 意味에서 兩班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事務를 擔當한 一線官僚라는 職能과 身分 때문에 恒常 兩班社會를 羡望하는 上位志向的인 氣質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文字生活에서 吏讀를 使用할 떄에는 보다 完全한 漢文으로 表記하려는 性向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닌가싶다. 그리하여 吏讀는 漢文句節에 揷入되는 極히 制限된 語彙表記이거나 屈折形態의 表記만을 나타내는 擬漢文文章의 附屬表記體系로 轉落하는 運命을 맞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純粹漢文에 붙이는 口訣과 外見上의 큰 差異가 없게 되었다. 吏讀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漢字借用의 方法에 依해 한번도 完成되어보지 못한 國語散文表記體系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三國時代로부터 朝鮮王朝時代까지 國語語順에 따른 釋讀字의 羅列로부터 漸次 音讀字 釋音字를 利用한 虛辭들을 늘이다가 어느듯 漢文의 모습을 흉내내어 擬漢文的 性格을 가지는 文體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을 계속 변모시켜 왔다.

 <Ⅴ> 舊譯仁王經上의 口訣資料가 發見되기 以前까지는 口訣에 對한 槪念이 一定한 것이었다. 즉 口訣은「입겿」이란? 固有語의 吏讀式 表記로서 漢文을 音讀할때에 原典漢文의 句讀에 揷入되어 文意를 보다 分明하게 해 주는 機能語로 定議되어 왔다. 이 定議는 흔히 알려진 15世紀 以後의 資料만을 가지고 말할 때에는 勿論 妥當한 見解이다. 그런데 舊譯仁王經上에 나타난 資料를 檢討한 뒤에, 우리는 音讀의 補助機能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 釋讀의 補助機能을 가진 것까지를 아울러 口訣이라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라는 提案을 하게 되었다. 이제 그 理由를 檢討해 보기로 한다.

 첫째 口訣은 漢文元典을 解釋․飜譯하는 手段이라는 大前提를 設定할 수 있다. 漢文原典이 어떻게 우리 先祖들에 依해 읽히고 理解되었는지를 알아 볼 수 있는 實證物이 現在로서는 舊譯仁王經上의 口訣資料보다 더 古代로 올라가는 것은 없다. 三國史記나 三國遺事등에서 薛聰에 關한 記錄들이 그 片鱗을 말해주고는 있으나 實際로 經書의 文章들을 어떻게 읽었는지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分明한 점은 「以方言解九經……至今學者宗之」라든가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이라고 밝히고 있는 史書의 記錄을 取信하는 限 薛聰이 經書를 釋讀하였으리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事實이다. 즉 訓解는 곧 釋讀이요, 그 訓解의 모습은 舊譯仁王經上의 口訣表記의 發祥은 結果的으로는 漢字借用表記體系의 發展을 위해 持續的인 노력을 해 온 佛僧들의 佛經解讀의 方式이라고 할 수 있다. 勿論 그러한 作業이 自然發生的인 것이요 意圖的인 것이라고는 볼 수 없겠는데 그 方式을 薛聰이 整理하였을 可能性은 充分이 있는 것이다. 그 可能性은 뒤에 在家僧이 되었으나 엄청난 著述을 남긴 元曉와 그 아들 薛聰과의 關係를 學問傳受의 師弟關係로 擴大해 보며 더욱 信憑性을 얻게 된다. 더구나 羅麗 兩代에 걸쳐 佛敎와 儒學은 서로 相補的 關係를 維持하였다는 것이 常識化되어 있기 때문에 元曉와 薛聰의 父子 및 師弟關係를 考慮에 넣지 않더라도 佛家의 明經術이 그대로 儒學經書의 明經術로 轉移되리라는 것은 쉽게 推定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明經術의 發展은 口訣의 發生과 發達을 必然的인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둘째 口訣은 略體를 發達시켰다는 점이 指摘되어야 한다. 鄕札이나 吏讀에 略字가 全혀 없는 것은 아니자만 그것은 制限된 數字가 一般的으로 行하는 略字法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反하여 經書를 解讀하는 手段으로는 略字體를 原文의 行間에 附記 添書하는 것이 거의 原則으로 되어 있다. 이 略體口訣字의 發生은 師僧이 解說을 하는 동안에 經書의 本文行間에 그 解說․飜譯하는 내용을 速記해야한느 學僧들의 必要性에 의해서 一種의 速記法으로 略體가 考案․發達되었으리라는 說이 믿을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說을 否定한다고 하드라도 原文사이의 좁은 行間에 表記하기 위하여서는 略字體를 만들어 쓰는 길이 가장 自然스런 現象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口訣이 略字體를 가졌는데 反하여 吏讀에서 略字體가 크게 發展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興味있는 事實이 아닐 수 없다. 吏讀에는 어째서 略字表記法이 發達되지 않았을까? 아마도 吏讀가 本質的으로 漢文化하려는 無意識的 性向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朝鮮朝에 와서는 吏讀의 略體表記의 發達이 더욱 無望한 것이었다. 그 吏讀의 運用者인 吏屬들은 下級官吏로서 보다 높은 地位에 對한 羡望을 가지고 있었을 터인데 그러한 上位志向的 意識構造는 略字表記를 拒否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글은 願書  訴狀 口供文등 대체로 윗사람에 대한 報告의 形式을 취하는 것이었으므로 上級者에게 格式과 禮儀를 갖춘다는 意味에서도 略字體는 避하여졌을 것이다. 더구나 文章自體가 可能한 限 漢文의 참모습대로 復歸하려는 性向과 合致되었을 때 略體의 發達은 더욱 期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佛家에서거나 儒家에서거나 純全히 經書를 學習하기 위한, 實用的이고 손쉬운 方法은 略字體의 發達을 自然스럽게 하였을 것이다. 後代에 刊行된 冊子 가운데에 간혹 略字가 아닌 正字口訣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口訣에 關한 限 매우 例外的인 事實에 속한다. 漢字를 起源으로 하는 경우, 언제고 機會만 있으면 그 本來의 모습을 취하려 하는 것이 漢字가 지닌 不滅의 魔力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모든 手段들은 結局 漢字․漢文을 理解하자는 目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正字口訣로 쓰여진 것은 正式으로 印刷된 冊일 경우에 例外없이 나타나고 있다.

 略體口訣字가 우리의 關心을 끄는 또 하나의 다른 理由는 그것이 日本文字와의 關聯性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略體口訣字는 漢字의 楷書나 草書의 初頭部分이나 末尾部分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方法은 日本文字 片假名의 生成原理와 完全히 一致한다. 韓國과 日本이 同一한 漢字文化圈에 屬하여 있으면서 漢字를 利用하여 自國의 表記體系를 開發하려 했음은 너무나도 當然한 일이거니와 그것이 日本의 경우에는 音節文字를 完成하게 하였고 우리의 경우에는 새로운 文字 곧 訓民正音을 만드는데 基本 刺戟材였음은 실로 興味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以上의 論術 통해서 우리는 “口訣”이 ①漢文原典의 解讀手段 ②略字體로서의 體系라는 두가지 共通特徵에 依해 불려질 수 있는 術語임을 밝힌 셈이다. 解讀手段은 釋讀과 音讀의 두가지가 있으므로 口訣에 있어서도 자연히 釋讀口訣과 音讀口訣이 存在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두가지 口訣의 相互關係에 對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漢文原典을 解讀하는 가장 처음 段階에서 우리 先祖들은 어떤 方法을 취하였을까? 제일 첫 번째의 作業은 아마도 字釋을 하나 하나 읽어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字釋을들 連結하여 國語文章으로 만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한문의 統辭構造와 統辭構造가 어떻게 差異가 나는지를 確認하게 되었을 것이고 곧이어 漢文을 풀어서 새겨 읽는 釋讀法을 發展시켰을 것이다.  그러한 釋讀法의 具體的 一例로서 舊譯仁王經上의 資料는 우리를 興奮시켰던 것이다.

 釋讀은 말하자면 漢文原典에 對한 逐字的 直譯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에도 漢文을 배우는 初步過程에서 이러한 釋讀은 恒常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므로 釋讀은 漢文原典을 理解하는 第一段階가 된다. 따라서 釋讀過程을 通해야만 國語의 助詞와 機能語 屈折形態 등이 句節사이에 어떻게 붙여지는지가 밝혀진다. 즉 音讀口訣의 母體는 釋讀口訣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重要한 事實을 밝혀 둘 必要가 있다. 釋讀과 音讀의 目的이 다르다는 事實이다.  釋讀의 目的은 原文을 解釋․飜譯하는데 있는 것이고, 音讀의 目的은 原文을 暗誦․暗記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音讀時에는 原文을 順序대로 읽어나가면서 文脈理解에 도움을 주는 限度內에서 釋讀할 때에 붙어졌던 口訣이 다시 使用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結果 音讀時의 口訣은 原文의 句節 사이에 間間히 揷入하게 되고 釋讀時에 붙였던 相當量의 字釋과 짧은 語句 사이에 連結되던 口訣이 脫落하게 된다. 그래서 音讀口訣은 釋讀口訣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漢文理解度의 增進에 따라 簡素化 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漢文原文이 어떻게 釋讀되어져야 하느냐가 決定되지 않으면 音讀에서의 口訣이 무엇인지는 絶對로 밝힐 수 없는 것이다. 15世紀以後의 많은 經書諺解들이 音讀口訣을 붙여 그것을 原文처럼 앞세우고 있는 것은 이미 그 釋讀口訣이 前提된 후에 漢文敎習方便의 하나로 취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漢文敎習에서는 原文을 暗誦․暗記하는 것이 敎習의 重要한 目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번역을 목표로 하는 것이 석독인 이상 그 석독의 모습이 15세기 이후라고 하여 없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흔히 “대왕풀이”라는 명칭으로, 혹은 “언해”리는 명칭으로 그 진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석독은 시대에 따라, 번역자의 취향에 따라, 한자어가 고유어로 바뀌는 정도를 달리하면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여 오고 있다.

다음에 율곡사서언해의 한 대목을 옮겨 적는다.

A. 자왈 제자ㅣ 입즉효고 출즉제며 근이신며 범애중호 이친인이니 행유력이어든 즉이학문이니라

B. 자ㅣ 샤 제자ㅣ 들면 효고 나면 제며 근코 신며 너비 중을 애호 인을 친히 디니 행호매 나 힘이 잇거든  문을 학디니라

 

 

 

 

ⓒ 音讀…暗誦 및 朗讀

 

 

 

ⓐ原文

 

 

 

ⓑ 釋讀

 

 

 

ⓓ 飜譯…內容의 把握

 

 

위에서 A는 음독할 때에 이용되는 것이고 B는 언해인데 석독의 다음 단계를 보인다. 구역인왕경상의 구결자료는 바로 B와 흡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B는 휠씬 더 축자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엄격히 말한다면 B는 언해이므로 석독보다는 더 우리말에 가까운 문장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해에 쓰인 토(구결)는 그대로 음독에 나타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때문에 석독구결은 음독구결을 결정해주는 모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석독에서 언해, 번역이 나왔다고 해서 석독의 전모를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문원문을 기점으로 석도, 음독 및 여러 단계의 번역은 다음과 같은 관계를 가진다.

화살표Ⅰ은 한문원문이 원문의 자순을 그대로 유지하는 길이다. Ⅱ는 원문이 국어문장구조로 바뀌는 길이다. Ⅲ은 구결이 공통점을 갖는 길이다. 그리고Ⅳ는 점차로 국어다운 표현으로 발전하는 길이다. 15세기이후의 언해서는 대부분 ⓒ와 ⓓ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와 ⓓ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를 가진 여러 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본고가 해석하려는 구역인왕경은 ⓑ의 단계를 보이는 것이다. 원문의 자순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구결표기에 특이한 역속부호「」을 사용하고 있는 흥미있는 자료다.

이상으로 우리는 구역인왕경상의 석독구결자료를 풀기위한 제설을 마치려한다. 구결이 한자차용표체계에서 국어표기체계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한문경전의 올바른 해독방식을 개발하는 데에 훌륭한 수단이 되었음은 거듭 강조되어도 좋을 것이다.                      


Ⅱ. 구역인왕경 구결의 해독 방법

이 구역인왕경의 고려시대 구결은 5장에 지나지 않는 적은 양이지만 한자차용표기법의 성격과 그 발달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을 해 주고, 훈민정음 창제 이전 국어사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자료와는 성격을 전연 달리하고 또 이 시대 이 계통의 구결자료로서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연구하기 위하여는 그 방법론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자료는 표기법, 음운, 어휘, 문법 등 국어학 전반에 걸쳐 기술되어야 할 것이지만 우선 제일차 목표는 토를 표기한 차자의 정자를 추정해 냄과 아울러 그 독법을 파악해 내는 일이라 하겠다. 이것이 완성되면 표기법, 음운, 형태, 문법의 기술이 자동적으로 가능해 질 것이나, 실제 이를 고증하기 위하여는 역으로 음운, 형태, 문법의 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므로 결국 이들을 상보적인 관계로 놓고 작업을 진행시키지 않을 수 없다. 차자의 정자에 대한 고증은 이 양자의 내용을 완전히 합치시키는 작업이며 이 합치가 완성되었을 때 그 타자의 정자는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전제하고 들어갈 문제들이 있다.

첫째 구역인왕경구결의 기록연대는 동시출품된 유물중에서 최하연대를 보여주고 있는 발원문의 연대인 1346년(지정6년)이나 그에서 몇 년 앞서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어법상이나 차자로 보아도 현재로서는 그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 구결에 나타난 어법은 15세기 국어의 어법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있고 부분적으로는 향가나 이두에 나타난 어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차자상 존칭접미사를 「示」의 약체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시가표기나 산문표기에서는 「賜」나 「敎」로 표기된 것이다. 「示」의 약체는 조선왕조의 구결에서 흔히 사용된 것이나 한자차영표기법의 발달선상에서 볼 때 후대의 차자에 속한다. 또 이 「示」는 15세기에 시상을 나타낸 「이시-」와 같은 기원인 「-시」에 해당하는 형태를 표기하고 있다. 존경의 「시」와 시상의 「시(<이시-)는 15세기의 「-샴」과 「숌/슘」의 차이로 보아 어원적으로 형태를 달리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구결에서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전의 한자차용표기에서는 이 시상을 「在」로 표기하였음을 보면 이러한 발달은 15세기에서 멀지 않은 시대의 것으로 추측케 하는 것이므로 이 구결은 14세기의 표기로 보아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문어의 보수성에 의한 고대어법을 보유하고 있을 것임은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구결에 나타난 어법이 곧 14세기중엽의 현실 언어만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둘째는 이 구결은 현재 유일한 고려시대 구결자료이며, 또 최고의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일회적, 개인적인 것이냐 전통성을 갖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인왕경은 6世紀 진흥왕 때부터 국가적인 행사로서 독회를 가졌던 기록이 삼국사기 및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조의 설회기록이 9건이 나타나고 고려시대에는 한 때 정기성을 띠고 베풀어졋던 기록이 나타난다. 이 독회에서 강독형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구역인왕경의 구결은 독회의 강독용으로 사용되던 전통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삼국사기의 「이방언독구경」, 삼국유사의 「이방음……훈해육경문학」이란 증언도 이러한 유의 구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이 구결은 곧 일회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구결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이 작업을 진행시키려는 것이다.

셋째로 한자차용표기법의 발달에서 볼 때 구결의 발달이 한자차용표기법 발달의 중추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즉, 한자차용표기법 중 문장표기의 발생은 고대형태의 구결(한문을 교수하고 학습하는 특수형식)에서 나왔고 이 문장표기법이 자체의 문체와 그 표기법을 형성한 뒤에도 구결표기방법의 발달형태를 지속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변천 발달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제하에 산문표기, 시가표기, 어휘표기의 자료들을 이 구결 연구에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한 다음 어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는 다음과 같은 예비작업이 필요하다.

첫째 이 구결은 구역인왕경의 원문(한문)을 우리말로 새기는 방법을 토로서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한자차용표기법보다는 그 전달하려는 내용을 그 원문인 한문을 통하여 사전에 파악하고 들어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원문에 대한 정확한 해독을 한 다음 우리말로 새기는 과정을 밟음으로써 토의 기능을 파악하여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결의 성격을 고려할 때 이것만으로서는 안이한 방법이다. 구결의 본래의 뜻은 구원결, 또는 전결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심전심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비록 문자로 표현된 경문이 있다 하드라도 그 문자 뒤에 숨은 경전의 내용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경전이라 하드라도 그것을 보는 철학적 관점에 따라서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구결의 토는 단순히 피상적인 한문의 해석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작성자의 이러한 철학관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한 충정과 수단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경전이라 하드라도 그 구결 작성자의 태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종파와 학통의 계통을 추구하여 그 계통의 종교관이나 철학관을 파악하는 것이 완전한 경전해석의 길로 나가는 것이고, 이를 토대로 한 내용파악이 또한 이 구결을 어학적으로 해석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구결과 대조될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뒷받침할 때 우리는 보다더 신빙성 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이러한 작업이 미비된 상황에서 진행되는 것이나 이것은 앞으로 이러한 연구의 기틀을 개척해 나가는 출발도 될 것이다.

둘째 이 구결의 토는 14세기와 그 이전의 어법과 한자의 훈독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는 구결을 모태로 하여 발달한 산문표기, 시가표기, 어휘표기 자료와 고려속요에 나타난 고대국어와 전기중세국어의 어법을 파악하여 증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종래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미해결로 남았던 문제점들도 이 구결과의 대조로 새로운 조명을 비춤으로써 상보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취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후기중세국어의 정음표기 자료에 나타난 어법과 훈의 파악이다. 이것을 철저히 파악하여 전기 중세국어의 어법과 훈을 추상해 가는 회고적인 방법이 현재로서는 가장 안전하고도 용이한 방법이 될 것이다.

넷째는 토의 성격과 그를 표기한 차자의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 비록 후대구결에 나타난 것이지만 이를 정리하여 토표기의 원리, 약체와 정해체와의 관계, 차자와 그 독법의 변천, 약체가 변천해가는 원리 등을 파악하여 이 구결에 나타난 차자들의 약체를 소급하여 증명할 수 있는 원리가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 초기부터 근대까지 쓰여온 차자의 약체는 시대에 따라 부분적으로는 개신되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오랜 전통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사용된 차자의 총목록과 그 용법을 파악하면 약체들이 변천해 간 원리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 구결에는 초서체로 표기되었거나 거기서 따온 약체가 있으므로 당시에 통용되던 자체의 고증도 요구되는 것이다.

이 구역인왕경의 구결이 제시해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는 이상에 열거된 문제들이 원만히 해결되어 이들 각 방면에 걸친 사항들이 일치할 때 그 사항은 유루없이 증명되었다고 할 것이다.


Ⅲ. 조선왕조 구결의 성격과 차자 개관


이 구역인왕경 구결에 쓰인 차자와 그 자형은 후대 구결에 쓰인 차자와 공통성을 띠고 있다. 이것은 구역인왕경의 구결과 조선왕조의 구결이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역인왕경의 구결의 성격을 규명하자면 필수적으로 조선왕조의 구결의 뒷받침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 구결에 대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고 그 작업 또한 방대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선 이를 개관하는 정도로써 구역인왕경에 쓰인 차자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길잡이를 삼고자 한다.

조선왕조의 구결은 그 성격상 한문석독구결과 한문순독구결로 대분할 수 있다. 한문석독구결은 최근 구역인왕경의 구결이 발견되면서 주목을 끌게 된 것으로 안병희교수에 의하여 소개된 바 있다. 이 구결은 구역인왕경의 구결과 일맥 상통하고 있는 것으로 한문의 해석을 토로써 나타낸 구결이다. 한문순독구결은 한문을 한문의 어순으로 읽되, 한국적인 구독처에 토를 삽입한 것으로 종래 우리가 일컬어 오던 구결이다. 이 순독구결의 토는 인쇄된 것은 그 차자를 정해체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필서할 때는 약체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1) 한문석독구결의 성격


조선왕조의 한문석독구결을 보여주는 것으로 필자가 接목한 문헌은 모두 4종이었다. 을유자본 구결 원각경 하삼지일․이 1책(필자 소장), 간년미상이나 임진 이전 판인 한문본 원각경권삼(국립도서관장), 건문삼년판 한문본 매엄경(전통문관장 현 손모씨장), 간년미상의 고려판으로 보이는 한문본 매엄경(단대 동양학연구소장)이다. 여기에 안병희교수가 소개한 가람문고소장의 을유자본 구겨원각경상일지이를 추가하면 현재로서는 모두 오종이 알려지는 셈이나 앞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찾아보면 그 수는 훨씬 증가할 것이다.

필자가 본 4종의 석독구결들을 보면 그 표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구절에 일관성 있게 표기한 것은 국립도서관장의 한문본 원각경 권삼과 단대동양학연구소본 매엄경이고 나머지 둘은 구절에 따라서 또는 후반부에 가서는 표시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것은 이 구결이 타인의 이해를 위한 표기라기보다는 표기자 자신의 학습을 위하여 표기하였다는 사실로 보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개인의 작위에 불관한 일회적, 단편적인 것이냐 전통적 보편적인 것이냐를 고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통적 보편적인 것인가는 이 계통의 자료가 좀더 나와 전승과정의 계보가 선다면 확증이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단계까지 갈 수가 없다. 다만 세부적으로는 각기 표기방법상의 차가 있으나 간과할 수 없는 공통성이 있고 또 구역인왕경의 구결과 상통하는 표기법이 있으므로 비록 개별적인 차가 있다 하드라도 이 차는 후세의 무난된 변동으로 생각되고 그 전체는 전통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여기 그 간단한 고개와 아울러 그 성격을 몇 가지 밝혀 보기로 한다(표1 참고)

⒜는 토가 지시한 대로만 읽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後ㅅ 一 묻옴과 荅샤 道場加行이니 下根修證이니 得道  名曰道場이니

⒜의 토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한문의 첫 4자의 우측에 표기한 수자는 어순을 밝힌 것이다. 한문의 이 문구 전체에서는 이곳의 어순파악이 가장 혼동하기 쉬운 곳이다. 「후」의 좌하각의 토는 「叱」의 약체로 속격조사이고 「一」에 부가된 토는 주제화첨사를 표기한 「隱」의 약체이다. 「問」의 우측에 부가된 「옴」은 「問」의 훈독 「묻옴」에서 그 어말형태를 표기한 것이다. 이 훈독어말표기법은 고려시대 한자차용표기법네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전통성을 지닌 것이다. 「荅(答)」의 우측토는 「荅」을 「荅샤」으로 읽을 것을 보인 것으로 「爲舍」의 약체와 한글을 혼용한 것이다.

 

 

 

 

 

▶ 원문 : http://user.dankook.ac.kr/~oriental/Journal/hwp/06/06_0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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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knp4bonoku138의 블로그]  글쓴이: 도탁석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