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불멸의 이순신을 잘 보고 있습니다. 23전 23승. 세계 해전사의 찬란한 승리로 기록되고 있는 이순신장군..후에 충무공이란 칭호를 받았던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의를 다했던 그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중 하나로 꼽히는 그의 인생은 언제나 하늘과 함께 하였답니다. 그의 충의를 높이 평가했던 하늘은 그로 하여금 누란과 같던 조선을 지켜내게 하였고 그가 명을 완수하였던 순간 명을 거두어 갔습니다.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는 하느님이 보우하시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래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찬찬히 읽어보시고 충과 의가 모자라는 지금 세상에 시금석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 크고 작은 일을 물론하고 신도(神道)로써 다스리면 현묘불측(玄妙不測)한 공을 거두나니 이것이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道典 4:5:1)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거북선의 눈부신 활약과 함께 한산대첩, 명량대첩 등에서의 뛰어난 전법이 승리의 주요 원인이었다.
거북선 고안에서부터 전략전술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과 지혜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꿈에 거북을 보고 거북선을 고안하다
신묘(辛卯 1591)년 47살의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오른다. 이순신은 왜침을 예상하고 미리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장비를 갖춘다. 특히 거북선*을 제조하여 전쟁에 대비한다.
어느 날 이순신은 나랏일로 고심하다가 잠이 드는데, 이 때 거북선 고안의 단초가 되는 신기한 꿈을 꾼다.
나는 병사들에게 먹일 식량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 무척이나 먼 곳까지 노를 저어 왔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거대한 거북이 바다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식용으로 쓸 요량으로 거북을 잡기 위해 화살과 무기를 총동원했다. 그러나 노력도 헛되이 도무지 내 손으로는 거북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거북의 입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왔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놀라 잠에서 깨어난 이순신은 거북 모양으로 생긴 특수한 전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거북선은 두꺼운 나무판을 높히 이어 붙인 다음 그 위에 튼튼한 철갑을 둘러 만들어졌다. 또 거북선의 뱃머리는 용머리처럼 생겼는데, 그곳을 통해 대포가 발사되고 유황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임진(壬辰, 1592)년 5월, 사천해전이 발발하기 이틀전의 일이다. 5월 27일 밤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이순신은 신비로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신령님 같은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외쳤다.
“일어나라! 왜적이 나타났다.”
이순신은 벌떡 일어났다. 이 때, 경상우수영으로부터 도와달라는 급한 보고가 날아들었다. 5월 29일 새벽,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함대는 사천을 향해 기운차게 진격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3일간의 해전 끝에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한다.
노모의 죽음을 알리는 꿈을 꾸다
정유(丁酉, 1597)년 1∼2월에 일본은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략해온다. 정유재란이 발발할 즈음 이순신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파직 당한다. 서울로 잡혀 올라온 이순신은 옥에 갇혀 한 차례 고문을 받는다. 다행히 풀려나지만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는다.
이순신은 금부도사에게 이끌려 도원수 권율이 있는 경남 합천의 초계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던 차에 순천으로 피란갔던 83세의 노모가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끝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한다.
노모가 숨을 거두던 그날, 이순신은 불길한 꿈을 꾼다. 그리고 이틀 후 부고를 듣는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4월 11일〕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 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종을 보내어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였다.
〔4월 13일〕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이순신은 비통한 심정으로 시신을 집으로 모셨다. 그러나 조정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금부도사의 재촉에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합천으로 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순신은 또다시 꿈을 꾼다. 그리고 꿈속에서 죽은 형님들을 만난다.
〔5월 6일〕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맡아서 한다는 말이냐? 통곡을 하더라도 어떻게 할 것인가?” 하셨다.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오셔서 이와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시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 전술을 알려주다
후임 통제사 자리에 올랐던 원균이 7월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한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자 이순신은 8월초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장군은 9월 16일 겨우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동, 서해로 향하는 133척의 일본전선을 명량해협(울돌목)의 거친 물살을 이용해 대파한다.
명량대첩 직전에 이순신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꿈을 두 차례 꾼다. 신령스럽게도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적군의 행적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술을 예지해 주었다. 이순신은 꿈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고, 또 꿈에서 계시 받은 대로 실전에 임한다. 그리고 대승을 거둔다. 이순신은 당시의 상황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9월 13일〕 매우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임진년 승전했던 한산대첩 때 꾸었던 꿈과 흡사하였다. 이는 무슨 징조일까?
〔9월 15일〕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
꿈에 신령스런 분이 나타나서 이렇게 진을 치고 저렇게 군사를 배치하면 크게 이길 수 있으나 달리 하면 질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9월 16일〕 곧바로 명령을 내려 적장 ‘마다시’를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조선의 형세가 누란(累卵)과 같이 위급하다보니 아마도 천상의 조선[신명]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었나 보다. 그리고 충심어린 이순신에게 조선을 구할 묘책을 계시한 모양이다. 즉, 국난이 닥치자 천상의 [신명]과 지상의 인간이 함께 역사하여 이를 수습한 것이라 판단된다.
〈참고서적〉
이순신의 『난중일기』(서해문집, 2004)
디어더 배럿의 『꿈은 알고 있다』(나무와 숲, 2003)
*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에 처음 보이며, 이후 이순신에 의해 철갑선으로 개발, 창제되었다. 거북선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왜란 발발 한달 전인 1592년 3월 27일, 장계(狀啓, 지방관원이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따르면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5월 29일 사천해전이라 하였다. 거북선은 최초의 돌격용 철갑선으로 서양보다 무려 250년이나 앞섰다.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War Memorial Museum), 영국 해사박물관(Maritime Museum),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송구봉의 ‘구선도’를 보고 거북선을 제조하다 ≫≫≫≫≫≫≫≫≫
이순신의 거북선을 둘러싸고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순신에게는 송구봉이라는 스승이 있었다. 그는 비록 서출이었지만 학식과 인품이 높아 많은 이들이 따랐다. 이순신이 12,3세 때 친구들과 돌을 모아놓고 진법연습을 하고 있었다.
송구봉이 그걸 보고 있다가 집에 다녀가라고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밤에 송구봉의 집에 갔는데, 그는 방에 누워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순신은 송구봉의 방에서 구선도(龜船圖)를 보고 집에 왔다. 송구봉이 묵언으로 교지한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이순신은 여수 수사로 와서 여수 둔덕재의 솔을 가지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배를 만들었는데 여덟 개의 구멍 중 한 개의 용도를 몰라 송구봉에게 다시 가서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구멍은 사청목(巳聽目)이라 했다. 뱀은 눈으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바깥의 말을 듣기 위해 한 구멍을 놔둬야 했다.
송구봉이 비범한 인물임을 이 이야기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구봉(龜峰)이란 호의 거북 구(龜)자가 이순신의 거북선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이순신이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데는 이처럼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
가져온 곳: [◆세상을 리드하는 1%가 되자!] 글쓴이: ■여기는분당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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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다른 내용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정부고관들
역사책 다시써야합니다,,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전쟁이었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지리멸렬 하게 벌여졌던 임진왜란은 이순신과 왜의 전쟁이었다. 조선의 관군과 명군은 거의 한일이 없다고 봐야 한다. 결정적으로 왜가 퇴각을 한 것은 이순신, 이 단 한사람에 의해서이다.
정말로 조선은 왜의 침략을 사전에 몰랐을까?
당시 조선의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왜의 조선침략에 서로 다른 의견을 내게 된다. 그래서 당쟁의 분열로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지만 이것은 제대로 된 역사의 실상이 아니다. 대마도 도주나 여러 루트를 통해서 조선의 조정은 왜 침략 정보를 끊임없이 귀찮게 받게된다. 그래서 조선의 조정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서둘러 왜 침략에 대비해 준비를 하게 된다. 틀림없이 왜의 침략은 없다고 주장을 한, 동인의 수장인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방비하게 한 것이다. 부산성전투나, 동래성 전투,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전투에서의 이 성들은 류성룡의 지시로 임진왜란을 대비해서 축성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래성, 부산성전투가 남아있는 것이다. 이성들은 그 이전에는 없던 새로 축조한 성들이었던 것이다. 이것에서 우리는 식민사학의 폐해를 볼 수 있다. 지긋지긋한 당쟁 때문에 조선이 망했고 그리고 또 임진왜란도 어이없이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이가 주장한 10만양병을 준비 못 했을까?
당시 이이가 10만양병설을 주창한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이이가 말한 10만을 준비 못해서 임진왜란에 어이없이 연전연패했을까? 그 답은 아니다. 당시 조선은 10만이상의 병력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예가 용인전투이다. 용인전투는 너무나 치욕적인 전투이었기에 이 전투를 입에 담는 다는 것은 생각도 해볼 수 없고, 다만 불문율에 붙이고 있다.
그 용인 전투는 무엇인가? 조선은 경상, 충청, 전라의 삼도의 관군을 집결시켜 용인에 주둔시킨다. 그런데 용인에 모인 조선군의 숫자는 6만에서 10만까지 이르렀다. 10만을 대비하지 못해서 왜에게 허망하게 당했다라는 상식은 잘못된 역사의 상식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10만대군은 와키자카의 천명에 의해 무참히 대패를 당한다. 와키자카가 천명을 거느리고 기습을 감행한다. 왜군의 조총에 놀란 조선군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1000명이 10만 대군을 쫓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조선군은 조총에 맞아죽은 사람보다 조선군에 의해 밟혀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이로인해 와키자카는 조선군을 허수아비로 생각한다. 왜군이 나타났다고 하면 무조건 도망가 버리는 겁쟁이로 인식한 것이다. 후에 와키자카는 이순신의 수군을 제압하라는 특명을 받고 바다로 나간다. 후에 바다에서 와키자카는 이순신 또한 오합지졸 조선의 장수로 생각한다. 왜놈만 보면 도망가기 바쁜 그런 한심한 조선의 장수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한산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유인술에 걸려 참패를 당하는 꼴을 만들어 버린다. 조선수군이 거짓으로 도망가는 척을 하니까 와키자카는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돌격을 하다가 이순신 장군의 학인진에 걸려 대패를 당하게 된다.
정말로 조선은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 했을까?
류성룡은 나름대로 임진왜란을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준비하였다. 당시의 선조는 병권을 가진, 누가 혹시라도 자신의 왕권을 침탈하지 않을까 하는 병적인 왕권 집착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혹여 신하가 왜의 조선 침략이나 그로인한 병권 확립등의 간언을 하면 역적으로 몰아 파면를 하는 병적인 상황을 공공연히 벌이곤 하였다.
당시 조정은 대마도 도주의 보고등으로 왜의 조선침략은 기정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병권확립의 최대 걸림돌은 선조였다. 그리하여 류성룡은 선조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임진왜란을 준비한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발령하고 남해지방에 성들을 축성케하고 나름대로 임진왜란을 준비한 것이다.
당시 이순신의 장군의 전라좌수영의 군세는 보잘 것 없었다. 함선은 25척 군사는 4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함포나 거북선, 판옥선은 없었다. 전부 이순신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왜의 침략은 대비하기 위해, 화포를 만들고, 개량하고, 함선을 건조하기 시작한다. 거북선과 판옥선, 그리고 함포, 화약등은 기존의 조선군의 이상의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농사를 지어서 군량미도 확보해야 했다. 이순신은 장수를 넘어서 지도자수준의 경영의식을 가진 위인으로 보아야 한다.
이순신은 최초로 함대함전의 함포 전술을 고안해 낸다. 이제까지 함대함전이란 배를 맞대고 백병전을 치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것을 뛰어넘어 미래의 함포전을 예상하고 그에 알맞는 전술과 함포 사격 훈련 및 진법을 구상해 내었다.
평양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무찌르다?
왜군은 조선의 동래성 부산성, 탄금대 전투이후 조선 함락은 시간 문제로 생각하고 장기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군의 전투방식은 도성을 함락시키고 상대방의 최고 지휘관을 처치하는 것이다. 그러니 왜군은 한양을 함락시키고 조선왕을 처치하면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왜군은 기동전을 펼쳐, 단지 부산성을 함락한지 약 보름만에 한성을 점령하게 된다. 왜군은 기동전과 단기전에 필요한 의복, 군량, 화약등의 보급품만을 소지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한성에서 평양으로 도주한 조선왕을 쫓지 않고 16일 가량을 머무르게 된다. 보급을 기다린 것이다.
그들은 생각지도 않은 장기전에 휘말리게 된다. 일개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은 왜군의 상식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왜국에서의 전투란 도성을 빼앗으면 그걸로 끝이다. 장수는 명예를 위해 도성과 함께 장렬히 최후를 맞이하는데 조선의 왕은 명예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짓는다. 과거에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에 휘말리고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 않아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다. 나폴레옹도 똑 같이 일주일 가량의 보급품만 유지한채 진격을 감행하였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스탈린의 초토화 작전에 휘말리고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2차대전에서 패망하는 결과를 맛보게 된다.
왜군은 육로로 그들의 10만군대에게 보급을 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장 자신있어 하는 해상으로 보급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보급품은 이순의 장군의 옥포해전에 의해서 2000톤이나 되는 그들의 보급품과 보급선단이 그대로 바다로 수장하게 된다. 그들은 꼼짝없이 굶어죽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도운 것일까? 정말로 현명한? 선조가 자기 몸만 빠져나오고, 고스란히 왜군에게 군량미 10만석을 넘겨주게 된다. 굶어 죽게 될 왜군을 조선 선조가 먹여살린 것이다. 아사직전의 왜군을 선조가 살려준 것이다. 그러나 10만석도 10만명에겐 궁여지책이다.
왜군은 평양까지 진격하고 평양에서 더 이상 진격을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식량과 화약등의 보급이 절대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쪽방면으로는 함경도까지 다다른다. 동쪽 방면의 왜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것은 동쪽 해상의 보급은 제대로 이루어 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보급이 전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평양의 왜군을 명나라가 패퇴시켰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역사의 상식이다. 명군은 조선군보다도 형편없는 전투력에, 전쟁수행 능력도 보잘 것 없는, 한 마디로 거지 집단이었다. 그들의 나라사정도 말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보급에 필요한 식량과 군수품을 대줄 형편이 안되었다. 그래서 후에 명나라는 겨우 5만을 조선에 보내놓고 나라가 휘청 휘청거리다가, 결국은 패망하게 된다. 명나라 군대는 이렇다할 전투를 한 적이 없다. 제대로 치른 전투는 평양성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명군은 조선의 충고를 듣지도 않고 왜군을 얕잡아 본채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참패를 당하게 된다. 평양성 전투이후 명군은 왜군을 보곤 겁을 먹고 이렇다할 전투는 벌이지 못하고 군량미만 축낸다. 조선왕을 괴롭히는 일개 거지 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평양에서 왜군이 후퇴를 하게 되는데 그들을 물리친 것은 명군도 아니고 선조의 조선육군도 아니었다. 바로 동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의한 보급로 봉쇄였다. 왜인들은 조선 평안도의 겨울을 경험해본적도 없었고, 그리고 겨울옷이란 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그 때의 상황에 대해 왜병 요시노 진고자에몬은 후에 그의 일기를 통하여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 날 밤은 북풍이 몹시 불었다. 추위는 살을 에는 듯하였고, 인간의 지각을 모두 앗아가는 듯하였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지팡이 대신 활을 잡지도 못할 정도였고, 막대기가 다 된 다리를 그저 몽유병자처럼 질질 끌고 갈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동사(凍死)나 아사(餓死)라는 죽음만이 길가에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군은 한성으로 철군도중 무려 1400명이 죽고 살아남은 자가 66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 행주산성에서 권율을 도와 승리로 이끌다?
권율의 행주대첩도 왜군이 만약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계절이 여름이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군은 동장군을 피하고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후퇴하고 성을 쌓고 성안에서 무려 4년을 기다린다.
이때 왜군이 후퇴할 당시 명군은 왜군과 정치적 교섭을 하여 그들의 안전한 퇴로를 약속해준다. 조선의 선조 또한 왕자등의 인질문제로 안전한 퇴로를 보장한다. 왜군이 성안에 틀여박혀 수세에 몰릴때 명군과 조선의 육군은 공성전을 벌인다던가, 성을 짓는 것을 방해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왜군이 성을 다 짓고 나서도 4년동안 가만 놔둔다.
이순신을 죽이려 했던 것은 왜군이 아닌 선조였다!
왜군은 4년후 정유년에 그들의 패전의 원인을 철저히 인식하고 이순신을 제거하는 것에 온갖 방법을 강구한다.
전투로는 이순신을 제거하지 못하니, 선조의 병적인 쿠테타 망상증을 이용한다.
왜장 유키나가가 권율에게 이제 바다를 통해 쳐들어 간다고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권율이 조정에 그대로 보고를 한다. (권율을 냉철하게 다시 역사적 재평가를 해보아야 한다.) 선조는 권율을 통해 바로 이순신에게 출전명령을 내리고 유키나가를 바다에서 잡을 것을 명령한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 없다. 내가 쳐들어 간다고 적에게 미리 알리는 착한 적도 없거니와, 적의 말을 믿고, 아군의 말을 믿지 못하는 한심한 왕도 없을 것이다.
이순신은 적의 계략에 놀아나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왜군은 정유재란을 준비하면서 이순신 수군의 판옥선에 대응하는 대형함선을 건조한다. 대형함선등을 합쳐 약 2000척의 함선을 준비한다.
이순신의 수군과 왜군은 견내량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대치상황을 벌이고 있었다. 이 대치상황에서 먼저 나서는 자가 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더욱이나 조선의 함선은 250척에 지나지 않았기에 먼저 공격해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무리였다.
후에 원균도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쳐들어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사령관의 지위임에도 불구하고 권율이 원균을 불려들어 곤장을 치고 압박을 가한다. 이에 원균은 마지못해 출진을 하게 되고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권율은 용인전투에서도 10만의 대군을 잃었고, 여기에서도 250척의 판옥선과 거북선을 모두 잃는다. 권율을 조선을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는 조선의 선조 비위나 맞추는 일개 평범한 조선의 장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적의 계략임이 밝혀진 이후에도 선조는 왕명을 거역한 죄로, 이순신을 사형까지 집행하려 한다. 유능한 장수와 한 나라에 같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고 언젠가는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망상에 늘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를 기회를 삼아 제거를 꾀한 것이다. 그러나 대소신려들의 만류로 사형집행만은 이루어지지 않고 백의 종군하게 된다.
이순신을 손쉽게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제거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를 점령하고 서해를 통해 북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백의종군한 이순신은 불과 12척의 함선으로 왜의 200척을 쳐부수는 명랑대첩의 신화를 이룬다.
명랑대첩이후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을 서두르게 된다.
이순신 장군 왕명을 거역하고 왜군을 공격하다!
노량에서 왜군은 일본으로 철수를 하려하지만 이순신이 뒤에서 해상을 봉쇄하고 있어서 철수를 하지 못하고 또 다시 동장군과 굶주림을 떠올리며 경악하게 된다. 그러나 이 해상봉쇄를 풀어 왜군의 안전한 퇴각을 명군과 선조는 보장하려 한다. 또 다시 선조는 적을 안전하게 돌려보내라는 웃지 못할 왕명을 내리고, 또 다시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하고 적에게 달려들어 마지막 왜란의 전투를 치른다. 이것이 노량해전이다.
이전투 이후 이순신에게 남은 것은 선조의 사형집행 명령 뿐이었다. 이순신에게 남은 것은 세장의 카드가 있었다. 자신이 사형을 당하던가! 새로운 왕조를 열어나가던가! 적에게 죽던가! 이순신은 충의의 장군이었다! 왕권을 찬탈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다만 적에게 죽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순신이 일말의 다른 생각을 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권율휘하의 조선 육군은 5000명에 불과 하였으나 이순신 휘하의 수군은 3만명에 이르렀다. 이순신의 수군은 자체적으로 개량한 각종 화기와 조총을 구비하고 있었고, 조선의 백성과 수군은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트라팔가 해전의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망발이다. 이순신 장군은 함선도 무기도 스스로 만들고 농사를 지으면서 군량비도 스스로 자급해야 했다. 이순신은 일개 넬슨같은 제독이 아니라, 리더쉽과 자질을 갖춘 비운의 지도자였다.
역사책 다시써야합니다,,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전쟁이었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지리멸렬 하게 벌여졌던 임진왜란은 이순신과 왜의 전쟁이었다. 조선의 관군과 명군은 거의 한일이 없다고 봐야 한다. 결정적으로 왜가 퇴각을 한 것은 이순신, 이 단 한사람에 의해서이다.
정말로 조선은 왜의 침략을 사전에 몰랐을까?
당시 조선의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왜의 조선침략에 서로 다른 의견을 내게 된다. 그래서 당쟁의 분열로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지만 이것은 제대로 된 역사의 실상이 아니다. 대마도 도주나 여러 루트를 통해서 조선의 조정은 왜 침략 정보를 끊임없이 귀찮게 받게된다. 그래서 조선의 조정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서둘러 왜 침략에 대비해 준비를 하게 된다. 틀림없이 왜의 침략은 없다고 주장을 한, 동인의 수장인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방비하게 한 것이다. 부산성전투나, 동래성 전투,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전투에서의 이 성들은 류성룡의 지시로 임진왜란을 대비해서 축성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래성, 부산성전투가 남아있는 것이다. 이성들은 그 이전에는 없던 새로 축조한 성들이었던 것이다. 이것에서 우리는 식민사학의 폐해를 볼 수 있다. 지긋지긋한 당쟁 때문에 조선이 망했고 그리고 또 임진왜란도 어이없이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이가 주장한 10만양병을 준비 못 했을까?
당시 이이가 10만양병설을 주창한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이이가 말한 10만을 준비 못해서 임진왜란에 어이없이 연전연패했을까? 그 답은 아니다. 당시 조선은 10만이상의 병력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예가 용인전투이다. 용인전투는 너무나 치욕적인 전투이었기에 이 전투를 입에 담는 다는 것은 생각도 해볼 수 없고, 다만 불문율에 붙이고 있다.
그 용인 전투는 무엇인가? 조선은 경상, 충청, 전라의 삼도의 관군을 집결시켜 용인에 주둔시킨다. 그런데 용인에 모인 조선군의 숫자는 6만에서 10만까지 이르렀다. 10만을 대비하지 못해서 왜에게 허망하게 당했다라는 상식은 잘못된 역사의 상식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10만대군은 와키자카의 천명에 의해 무참히 대패를 당한다. 와키자카가 천명을 거느리고 기습을 감행한다. 왜군의 조총에 놀란 조선군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1000명이 10만 대군을 쫓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조선군은 조총에 맞아죽은 사람보다 조선군에 의해 밟혀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이로인해 와키자카는 조선군을 허수아비로 생각한다. 왜군이 나타났다고 하면 무조건 도망가 버리는 겁쟁이로 인식한 것이다. 후에 와키자카는 이순신의 수군을 제압하라는 특명을 받고 바다로 나간다. 후에 바다에서 와키자카는 이순신 또한 오합지졸 조선의 장수로 생각한다. 왜놈만 보면 도망가기 바쁜 그런 한심한 조선의 장수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한산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유인술에 걸려 참패를 당하는 꼴을 만들어 버린다. 조선수군이 거짓으로 도망가는 척을 하니까 와키자카는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돌격을 하다가 이순신 장군의 학인진에 걸려 대패를 당하게 된다.
정말로 조선은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 했을까?
류성룡은 나름대로 임진왜란을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준비하였다. 당시의 선조는 병권을 가진, 누가 혹시라도 자신의 왕권을 침탈하지 않을까 하는 병적인 왕권 집착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혹여 신하가 왜의 조선 침략이나 그로인한 병권 확립등의 간언을 하면 역적으로 몰아 파면를 하는 병적인 상황을 공공연히 벌이곤 하였다.
당시 조정은 대마도 도주의 보고등으로 왜의 조선침략은 기정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병권확립의 최대 걸림돌은 선조였다. 그리하여 류성룡은 선조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임진왜란을 준비한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발령하고 남해지방에 성들을 축성케하고 나름대로 임진왜란을 준비한 것이다.
당시 이순신의 장군의 전라좌수영의 군세는 보잘 것 없었다. 함선은 25척 군사는 4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함포나 거북선, 판옥선은 없었다. 전부 이순신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왜의 침략은 대비하기 위해, 화포를 만들고, 개량하고, 함선을 건조하기 시작한다. 거북선과 판옥선, 그리고 함포, 화약등은 기존의 조선군의 이상의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농사를 지어서 군량미도 확보해야 했다. 이순신은 장수를 넘어서 지도자수준의 경영의식을 가진 위인으로 보아야 한다.
이순신은 최초로 함대함전의 함포 전술을 고안해 낸다. 이제까지 함대함전이란 배를 맞대고 백병전을 치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것을 뛰어넘어 미래의 함포전을 예상하고 그에 알맞는 전술과 함포 사격 훈련 및 진법을 구상해 내었다.
평양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무찌르다?
왜군은 조선의 동래성 부산성, 탄금대 전투이후 조선 함락은 시간 문제로 생각하고 장기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군의 전투방식은 도성을 함락시키고 상대방의 최고 지휘관을 처치하는 것이다. 그러니 왜군은 한양을 함락시키고 조선왕을 처치하면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왜군은 기동전을 펼쳐, 단지 부산성을 함락한지 약 보름만에 한성을 점령하게 된다. 왜군은 기동전과 단기전에 필요한 의복, 군량, 화약등의 보급품만을 소지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한성에서 평양으로 도주한 조선왕을 쫓지 않고 16일 가량을 머무르게 된다. 보급을 기다린 것이다.
그들은 생각지도 않은 장기전에 휘말리게 된다. 일개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은 왜군의 상식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왜국에서의 전투란 도성을 빼앗으면 그걸로 끝이다. 장수는 명예를 위해 도성과 함께 장렬히 최후를 맞이하는데 조선의 왕은 명예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짓는다. 과거에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에 휘말리고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 않아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다. 나폴레옹도 똑 같이 일주일 가량의 보급품만 유지한채 진격을 감행하였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스탈린의 초토화 작전에 휘말리고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2차대전에서 패망하는 결과를 맛보게 된다.
왜군은 육로로 그들의 10만군대에게 보급을 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장 자신있어 하는 해상으로 보급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보급품은 이순의 장군의 옥포해전에 의해서 2000톤이나 되는 그들의 보급품과 보급선단이 그대로 바다로 수장하게 된다. 그들은 꼼짝없이 굶어죽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도운 것일까? 정말로 현명한? 선조가 자기 몸만 빠져나오고, 고스란히 왜군에게 군량미 10만석을 넘겨주게 된다. 굶어 죽게 될 왜군을 조선 선조가 먹여살린 것이다. 아사직전의 왜군을 선조가 살려준 것이다. 그러나 10만석도 10만명에겐 궁여지책이다.
왜군은 평양까지 진격하고 평양에서 더 이상 진격을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식량과 화약등의 보급이 절대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쪽방면으로는 함경도까지 다다른다. 동쪽 방면의 왜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것은 동쪽 해상의 보급은 제대로 이루어 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보급이 전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평양의 왜군을 명나라가 패퇴시켰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역사의 상식이다. 명군은 조선군보다도 형편없는 전투력에, 전쟁수행 능력도 보잘 것 없는, 한 마디로 거지 집단이었다. 그들의 나라사정도 말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보급에 필요한 식량과 군수품을 대줄 형편이 안되었다. 그래서 후에 명나라는 겨우 5만을 조선에 보내놓고 나라가 휘청 휘청거리다가, 결국은 패망하게 된다. 명나라 군대는 이렇다할 전투를 한 적이 없다. 제대로 치른 전투는 평양성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명군은 조선의 충고를 듣지도 않고 왜군을 얕잡아 본채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참패를 당하게 된다. 평양성 전투이후 명군은 왜군을 보곤 겁을 먹고 이렇다할 전투는 벌이지 못하고 군량미만 축낸다. 조선왕을 괴롭히는 일개 거지 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평양에서 왜군이 후퇴를 하게 되는데 그들을 물리친 것은 명군도 아니고 선조의 조선육군도 아니었다. 바로 동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의한 보급로 봉쇄였다. 왜인들은 조선 평안도의 겨울을 경험해본적도 없었고, 그리고 겨울옷이란 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그 때의 상황에 대해 왜병 요시노 진고자에몬은 후에 그의 일기를 통하여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 날 밤은 북풍이 몹시 불었다. 추위는 살을 에는 듯하였고, 인간의 지각을 모두 앗아가는 듯하였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지팡이 대신 활을 잡지도 못할 정도였고, 막대기가 다 된 다리를 그저 몽유병자처럼 질질 끌고 갈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동사(凍死)나 아사(餓死)라는 죽음만이 길가에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군은 한성으로 철군도중 무려 1400명이 죽고 살아남은 자가 66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 행주산성에서 권율을 도와 승리로 이끌다?
권율의 행주대첩도 왜군이 만약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계절이 여름이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군은 동장군을 피하고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후퇴하고 성을 쌓고 성안에서 무려 4년을 기다린다.
이때 왜군이 후퇴할 당시 명군은 왜군과 정치적 교섭을 하여 그들의 안전한 퇴로를 약속해준다. 조선의 선조 또한 왕자등의 인질문제로 안전한 퇴로를 보장한다. 왜군이 성안에 틀여박혀 수세에 몰릴때 명군과 조선의 육군은 공성전을 벌인다던가, 성을 짓는 것을 방해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왜군이 성을 다 짓고 나서도 4년동안 가만 놔둔다.
이순신을 죽이려 했던 것은 왜군이 아닌 선조였다!
왜군은 4년후 정유년에 그들의 패전의 원인을 철저히 인식하고 이순신을 제거하는 것에 온갖 방법을 강구한다.
전투로는 이순신을 제거하지 못하니, 선조의 병적인 쿠테타 망상증을 이용한다.
왜장 유키나가가 권율에게 이제 바다를 통해 쳐들어 간다고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권율이 조정에 그대로 보고를 한다. (권율을 냉철하게 다시 역사적 재평가를 해보아야 한다.) 선조는 권율을 통해 바로 이순신에게 출전명령을 내리고 유키나가를 바다에서 잡을 것을 명령한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 없다. 내가 쳐들어 간다고 적에게 미리 알리는 착한 적도 없거니와, 적의 말을 믿고, 아군의 말을 믿지 못하는 한심한 왕도 없을 것이다.
이순신은 적의 계략에 놀아나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왜군은 정유재란을 준비하면서 이순신 수군의 판옥선에 대응하는 대형함선을 건조한다. 대형함선등을 합쳐 약 2000척의 함선을 준비한다.
이순신의 수군과 왜군은 견내량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대치상황을 벌이고 있었다. 이 대치상황에서 먼저 나서는 자가 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더욱이나 조선의 함선은 250척에 지나지 않았기에 먼저 공격해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무리였다.
후에 원균도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쳐들어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사령관의 지위임에도 불구하고 권율이 원균을 불려들어 곤장을 치고 압박을 가한다. 이에 원균은 마지못해 출진을 하게 되고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권율은 용인전투에서도 10만의 대군을 잃었고, 여기에서도 250척의 판옥선과 거북선을 모두 잃는다. 권율을 조선을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는 조선의 선조 비위나 맞추는 일개 평범한 조선의 장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적의 계략임이 밝혀진 이후에도 선조는 왕명을 거역한 죄로, 이순신을 사형까지 집행하려 한다. 유능한 장수와 한 나라에 같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고 언젠가는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망상에 늘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를 기회를 삼아 제거를 꾀한 것이다. 그러나 대소신려들의 만류로 사형집행만은 이루어지지 않고 백의 종군하게 된다.
이순신을 손쉽게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제거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를 점령하고 서해를 통해 북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백의종군한 이순신은 불과 12척의 함선으로 왜의 200척을 쳐부수는 명랑대첩의 신화를 이룬다.
명랑대첩이후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을 서두르게 된다.
이순신 장군 왕명을 거역하고 왜군을 공격하다!
노량에서 왜군은 일본으로 철수를 하려하지만 이순신이 뒤에서 해상을 봉쇄하고 있어서 철수를 하지 못하고 또 다시 동장군과 굶주림을 떠올리며 경악하게 된다. 그러나 이 해상봉쇄를 풀어 왜군의 안전한 퇴각을 명군과 선조는 보장하려 한다. 또 다시 선조는 적을 안전하게 돌려보내라는 웃지 못할 왕명을 내리고, 또 다시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하고 적에게 달려들어 마지막 왜란의 전투를 치른다. 이것이 노량해전이다.
이전투 이후 이순신에게 남은 것은 선조의 사형집행 명령 뿐이었다. 이순신에게 남은 것은 세장의 카드가 있었다. 자신이 사형을 당하던가! 새로운 왕조를 열어나가던가! 적에게 죽던가! 이순신은 충의의 장군이었다! 왕권을 찬탈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다만 적에게 죽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순신이 일말의 다른 생각을 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권율휘하의 조선 육군은 5000명에 불과 하였으나 이순신 휘하의 수군은 3만명에 이르렀다. 이순신의 수군은 자체적으로 개량한 각종 화기와 조총을 구비하고 있었고, 조선의 백성과 수군은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트라팔가 해전의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망발이다. 이순신 장군은 함선도 무기도 스스로 만들고 농사를 지으면서 군량비도 스스로 자급해야 했다. 이순신은 일개 넬슨같은 제독이 아니라, 리더쉽과 자질을 갖춘 비운의 지도자였다.
숲속벤치 | 이순신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오랜만에 보는군. | 2005/07/26 | ||||||
그레이펜텀 | 이순신이 지대한 공을 세운건 사실이지만(사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의 한국승리..의 이순신공헌도는 70%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진주목사 김시민의 호투와 권율장군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병들의 공헌을 뺄수는 없습니다. 제생각이긴 하지만 ... | 2005/07/26 | ||||||
그레이펜텀 | 그리고 시계에서 톱니바퀴하나만 빠져도 시계는 멈춰버리듯 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승리에 이순신의 승리와 의병대의 활약 둘중 어느하나만 빼더라도 조선의 승리는 보장할수 없을만큼 대단히 유기적이라고 생각되구요. | 2005/07/26 | ||||||
라이오넬 | 모든 전쟁에는 누가 주도권을 갔느냐에 따라 달라 집니다...육상 전투에서 연일 연패만 하다가 절망에서 이길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건 아마도 이순신에 승전보가 아닐까 싶습니다...물론 모든 전쟁에 하나의 영웅만 가지고 이길수는 없지만 전세를 역전시킨거에 대한건 이순신장군 공이 제일 크다고 봅니다. | 2005/07/26 | ||||||
할리후혈풍 | 육로를 차단해서 왜의 서진을 막을수 있었기때문에 이순신은 해전에만 전념할수 있던거죠. | 2005/07/26 | ||||||
백곰엉님 | 물론 의병으로 인한 선전도 있지만 이순신이 있기에 가능했던거죠 이순신이 바다에서 보급 및 후속부대를 견제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지만 한나라의 운명이 한 장군에 의해 놀아난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네요... 그렇게도 인재가 없던 것인지 ㅜㅜ 아니면 선조가.. 킁,,, | 2005/07/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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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스타전 |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 2005/07/26 | ||||||
hellojun4 | 그많던 인재 선조가 싸그리 제거 했소......... | 00:01 | ||||||
으음.. | 연작으로 더 자세하게 연재해주길 부탁드립니다... | 00:04 | ||||||
넷다이버 | 선조는 조선시대 역대왕중 2번째로 무식한 왕이라고 생각되오. 첫번째는 조선시대마지막왕인 순종...어찌됐건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씻을수 없는 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왕. | 00:11 | ||||||
분뇨의역류 | 못난 왕 하나때문에 온 백성이 고통을 당했구려.... | 00:19 | ||||||
총각 | 그당시에 산사람도 그때 일을 잘모를텐데.... | 01:20 | ||||||
삽입의추억 | 임진왜란은..온 백성 모두가 삶의 터전을 뺏기지않기위해서 싸운 전쟁이죠... 공의 정도야 다를지라도 모두가 같이 싸운전쟁입니다... 몇몇 썪어빠진 못되쳐먹은 조상들만 빼구... | 01:36 | ||||||
주먹지고일어서 | "한국에선 이순신을 영웅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웅 이라고 한다." 얼마전 카페 전체메일 속 글귀를 읽고 감동 받은 기억이 납니다. | 01:42 | ||||||
혈의누 | 왜놈보다 더 무서운 적은 선조 | 02:03 | ||||||
술머프 |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 05:25 | ||||||
울랄라~~ | 정말이지 선조는 그야말로 개꼴통이라고 해도 할말이 없는거 같네요... 진짜 최악... 역대 꼴통왕들이 있었지만 선조는 그중에서 으뜸이라 할수 있지요... -_-;;; | 08:07 | ||||||
반집 원정대 | 이순신이 조선을 뒤엎엇어야 햇다..........한 나라의 왕이..그렇게도 심약하고 우유부단에서야.... 백성들만 죽어나지......역사가 주는 교훈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현재엔 이런 지도자가 관연 업단 말인가? | 09:32 | ||||||
左劍右刀 | 이순신 장군을.. 단순히 영웅정도로만 묘사하는건 코끼리 다리만을 보고 코끼리를 판단하는것과 같은 소립니다. 하지만.. 코끼리의 모습에 이것저것 덧붙이면 코끼리가 아닌 이상한 괴물이 되어버리죠. 위에 본문이 그렇습니다. 이순신장군을 찬양하기 위해 잘못된 사실마져 적시하고 있군요. | 09:43 | ||||||
딩가딩 | 선조..선조..과연 죽어 저승에서 조상님 뵐 면목이나 있을까.. | 09:43 | ||||||
左劍右刀 | 이이가 주장한 10만 양병설은.. 상비군수준의 병력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용인전투를 거론했는데.. 당시 모인 5만병력(10만이 아닙니다.)은 전라도 4만 + 경상도 100 + 충청도 8000 + 광주(권율휘하 의군) 5000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병력은 정예병력이 아닌 병적에 기록된 장정을 중심으로 | 09:52 | ||||||
지친다지쳐 | 만약 육로가 완전히 뚫려서 일육군이 이순신 장군 본진을 쳐버렸다면 왜란의 승자는 일본이 됐을지도 모르져. 최소한 전라도로 들어오는 왜를 막아낸 육군의 공은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이순신 장군이 최고지만 ㅎㅎ | 09:54 | ||||||
左劍右刀 | 어중이 떠중이 긁어모은 잡졸들이었을 뿐입니다. 이이가 주장한 10만 양병설은 제승방략체계하에서 급조된 잡졸들로 전투를 치르면 용인꼴 날거라는것을 예상한것이 아닐까요? 병력수가 문제가 아니라 병력의 질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 09:55 | ||||||
한류의늪에빠져... | 예전에 티비에서 한 여자가 히틀러가의 가정부가 되어 갓난아기였던 애돌프 히틀러를 죽인다는 임무를 갖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내용의 외화를 본 적이 있는데요, 그 가정부는 갓난아기 히틀러를 끌어안고 자살하여 자기 임수를 완수하지만 우연히 그걸 목격한 또 다른 가정부가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것을 | 10:07 | ||||||
한류의늪에빠져... | 두려워한 나머지 길에서 구걸하고 있는 노숙자가 키우는 갓난아기를 동전 몇 푼을 주고 사서 몰래 아이를 바꿔치기 하고 그 아이가 결국 훗날 애돌프 히틀러가 된다는, 고로 역사는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테마의 이야기였지요. 그렇게 보면 역사를 재평가는 할 수 있어도 가설이란 걸 세우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 10:08 | ||||||
한류의늪에빠져... | 만일 이쪽에서 이러지 않았다면, 저쪽에서 그러지 않았다면,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까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감히 가정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라도 이순신 장군은 아마 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방법으로 조금 돌아가더라도 마지막에는 결국 승리를 거두고 나라를 구해내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 | 10:08 | ||||||
한류의늪에빠져... | 게 되네요. 우리는 직접 그 시대, 그 전쟁터에 있어보지도 못했고, 장군님처럼 나라를 구해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아 보지도 않았으니까요. (근데 제 얘기가 좀 다른 곳으로 흘러버린 것 같네요-_-;;) | 10:10 | ||||||
左劍右刀 | 이순신을 더 높히기 위해 권율을 깍아내리는 모습도 과히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심하게 취급당할 권율이 아닌데 말이죠.. | 10:29 | ||||||
eksgkreh | 당시에조총은 천둥같은 그소리와 번개처럼 빠른속력에 조총을 처음보는 사람은 총소리만 들어도 도망같습니다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은 총소리에 놀라 도망치다 자기들끼리 밣혀죽은사람이 총맞아죽은 사람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 10:31 | ||||||
eksgkreh | 이순신장군은 저두존경하지만 이순신 장군을 영웅화시키기위해 우리조상 전부를 바보로 만들지 않았스면합니다 만약 정해왜변직후에만 군사훈련시키고 무기개발했다면 일본본토도 정복했을겁니다 |
가져온 곳: [비오는 바다 ,,,]  글쓴이: rain0719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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