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바쁜 일도 없었는데 얼마 전 올렸던 청산 그림을 다시 꺼내 놓는다. 쓱쓱 그려도 되건만 안 된다. 요즘 책을 만들고 있다. 1600페이지 분량의 그림책이다. 이번에도 손에 꼽을 만한 소량의 책을 만들고 있다. 손으로 하는 일도 있지만 기계가 도와주고 있다. 이번은 아트 북이라기보다 북 아트로 봐야 될 것 같다. 페이지가 많아 나처럼 통통하게 만들어 질 것 같다. 이런 일을 재미삼아 기획에서 편집, 고해상드럼스캔,자동하리꼬미, 필름출력, 소부, 인쇄, 제본까지 쫓아다니면서 처음 하는 기계조작까지 배운다고 난리법석을 해서 디자이너의 심기를 한두 번 건드린 적 아니었다. 인쇄소에선 또 어떠했는가 고집불통의 기장이 작업을 팽개칠 지경에 이르러서야 협상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소주. 소주의 쓴 맛도 배움의 과정이라 받아들이고 기꺼이 대작하였지만 나에겐 쉽지 않은 고문이었다. 술이 사람을 녹였는지 못 먹은 소주를 마셔 주어서 그랬던지 그 일 이후로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해서 도리어 내가 손 사레를 해야 할판이다. 인쇄소의 기장(총감독)으로서 그는 평생 인쇄기계와 살았다. 30-40 년을 넘게 기계를 만지고 색을 감별하고 종류에 따라 힘을 조율하기까지 수 없는 실수와 착오를 반복하면서 배우고 익힌 기능인이라기보다 장인의로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매몰차게 했던 것을 감사로 받아들이고 싶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젠 토닥거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 그에겐 단순한 것이지만 나에겐 신기 하기만한 일들. 잉크를 배합하고 색을 조절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나보다 훨씬 고수에 가깝다. 화가가 일반적으로 만들어 내는 색보다 수백 가지의 색을 청색-파랑. 적색-붉은. 황색-노랑만으로 밀도가 촘촘한 색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최근엔 자동으로 색을 배합하는 기계가 나오긴 했지만 사람에게 있는 특별한 능력을 기계에 견줄 수 없다. 이래저래 일이 마무리 되었다. 이것저것 야식을 사다 주면서 나의 호기심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잔심부름도 마다치 않고 한 결과 원리를 깨달았다. 인쇄하기 전 교정인쇄가 꼭 판화를 찍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아침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일 하면서 단순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여러 단계로 파생 되어지는 일자리가 오밀조밀 봄에 피는 팬지처럼 새롭고 다양하였다. 앞으로 두어 단계가 남았지만 맡기기보다 또 달라붙어 공정을 지켜보고 싶다.
인쇄소 환경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평생을 살아 온 분들 앞에 잠깐 머무는 내가 할말은 아닌 것 같다. 감기를 달고 다닌 것이 내 몸이 산소를 필요로 한거 같다. 그래서 내안에 있는 청산을 꺼내 놓고 다녀 오련다.
(2)
내일까진 산에 가서 호흡을 다스리고자 한다. 자주 가는 그림 중앙의 청산을 비껴 돌면 계곡이 나온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한 여름에도 함부로 발을 담그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곳이다. 뒷산까지 오르려면 산행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몇 년 전 까짓것 하며 쉽게 덤벼들었다가 산속에 묻힐 뻔하기도 했다. 큰 산일 수록 새벽에 서둘러 떠나야하고 산을 오르는데 욕심을 부렸다간 늘 탈이 났다. 나에게 있어 산은 올라가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오르기 전에 비우고 올라 가야하는 곳이다. 며칠씩 묵으려면 등반 코스를 기억해야 하며 필히 알아 둘 것은 눈으로 보기에 산이 적다해도 초입에 들어서면 단단한 완도 정도리 몽돌 같고 매운 청양고추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산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은 산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산에서 놀라는 것은 가끔 삼을 캐는 심마니들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의 길이 아닌 산짐승이 다닌 길을 가므로 숲 속에 움직이는 기척이 있을 땐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 내 속에 있는 청산에서 심봤다는 울림이 없지만 언젠가 그 우렁차고 희망스런 소리가 터져 나오리라 믿는다. 힘들 때 청산에 오시면 당신도 쉴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오는 길이 서툴 수도 있지만 먼저 눈을 감으셔서 청산을 기억하십시오. 뿌연 안개가 걷히고 산이 보일 겁니다. 처음 오르는 청산은 미련이 남을 정도로 가볍게 다녀오십시오. 오른쪽 조금 야트막한 둔덕 같은 산도 청산의 줄기입니다. 그럼
[출처;한글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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