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 대향(大鄕)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평남 평양(平壤)
주요수상 : 자유미협전
태양상(1937)
주요작품 : 《소》 《흰 소》
호 대향(大鄕). 평남 평양(平壤) 출생. 오산고보(五山高普) 졸업. 일본 도쿄문화학원[東京文化學院] 미술과 재학 중이던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自由美協展:제7회)에 출품하여 태양상(太陽賞)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5년 귀국, 원산(元山)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李南德:본명 山本方子)과 결혼하고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으로 참여했다.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渡日)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還都)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美都波)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후 일본에 보낸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죽었다. 작풍(作風)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線畵)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된다. 작품으로 《소》(뉴욕현대미술관 소장), 《흰 소》(홍익대학교 소장) 등이 있다.
1916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에서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은 대지주 집안, 어머니 쪽은 평양의 민족자본가 집안이었다. 이중섭이
아기였을 때, 12년 위인 형 이중석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였으므로 이중섭은 어머니와 형수의 보살핌을 함께 받으며 자랐다.
1920
5세 무렵, 이중섭이 날 때부터 앓던 아버지가
죽었다. 이 즈음부터 그리기와 만들기에 깊은 흥미를 나타냈다.
1923
8세. 마을 서당에서 배우다가 곧 평양 외가로 가서 종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고학년 때에는
그림 그리기에 상당한 수준을 나타내 학교에서 그림이라면 단연 그를 꼽을 정도였다. 6년 내내 한 반이었던 김병기네 집에 자주 가서 그의 아버지
김찬영의 화구와 미술서적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 경력을 가진 이름난 유화가였던 김찬영은 1926년부터 1929년 무렵까지 활발했던
평양의 미술단체 삭성회를 이끌기도 했으므로 이중섭에게 자극과 영향을 준 바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1929
14세.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하숙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술부에
가입하였고 여기서 문학수를 만났다. 2학년 초 팔이 부러져 1년간 휴학했다.
1931
16세. 복학 직후, 도화와
영어를 담당하는 교사로 임용련이 부임해왔다. 그는 미술실을 확보하고, 아내에게 유화가인 백남순과 더불어 주말마다 학생들과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고 품평회를 열었다. 임용련은 이중섭의 그림을 수업 때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장래의 거장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중섭은 한글 자모로 구성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그림에 한자나 한글 이외의 다른 문자로 서명하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으며,
두꺼운 한지에 먹물을 칠한 후 철필이나 펜촉으로 긁어내 흰 바탕이 드러나게 하는 실험적인 방식을 시도했다. 이후 이는 은박지 등으로 나타나서
이중섭 예술의 한 특장을 이루게 된다. 문학수가 동맹휴학 주동자로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1932
17세. 어머니와 형네 식구가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원산으로 옮겨갔다. 방학
때 원산 근처 바다에서 해수욕과 낚시를 즐겼고, 서양 고전음악 감상에 몰두하였다.
1934
19세. 1월, 낡은 학교 건물을
일본인 보험사의 보상금으로 재건할 계획을 세우고 불 지르기로 친구들과 모의하였다. 그러나 실행하지는 못하다가 그 중 한 명이 몰래 불을
질렀으며, 이중섭이 이를 뒤집어쓰기로 하고 임용련에게 고백하여 묵인을 받았다.
1935
20세. 졸업 기념 사진첩 장식을 맡아 했는데, 불덩어리가 조선 땅으로
날아드는 모습을 그려 물의가 일어나 졸업 기념 사진첩의 제작이 취소되었다. 졸업 후 미술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데이고쿠미술대학에 입학, 여기서 상급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쾌대를 알게 되었다. 스케이트를 타다가 크게 다쳐 요양에
들어갔다.
1936
21세. 복학을 포기하고 3년제의 전문 과정인 분카가쿠잉에 입학하였다. 이곳에는 김병기와 문학수가
먼저 입학해 있었다. 입학동기로는 홍준명, 안기풍, 이정규 등이 있었다. 이중섭의 그림에 대해 교수가 피카소의 모방이라 비판하자 이에 항의하기도
하는 등 갈등을 빚었다. 많은 학생이 모인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조선말 노래를 유창하게 불렀고, 작업으로 어질러진 하숙방에서도 난초를 키우는
정갈함이 있어 급우들의 찬탄을 받았다. 민족 차별 태도가 없었던 화가 쯔다 세이슈를 알게 되어 급속히
가까워졌다.
1938
23세. 5월, 일본 도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인
지유비주쓰카교카이의 제2회 전람회에 3점의 <소묘>와 2점의 <작품>을 내 입선하였고 협회상을 받았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다키구치 슈조, 하세가와 사부로 등이 글을 통해 이중섭의 작품을 극찬하였다. 연말 또는 이듬해 초에 병으로 휴학하고 원산으로 돌아가서
휴향하였다.
1940
25세. 복학한 직후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졌다. 10월, 경성에서 개최된
제4회 지유텐에서 <서 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의 풍경>을 출품했다. 화가
김환기와 진환이 글을 통해 극찬하였다. 이 무렵부터 자주 개성박물관에 들러 연구와 스케치에 몰두하였다. 이런 노력은 이듬해 창립전을 치루는
조선미술가협회의 준비를 위해 이 무렵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이쾌대와 그의 형 이여성의 직간접적 영향 탓으로 보인다.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졸업하고 연구생 과정으로 계속 학교에 다녔다.
1941
26세. 3월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미술가들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는데
도쿄에서 개최된 그 창립전에 <연못이 있는 풍경>등을 출품하였다. 4월, 제5회 지유텐에 <망월>, <소와
여인>을 출품함으로써 김환기와 문학수, 유영국에 이어 회우에 추대되었고 이마이 한자부로 등에게 격찬을 받았다. 5월에는 경성에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였다. 늦여름부터 초가을 사이 일본에서 돌아와 원산에서 지냈다. 본격적으로 엽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이 해에만
90점 가까이 그려 보냈다. 이 엽서 그림 그리기는 1943년까지 계속된다. 9월부터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의 주소 면에 자신의 이름을
'소탑(素塔-흰 탑)이라고 썼다. 어린이 그림을 연구하였는데 이런 흔적은 엽서 그림의 원시주의적 화풍과 재료로
드러난다.
1942
27세. 4월, 제6회 지유텐에서 회우로서 <소와 아이>, <봄>,
<소묘>, <목동>, <지일(遲日-더딘하루)>을 출품하였다. 5월, 경성에서 열린 제2회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였다. 일본에 공부하기 위해 와 있던 시인 지망생 양명문과 니혼대학 종교학과 학생이던 구상을 알게 되었다. 애인의 모습을 담은 염필화
<여인>을 그렸으며, 여기에 '대향(大鄕)'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1943
28세. 3월, 제7회 지유텐에 이대향이라는 이름으로 5점의 <소묘>와
<망월>, <소와 소녀>, <여인> 등을 출품하였다. 출품작 <망월>로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였다.
5월에 경성에서 세번째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이 시기를 전후해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 원산에 머물면서
작업에 몰두하였다. 원산에 돌아온 후 수년 동안 같은 방을 사용했던 조카 이영진의 증언에 따르면 이중섭은 여러 해에 걸쳐 두고두고 손질하면서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런 작업태도는 월남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44
29세. 제4회 소품전에서 출품한 것으로 보이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잠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해 말 평양 체신회관에서 김병기, 문학수, 황염수,
윤중식, 이호련, 황염수 등과 6인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 출품작 가운데는 소 그림이 많았다고 한다.
1945
30세. 4월, 마사코가 배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경성을 거쳐 원산으로 왔다.
5월, 결혼하고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었다. 원산 광석동에 집을 마련했으나 곧 소련의 폭격으로 교외에 있는 과수원으로 이사했고 그 직후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10월,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다듬어오던 연필화 <세
사람>과 <소년>을 들고 갔으나 늦어서 출품하지 못하였다. 이 그림들은 곧 인천에서 개최된 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이 무렵
최재덕과 함께 지금의 미도파백화점 지하실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을 소재로 벽화를 그렸는데, 밑그림은 이중섭이 맡아 그렸다. 명동의 술집에서
친구가 여러 사람에게 뭇매질을 당하자 그것을 막느라 싸우다가 그곳을 순찰 중이던 미군 헌병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졌다. 벽화 제작 사례로
받은 돈으로 많은 골동품들을 사서 원산으로 돌아갔다. 그때 구입한 작은 불상은 늘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등잔은 원산에서 살던 내내 불 밝히는
데 사용하며 애지중지했다. 평양에 갈 때마다 서예가이자 수집가로 이름 높은 김광업 등으로부터 우리 문화재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1946
31세. 2월 조선예술동맹 산하의 미술동맹 원산지부 회화부원이 되었다. 또한 조선미술협회를 탈퇴했던 사람들로
구성된 조선조형예술동맹에 가입하였다. 이 모임에서 단상에 올라가 발언 중인 길진섭의 따귀를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5월에 열린 회원전에
출품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1주일 만에 사직하였으며, 이 무렵 화가 지망생 김인호와 인연을 맺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었으며, 이때 아이의 관에 복숭아를 쥔 어린이를 그린 연필화 여러 점을 넣었다.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잠시 했고,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렸다.
1947
32세. 연초에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응향(凝香)』에 실린 시와 표지화에
인민성과 당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맹렬하게 비판받았다.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에 속표지 그림을 그렸다. 8월, 평양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은 나는 어린이>를 냈다. 이 작품에 대해 소련인 평론가 나탐이 극찬하였다.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1948
33세. 2월, 이 무렵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한 친구 오장환을 만났다. 이 해 또는 이듬해에 평양에
이어 원산에 온 소련의 미술가와 평론가 3인이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 천재이기 때문에 '인민의 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당시 그의 그림은 성난 소와
닭, 까마귀들을 굵은 선과 속도감 있는 필치로 그린 것이었다. 이후 이러한 압력을 피해 소련식 사회주의 사실주의풍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49
34세. 봄에 둘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하였다. 이 무렵 박수근과 자주
교유하였다.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려 고발당하기도 하였다.
1950
35세. 6월,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었다. 10월, 미국군의 대거 개입으로 전세가 바뀌면서, 집이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피신하였다.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12월 초 중국군의 대거 개입으로 다시 바뀐 전세와 미국군의 원자탄 투하 위협에 따라 어머니와 나머지
가족들을 두고 부인, 두 아들, 조카 영진과 함께 피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다 만 작품 1점만을 가지고 후퇴하는 국군의 화물선을 타고 3일
걸려 부산에 다다랐다. 곧 피난민 수용소에 가게 되었고, 신상 조사 후 외부 출입이 허용되면서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을 하였다. 이 때 널빤지를
훔친 껌팔이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헌병을 말리다가 헌병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큰 상처를 입었다.
1951
36세. 봄에 악화된 전세에 따른 당국의 종용으로 가족과 제주도로 건너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했는데, <피난민과 첫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 것이다. 변두리의 작은 방을 제공받아 살기 시작하였는데, 적은
양의 배급과 고구마 그리고 바닷가에 나가 잡아온 게로 연명하였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평온한 눈빛을 지닌 소를 목격하고 다시 소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특히 이웃에 있는 잘생긴 소에 반하여 이를 열심히 그렸다. 또한 후일 벽화를 그리겠다며 갖가지 조개껍데기를 채집하기도 했다. 9월에
부산에서 열린 전시미술전(또는 월남미술가전)에 출품하였다. 서귀포에서 그린 것으로는 유화 <서귀포의 환상>, 그리고 두 점의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이 있다. 배를 태워준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하나 이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12월 무렵 다시 부산으로 옮겨가 오산학교 후배를 만나 범일동에 있는 귀한동포를 위한 판잣집을
얻게 되었다.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왔다. 이 무렵 이곳 풍경을 그린 것이 <범일동
풍경>이다.
1952
37세. 2월,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에 가입하였다.
3월, 종군화가단에 대한미협과 공동으로 개최한 3.1절 경축미술전에 출품하였다. 이 무렵 부인이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고 아이들이 병드는 등
곤란이 계속되었으므로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여름에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그후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지내다가
유화가 박고석의 집에서 3개월 가량을 지냈다. 연필 스케치를 무수히 했으나 거의 불쏘시개가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친구 한묵이 의뢰 받은
노래극의 공연에 필요한 무대장치와 의상, 소도구 만들기 등의 일을 도우며 남포동에서 지냈다. 또 영도에 있는 대한경질도기주식회사에 다니던 친구
황염수의 소개로 그 회사 작업대에서 두 달 동안 미술대학생 김서봉과 함께 지냈다. 10월부터 주간으로 발행되던 『문학예술』에 삽화를 그렸다.
12월, 미국 아시안 소사이어티 재단으로부터 그림 재료를 제공받아 작업한 것이 손응성, 한묵, 박고석, 이봉상 들과 전람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이 무렵 또는 이듬해 초, 일본에 있던 부인이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 일본서적을 보내 팔았으나 책값을 떼이고 큰 손해를 보았다. 또
일본에 밀항하여 갔다가 체포된 이중섭의 친구가 부인에게 보증금과 여비를 빌리고는 이를 돌려주지 않아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연말 무렵
일본으로 가기 위해 애쓰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해 김광균과 구상, 일본의 지인들이 애를 썼다. 처가에서도 주위의 고관 등에게 부탁하는 등
이중섭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53
38세. 5월 말 신사실파에 가입했으며, 그 세번째 동인전에 2점의
<굴뚝>을 출품하였다가 당국의 조사를 받고 철거당했다. 7월 말, 오래 애쓴 끝에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이때, 늘 지니고 다니던 불상과 태양상의 부상으로 받은 팔레트, 그리고 70매 가량의 은박지 그림들을 부인에게 맡겼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가기 위해 애썼으나 좌절되었다. 이 무렵부터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림을 동봉하기 시작하였다. 8월 휴전이 성립되면서 정부가
서울로 돌아갔다. 이중섭의 고미술에 대한 안목을 신뢰한 통영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교육책임자인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으로 갔다. 이곳 졸업생으로
화가를 지망하던 이성운과 한 방에서 지내며 제작에 몰두, <달과 까마귀>, <떠받으려는 소>,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흰 소>, <부부> 등 여러 작품을 완성하였다.
1954
39세. 봄에 이성운과 통영
일대를 다니면서 풍경화 제작에 몰두하였다. <푸른 언덕>, <충렬사 풍경>,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등을 그렸다. 5월 무렵, 유강렬, 장윤성, 전혁림과 4인전을 열었으며, 양성소에 분규가 생겨 곧
통영을 떠났다. 화가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로 갔다가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올라갔다. 초여름 무렵 서울로 가 여러 곳을 전전하였으며, 6월 한국전쟁
발발 4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3점의 <소>, <닭>, <달과 까마귀>를 내서 호평을
받았다. 7월에 원산 사람 정치열이 누상동에 있는 집을 제공해주었으므로 여기서 개인전을 열 계획으로 제작에
몰두하였다. 이 집에서 대표작 <도원>, <길 떠나는 가족>등을 그렸다. 연말에 집이 팔리자 이종사촌 이광석 집으로 옮겨
전시회 마무리에 몰두하였다.
1955
40세. 1월 1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박지 그림을 비롯한 소묘 10여 점을 냈다. 일반의 호평과는 달리 몇몇 평자들에게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으며, 출품작 중의 은박지 그림이 외설스럽다 하여 당국에 의해 철거되는 등 물의가 일어났다. 전시 기간 내내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등
무리를 했고, 전시가 끝난 후에는 그림 값도 제대로 못 받는 등 아내의 빚을 갚아보려는 애초의 목적을 전혀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곧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대구역 앞의 여관과 칠곡의 최태응 집을 전전하며 제작을 계속해
5월에 대구 미국문화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며, 실망과 분노의 감정에다 영양 부족까지 겹쳐 극도로
쇄약해졌다. 당시 미국문화원의 책임자 맥타가트가 이 전시회에 출품한 은박지 그림 3점을 미국 뉴욕 모던아트뮤지엄에 기증하였다. 왜관의 구상
집에서 요양하였으며, 이 무렵 단란한 구상의 가족을 부러운 듯 쳐다보는 자신이 등장하는 <구상네 가족>과 <성당 부근>등을
그렸다. 대구로 올 때부터 노이로제 환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여관의 손님 신발을 모두 거두어 씻기도 하고, 청소를 하기도 하는 등 보상
행위에 몰두하여 친구들로부터 정신병자라는 말을 들었다. 7월, 한 달 동안 대구 성가병원 정신과에 입원하였고, 자신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필로 사실적인 <자화상>을 그렸다. 8월 말경 서울의 이광석 집에 머무르게 되었으나 이광석이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면서
친구들이 수도육군병원 정신과에 입원시켰다. 그후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겼고 늦가을에 퇴원해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극심한 황달
증세를 나타냈다.
1956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봄에 청량리뇌병원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원장 최신해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니라 극심한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즉시 퇴원하였다. 그후 상태가 극심히 나빠져 서대문
적십자병원 내과에 입원하였다. 입원한 지 한 달 가량 지난 후인 9월 6일 숨을 거두다. 3일 뒤 이 사실을 안 친구들이 장례를 치루었다.
화장된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른 일부는 일본에 살던 부인에게 전해져 그 집 뜰에 모셔졌다.
1957
이중섭을
따르던 조각가 차근호가 새긴 묘비가 망우리 무덤에 세워졌다.
1965
친구 김병기에 의하여 약전이 씌어졌다.
1971
홍익대 대학원생 조정자에 의하여
광범위한 조사를 거친 석사학위 논문이 발표되었다.
1972
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유작전과 작품집이
출판되었다.
1973
시인이자 문필가인 고은에 의해 조카와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이 월간지의 연재를 거쳐
출판되었다. 그후 이를 토대로 하여 영화와 연극, 텔레비전 드라마 등이 만들어졌다.
1978
정부수립 3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1979
4월, 부인이 간직하던 엽서 그림과 은박지 그림 등 모두 200점 가까운 작품이 서울 미도파
백화점 화랑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1980
부인과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와 동봉한 그림을 엮은 서간집이
출판되었다.
1986
30주기를 맞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1997
서귀포 살던 집이 당시
서귀포 시장 오광협의 노력으로 발견되었고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또한 이중섭이 피난 당시 거주했던 서귀동 512번지 일대 360m 거리를
'이중섭거리'라고 명명했다.
1999
문화관광부가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것을 기념하여 이중섭전을 서울 현대화랑에서
개최하였다. 연필화 <자화상>이 처음으로 전시를 통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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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李仲燮)씨와의
하루
내가 이중섭 화백을 만난 것은 1954년의 여름으로 기억된다.
장마비가 멎은 늦은 아침인데,
이젠 그도 고인(故人)이 된 무용가
옥파일(玉巴一) 씨가
동반하여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다.
구두는 말할 것도 없고, 바지 가랑이까지 흙투성이가
된 두 사람은 어디서 마셨는지 아침부터 거나해 있었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들어서자마자 옆에 있던 직원이 피식 하고 웃음을 뿜었을 만큼 그들의
행색은 간밤의 비에 젖은 흔적으로 무척 후줄근하고
초라하게 보였다.
원래 데카당스의 기질(氣質)이 짙은 옥파일씨도
그러하거니와 그보다도 동반자(同伴者)의 차림새나
모습은 두드러지게 개리커처하였던 것이다.
부스스한 얼굴에 노르스름한 콧수염을 기르고
시체엔 보기 드문 베레모 같은 것을 썼는데,
무릎이 나온 '사지'바지와 땟국이 흐르는 흰 와이셔츠를
입고, 그 무더운 날씨에 투박한 겨울 상의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몸 전체가 구부정한데,
술취한 탓인지는 몰라도 한자리에 그냥 서 있지를
못하고 뒤뚱거리는 것이 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사람 같았다.
"박형, 저 사람이 이중섭 씨야. 왜 알지?
화가(畵家)말이야."
언제나 알콜에 찌든 떠듬떠듬한 헛소리로 옥파일 씨가
나의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그가 약관(若冠)으로 일본의 유수한 미전(美展)에
입상한 천재화가라는 것은 뒤에 들어서 안일이지만,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첫인사를 그와 나누었다.
그러고는 좀 난처해졌다.
왜냐면 두 사람의 찾아온 뜻이 뻔하기 때문이다.
술과 벗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옥파일 씨는 뜻맞는
친구와 얼려 술을 마시다가 모자라면 곧잘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시간이 어중간했다.
토요일이긴 했지만 점심때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두사람은 내가 양해를 구하고 돌아앉아
남은 일을 마무리하는 이윽한 시간을 무슨 빚받으러
온 사람들처럼
의자에 버티고 앉아 그냥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적이 불유쾌했다.
옥파일 씨는 그렇다 치고라도 방금 첫 인사를 나눈
이중섭씨인가 하는 사람의 거동 좀 보소.
팔짱을 끼고 앉아, 무섭게 눈을 내려 감고는 이내
스르르 코를 골기 시작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오만불손(傲慢不遜)한 주정뱅이 화가-
나는 처음 그를 이런 위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나의 관찰이 사뭇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없이 수줍고 겸손한 위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근처의 단골 식당에 그들을 이끌어 점심 식사를
시키려니까. "식사 보담, 우리 술이나 한잔씩 하면서
얘기나 하지. 그게 좋겠지?"
옥파일 씨가 화백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때의 화백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당황하는 눈초리로 흘금흘금 두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면서 이런 때의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망설임으로 무척 고심을 하는 태가 얼굴에 뚜렷했다.
세 사람은 그 조그만 식당에서 소주를 꽤 마셨다.
원래 옥파일 씨의 주량은 밑빠진 독이지만,
이 화백의 주량도 만만하지 않았다.
권하는 잔은 지체하는 법 없이 들이켜고 되돌려 왔다.
주기가 돌면 으레 옥파일 씨는 자기 나름의 예술론을
펼쳐놓기가 일쑤다.
현역은 아니지만 발레가 전공인 그는, 시(詩)도 쓰고,
그림도 알고, 음악에도 일가견을 갖는 식의 다양한
예능의 소지자였다.
마침내 문외한(門外漢)의 두 사람이 현대 회화에
의론이 미쳐 시시비비를 다툴 때까지도 화백은 잠자코
경청하면서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그 경청하는 자세가 퍽 겸허하고 진지했다.
흡사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학생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때 두 사람
(나와 옥파일 씨)이 신이 나서 주고받던 논쟁은
추상화(抽象化)에 관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무렵 우리 나라 화단에도 비중을 갖고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추상화를 정통의 예술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아류(亞流)로 볼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엎치락 뒤치락의 구론이 오간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숫제 공자(孔子)앞에서 문자를 쓴 셈이었다.
그러나 화백은 끝내 한마디의 참견도 하지 않았다.
세사람이 모두 술이 어지간히 되어 식당을 나온 것은
거의 저녁 무렵이 되어서였다.
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헤어지기 아쉬운 빛들이
표정에 감돌았다.
"이번엔 내가 한잔 낼테니,
우리 집에 갑시다." 이중섭씨였다.
나는 아까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뭔지 모르게
화백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달관한 예술가가 지니는 신비로움 같은 것이 그 인품
속에 감추어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잔잔한 눈이 한없이 맑은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꼬리끄는 아쉬움을 부담없이 자기 집으로 이끌 만한
풍류가 능히 그의 몸과 생활 속에 배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그때 하였다.
세사람은 누하동(樓下洞) 에 있는 이화백의 하숙집으로
갔다.
일본식 집의 이층 '다다미'방이었다.
8첩(疊)넓이의 꽤 큰 방은 여기 저기에 흩어진 화구와
그리다가 만 그림 조각으로 쓰레기터같이 너저분했다.
바람벽에는 그가 손수 그려 붙인 그림으로 거의 빈틈이
없었다.
화백이 듬성듬성 방바닥을 치우고 있는 동안 나는
그러한 그림들을 구경하였다.
그림을 모르는 탓인지는 몰라도 역작(力作)같은 것은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붓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서
만든 그림 같은데,
내가 여태껏 보아온 그림과는 달리 그 화풍이 좀 독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재는 발가벗은 아이들,
그것도 발가락 다섯 개를 극명(克明)하게 그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호박넝쿨, 물고기, 비둘기, 황소, 닭, 그중에도
바닷게를 유난히도 많이 그린 것이 눈에 띄었다.
무슨 동화책 속의 삽화를 보는 것 같았다.
"자 앉읍시다." 그새 방바닥 한가운데에 반상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상 위에는 반쯤 남은 청주 됫병이 얹혀 있고,
안주는 김치깍두기 뿐이었다.
"이 어인 정종이어?"
옥파일 씨가 신기하다는 듯 반색을 하니까,
자기를 사숙하는 미술대학생이 사들고 온것이라면서
돈도 좀 두고 간 것이 있으니까 오늘밤 마음껏
마셔보자고 했다.
세 사람은 다시 주거니 받거니의 술타령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밖에는 머츰했던 장마비가 생각난 듯 돋혀 오고 있었다.
반병 남짓한 술은 삽시에 없어지고, 화백이 흔들흔들
바깥으로 나가 구멍가게에서 다시 소주를 가져왔다.
그것이 거의 밤을 새우며 마시는 동안 여러 차례 되풀이
되었다.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아랫방 주인 아주머니가
올라와서 저녁밥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화백은 다락문을 열고 뚜껑 없는 냄비를 집어냈다.
그것이 쌀독인 듯 잠시 들여다 보고 나서,
"쌀이 좀 모자라겠는데..." 하고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술 먹는데 밥은 뭘"
옥파일씨가 그만 두라고 했다.
그럼 저녁은 술로 때우고, 내일 아침밥이나 부탁한다고
주인 아주머니를 돌려 보냈다.
명색은 자취생활(自炊生活)인데 마음씨 좋은 주인
아주머니가 쌀만 주면 자기네들의 하는 밥에 덧얹어
지어준다는 것이다. 김치도 재료만 사다 주면 담가 주어, 깍두기 안주는 아직도 단지에 하나 가뜩 있다고 숫제
단지째 상 옆으로 갖다 놓았다.
"전 그림을 잘 모릅니다만,
선생님의 그림은 무슨 얘기를 소재로 한 그림들 같군요."
나는 화백의 얘기가 듣고 싶어서 우정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적중한 것 같았다.
여태껏 잠자코 술잔만 건네던 화백의 입에서 흡사
물꼬를 터놓은 봇물처럼 사연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림이 색채와 형태를 통해 시각에 호소하는
예술이라지만, 소재에 따라선 얘기를 담아 그려보는
재미도 있더군요."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자기가 바닷게를 즐겨 그리는
데는 까닭이 있다고 했다.
1·4 후퇴때 원산(元山)에서 솔가하여 남하한 화백은
제주도 서귀포(西歸浦)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한국말을 모르는 일본 여자인 아내와 두 아이와
그리고 천하에 주변머리 없는 화백으로 구성된
피난 식구는 이내 무서운 굶주림의 엄습을 받아야 했다.
별수 없이 그는 아침부터 갯가에 나가 새끼게를 단지로
하나씩 잡아와선 그것을 삶아 끼니로 삼았다고 한다.
"처음엔 정말 못 먹겠어요." 갯벌에 지천으로 기어다니는 새끼게는 워낙 작아서 알맹이가 없다.
식용으로 삼았다면 오직 딱딱한 껍질을 씹는 맛일 텐데,
그것을 어린 꼬마들에게까지 먹였다니 지난 일이지만
듣는 마음이 아팠다.
그와 가족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 은인을 수없이 잡아먹은 죄의식 때문에 게를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림 속의 아이들은 못 견디게 보고싶은 그의 꼬마들,
그리고 그가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의 이미지도 그림으로
담는다고 했다.
굶주리다 못한 그의 아내는 마침 미귀환일인(未歸還日人)
들의 송환케이스로 아이들과 함께 친정인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화백은 돈이 마련되는 대로 밀항하여 뒤따라가기로 하고
그들 가족은 부산 부두에서 어설프게 헤어졌다고 한다.
"늦어도 석달 안으론 들어가서 같이 살겠다고 한 것인데, 벌써 2년이 넘었다"면서 화백은 좀 숙연해졌다.
그의 계획은 그림이 되면 개인전을 열어,
거기서 팔린 그림 값을 모아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화백의 유일한 희망이요 창작활동의 원천이며 생활의 전부라고 했다.
그 동안 부산 등지(等地)에서 한두 차례 소규모의 작품전을
벌이기는
했으나 재미를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재미를
못 본 것이 아니라 팔린 그림값을 친구에게 떼이기도 하고, 생긴 푼돈은 술값으로 탕진해 버린 것이라고 옥파일 씨가 주석을 달았다.
그래서 그를 걱정하는 주위의 몇몇 사람이 서둘러 이번에는 본격적인 개인전을 갖고 목돈을 만들도록 이렇게 널찍한 공방(工房)까지 주선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변변한 그림이 사십점은 있어야 하는데,
그림이 잘 되지를 않는다면서, 지금 방안에 너절하게
걸린 그림들도 몇 개를 빼고는 미완성이거나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졸작들이라고 푸념을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화백의 순수한 창작의욕에서 그리는
그림이 아니고 다급한 필요에 의해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내 나름대로 풀이를 했다.
아무튼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로 삼는 창작활동의 부진에
서 오는 초조감의
갈등 속에서 고민하는 화백의 몸부림을 짐작할 만하였다.
그것을 술과 친구 속에 얼버무리며 지내는 것이 화백의
그 무렵의 생활인 듯하였다.
"뭐 꼭 일본에 가셔야만 합니까? 한국에서 터전을 닦고
가족을 다시 데려오면 되지 않습니까?"
나는 귀중한 화가 한 사람을 아주 일본에 빼앗길 것 같은
아쉬운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물었다.
화백은 대답대신 그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때 그의 얼굴에는 피난생활에 지친 짙은 곤비(困憊)의
그늘이 내려 덮는 것 같았다.
이 화백의 처지로 보아 나의 그 말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씨알먹지 않는 제안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아직은 예술가가 예술로써
먹고 살 수 없는 땅에, 그것도 굶주리다 못해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가족을 다시 데려온다는 것은
화백으로서는 생각할 가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현실 적으로 한·일 간의 국교가 열리지 않았던
그 무렵의 사정으로 보아 일본 사람인 아내를 일본에서
데려온다는 것은 이 화백이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일보다 몇십 배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때의 나의 충정은 이 화백이 꼭 우리 땅에서
빛을 보는 화가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그런데 그는, 지난 해 겨울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보고 왔노라고 했다.
그렇게도 그리워서 못 견디는 가족을 일본에서 만나고
되돌아왔다는 말이 언뜻 곧이 들리지 않았으나,
화백은 안타까운 그때의 사연을 찬찬한 그러나 감동이
섞인 어조로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뭐라고 딱 잘라서 대답하지 못한 나의 충정과
물음에 대한 화백의 해답이 되기도 했다.
몇몇 친구의 주선으로 외항선(外航船)의 선원수첩을
만들어 화물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숙원은 쉽게 풀리는가 했다. 그런데,
일본 고베항(神戶港)에 내려 가족이 있는 도쿄(東京)로
가기 위해 역을 찾는 길목에서 일본경찰에 붙들리고
만 것이다.
그 무렵 일본에는 밀입국자가 많아 감시의 눈이 몹시
번득일 때인 만큼 몰골과 행색이 현저한 화백을
놓칠 리가 없었다. 외항선원의 신분(?)을 가진 그가
당장 밀입국자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거짓없는 자백을
받은 경찰은 천진하리만큼 솔직한 화백의 태도에
감동한 것인지, 혹은
화백의 딱한 처지를 동정한 것인지는 몰라도 퍽 처우가 친절했다.
도쿄(東京)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 가족에게 연락을
해주었다.
이윽고 그의 아내가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찰은 다음날 화백이 배로 되돌아갈 것을 조건으로
그들 내외가 하룻밤을 지낼 여관까지 주선해 주었다.
아담하고 조용한 이층 방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껴안았다.
꼭 견우 직녀의 해후와 같았다고 화백은 그때의 감개가
새로운 듯 표정이 황홀해졌다.
"아이들은 왜 데려오지 않았소."
"급하게 오느라고..., 그리고 뭐, 오늘밤은 둘이서만 갖는 것이
좋잖아요?" 아이들은 집에 가
서 천천히 봐도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내일은 배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화백의 마음은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내의
표정은 소녀같이 밝았다.
"여까지 온 당신을 어떻게 되돌려 보내요? 저가 내일 부탁해 볼께요. 우리
목욕하고 잡시
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는 창문을 열고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보름달이
휘황한 밤이었다.
화백이 뒤에서 두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고즈넉이 껴안았다. 그 손을 꼭 쥔
아내의 뺨에는 어느새 눈물이 범벅져 있었다. 화백도 복받치는 서러움을 누를길 없어 눈물을 마구 흘렸다.
이국땅 낯선 항구의 달은 유난히도 밝았다.
저 달이 기울면 다시 이별이 온다는 속된 감상이 그때처럼 무게를 갖고 달을 바라보게 한 적도 없었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고 한 소월(素月)의 시정(詩情)이
크낙한 감동을 싣고 가슴에 사무치는 달이었다고
화백은 말한다.
그의 일작(逸作) <달>은 그때의 감명이 모티브가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튿날 그의 아내는 도쿄(東京)의 요로에다 전화를 걸었다. 일본의 유수한 재벌 계통의 규수였던 그녀의 간청은
이내 현지의 경찰에 힘을 미치어 왔다.
배가 고베(神戶)를 떠날 때까지 도쿄를 다녀와도 좋다는
허가가 내린 것이다.
그것은 실상 주변껏 일본에 눌러있어도 좋다는 묵시적인
조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쿄의 상황은 화백을 그냥 일본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였다.
전쟁으로 몰락한 처가의 가계는 모녀가 뜨개질로 간신히
이어나가는 형편.
그보다는 거지가 되어 나타난 사위에게 대한 장모의
노골적인 냉대는 마련없이 찾아온 자신의 경솔을
뼈저리게 뉘우치게 만들었다.
화백의 의지와 반의지(反意志)가 결정적으로 귀국을
마음먹게 한 것은, 옛 동경미전(東京美展) 때의 선배
화가를 찾았을 때였다.
그는 전후의 일본화단에 중진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중섭 씨였죠?" 누구시더라 하는 표정으로 화백을
살펴보던 그는 별로 반기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맞는
것이었다.
어떤 도움될 의논을 바라고 찾아간 화백은 그냥 맥이
풀렸다.
질화로의 빈재를 부질없이 쑤석거리면서 내키지 않는
투로 얘기하는 일본 화단의 근황 같은 것만 듣고 그 집을
물러나왔다.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결국 아내와 어린 두 아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
선배 화가와의 대화를 통해 부흥하는 일본 화단의 움직임이 그의 예술을 능히 받아들일 소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힘이 솟았다.
그러자면 우선 제작에 필요한 아틀리에 한 칸이라도
마련할 자금이 있어야 한다.
그 돈을 한국에서 만들어 다시 들어와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돈을 벌어가지고 꼭 온다." 무심한 아이들을 차례로 안아보고, 붙드는 아내의 손을 뿌리치다시피 하여 화백은 타고 갔던 화물선 편에 실려 되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끝내 풀지 못한 비원(悲願)을 안고
생애의 마지막을 닫는 화백의 철저하리만큼 기구했던
운명은 이 때 결정적으로 그 지침(指針)이 돌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설사 화백이 그것을 예감했다 하더라도 그의 깔끔한
기질이나 지나치게 수줍은 성격은 무가내하 그 비극의
길을 스스로 걸어나올 수밖에 없는 화백의 화백다운
운명이 아니었는가 싶다.
화백은 본래 말수가 적고 어눌한 위인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인간됨의 순수성은 언어에 꾸밈이 없는
대신 사실이나 감정의 표현이 매우 정확했다.
정확하다는 것은 언어의 선택이나 줄거리의 전개가
논리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화백의 화법(話法)은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무시한 것이었다.
가령 달(月)을 얘기할 때도 두 손으로 둥그렇게 달모양을
그려보이면서 솟구치는 감회와 그 때의 정경을 스스로
도취된 표정과 목소리로 나타내는 식인데,
그것이 그의 어슬픈 말솜씨와 잘 조화를 이루어 듣는
사람의 마음에 정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작용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화백과 일본행(日本行)은 이미 그의
인생에서 떼칠 수 없는 숙명적인 과제이며, 얼마나
절실한 현실적인 염원인가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화백은 선반에서 자개무늬가 있는 조그만 칠기함을
정중히 들고와서 우리 앞에 놓았다.
그것은 그의 방에 있는 유일한 가구였다.
그 속에는 일본에서 그의 아내가 보낸 편지가 차곡차곡
간직되어 있었다.
화백의 양해를 얻고 그중 한 통을 집어서 읽어보았다.
확실한 사연은 지금 기억할 수 없지만, 화백의 건강에
대한 걱정, 아이들의 근황, 빨리 일본에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는 등의
내용이, 화백의 절실한 심정에 비해서는 퍽 담담한 글귀로 엮어져 있던 것
같았다. 지체있는 일본 여자의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을 엿볼 수가
있었으나,
그 보다는 재회(再會)를 기다리는 자세가 남편에 대한
신뢰감으로 안정되어 있는 듯했다.
그걸로 보아, 화백이 아내에게 띄운 소식은 절박한 그의
사정과는 달리 낙관과 희망에 찬 내용의 것이 아니던가
짐작된다.
그렇다면 두 사람사이에서 오고간 숱한 사연의 편지는
결국 가족 재회라는 그들의 한결같은 소원이나 운명에
아무런 뜻과 구실을 끼치지 못한 헛된 문안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던가?
만약 화백이 불여의한 실정을 일본의 아내에게 사실대로
알렸던들, 그의 일본행의 꿈은 보다 손쉽게 실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냐면, 화백의 심리적인 부담은한갓 일본으로 도항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건너간 뒤의 생활 근거를 삼을
자금까지를 전시(戰時)의 불모지에서 마련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깔끔하고 수줍은 성격은 끝내 불우한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할밖에 없는 운명의 줄거리를 좇아야만 했던 것
같다.
한 사람의 예술을 이해하려고 할 때, 흔히 그의 인간과
생활과 정신을 천착한다.
그것이 그 예술을 밑받치는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날 밤 이 화백에게서 느낀 작품 세계는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소박한 행복에의 추구에 불과했다.
가족을 만나 가족과 함께 산다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행복관.
그것이 그를 몰아 작품을 그리게 하고 내용을 형성시킨
화백의 지배적인 세계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와 같은 필부의 소박한 행복관을 높은 예술의 세계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물론 화백의 예술적 천재가 가능하게 한 일이었겠지만,
그것을 뒤집어서 생각한다면 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세계가 그의 예술을 강렬하게 붙들 수 있었다는 것은,
화백이 한갓 탐미적(耽美的)인 예술지상주의자(藝術至上主義者)이거나 괴팍스런 위인이 아닌 매우 노멀한 인간형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한다.
가장 예술가다운 생애를 통해 가장 인간적인 예술을
완성시킨 사람. 그것이 바로 이중섭 화백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밤은 깊어 자정을 지났다. 열어 놓은 창 밖에서는 세찬
빗발이 양철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앙철지붕에 비가 내리는데... 이 밤이 얼마나 좋습니까? 응? 박형, 옥형" 시를 읊듯 뇌이면서 화백은 뜸해진
술잔을 마구 권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화백을 만나보지 못했다.
적십자병원(赤十字病院)에서 간호하는 사람 하나 없이
고독하게 숨을 거두어 갔다는 소식도 후문으로 접했을
뿐이다.
내가 만난 다음 해의 1월인가 미도파화랑(美都波畵廊)에서 대망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러나 모처럼 들른 것이 화백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출품된 그림중 내가 누하동 2층 방에서 본 것들은 불과
몇 점밖에 되지 않았지만, 웬일인지 거기 걸린 모든
그림이 낯익은 것만 같았다.
특히 화백이 자신의 네 가족을 소재로 그린 명작
<가족>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
나오는 길의 방명록 한자락에 나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얘기를 눈물겹도록 많이 듣고 갑니다."
(1974.)
이중섭(李仲燮)씨와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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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천형처럼 고독과 방황과
목마름으로
불꽃처럼 뜨거운 그림의 혼을 불살른 이 땅의
불멸의 화가 대향 이중섭화백을 그려보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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