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게 잔인한 자는 결코 선량하지 않다.
동물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잘못 생각하고
동물에 대한 우리의 행동에는 도덕적인 의미가 전혀 없다는 미망,
혹은 동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유태인의 사상에서 비롯된
유럽의 불쾌하기 짝이 없는 조잡스럽고 야만적인 태도이다.
이런 그릇된 사고방식은 철학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데카르트 철학)
그 논거는 모든 해명을 도외시한 채 받아들인,
동물과 인간은 완전히 틀리다는 생각에 의거하고 있다.
........
결국 동물은 자기를 외계로부터 구별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도 자아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에 대하여는
모든 동물, 심지어 미생물 속에도 찾아볼 수 있는
무한한 이기주의를 지적함으로써 그
진위를 밝힐 수 있다.
이 이기주의는 어떤 동물이라도 자기의 자아를 외계 혹은
비아(非我)에 대립시켜서 의식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데카르트학파의 학자라도 호랑이에게 잡혀갔을 경우에는,
이 호랑이가 자아와 비아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철학자가 이러한 궤변을 일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일에서도 같은 종류의 궤변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언어들이 그러한 특징을 갖고 있지만
독일의 경우도 동물이 먹고, 마시고, 임신하고, 출산하고, 죽어서 시체가 되는 것을
표현할 때에는 이와 똑같은 과정을 겪는 인간의
행동을 나타내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본래는 완전히 같은 일을 전혀 다른 것처럼 숨기려고 한다.
동물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 선량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동물에게 잔인한 사람은
결코 선량한 자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것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난다.
어떤 영국인이 인도에 사냥을 하러 가서 원숭이를 총으로 쏘았다.
그때 죽어가는 이 원숭이가 그에게 던진 눈초리를 잊을 수 없어,
그 후로는 원숭이 사냥을 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그 사냥에 미치다시피 한 윌리엄 하리스는 사냥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
1836년부터 이듬해 1837년에 걸쳐
아프리카 대륙을 깊숙이 여행한 적이 있다.
1838년 봄베이에서 출판된 그의 여행기 속에서 하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우선 암놈의 코끼리를 쏘아 맞췄다.
이튿날 아침에 쓰러뜨린 코끼리를 찾으러 가보았더니,
이 지방의 다른 코끼리는 모두 도망쳐 버리고
오직 쓰러진 어미코끼리 옆에서 혼자 남아 밤샘을 한
새끼 코끼리가 공포심을 송두리째 동댕이치고 사냥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새끼코끼리는 갈팡질팡하면서 괴로운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 보이고
사냥꾼의 도움을 받기 위해 작은 코로 그를
껴안았다.
하리스는 이때, 자기가 저지른 행위를 진심으로 후회하고
마치 자기가 살인이라도 범한 것 같은 심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양심의 소리' 라고 한다.
/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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