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사람들 삼상 23:19-29
10월 14일 (금)
십 사람들 삼상 23:19-29
19.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21.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22.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그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니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19절).
다윗에게는 도처에 모든 이들이 다 대적자들입니다. 본문은 <십 사람들>이 지금 다윗이 은신한 곳을 사울에게 제보하며 밀고하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십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지파(17:12)에 속한 이들로 같은 혈족인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겠다며 굳이 기브아로 사울을 찾아가 <내려오라> <우리가 그를 왕의 손에 넘기겠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선 그들은 <놉 제사장 대학살 사건>(22:11-19)을 기억하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그렇게 능동적으로 밀고하지 않으면 자칫 다윗을 도와주고 보호하고 있다는 누명을 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는 다윗을 결코 사울의 손에 붙이지 않으실 하나님의 뜻(14절)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던 영적 무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사울이 <십 사람들>의 밀고와 제보를 환영하며 그들을 축복합니다.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21). 그리고 즉각 다윗을 잡기 위해 마온 황무지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가는 길에 급히 전령이 달려와 사울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속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27절). 위기에 처한 다윗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극적인 보호와 지키심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가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방법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베푸십니다. 블레셋 군대가 다윗을 돕기 위해 침공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그 사건을 통해 자칫 생포될 수도 있었던 다윗을 그 위기에서 놓여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 극한 상황에서도 계속 하나님게 물으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함으로써 마침내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시 63편). 이것이야말로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확신하는 자의 진정한 승리일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였던 <십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기 중에도 다윗을 구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시며 미가서 7:7-8 말씀을 옮겨 적어보십시오. -옛 이스라엘 지도에서 <엔게디>(29절)를 특정해 보십시오. 주님, 십 사람들이 아무리 제보를 하고 협조를 해서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잡도록 한다 해도 하나님이 다윗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한에는 다 쓸 데 없는 짓이었습니다. 사울이 급히 출동해 거의 뜻을 이루는 듯 했으나 그 극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다시 블레셋을 들어 그 작전을 다시 실패하게 하셨습니다. 부디 저희로 하여금 인간적인 잔꾀나 교활한 계략보다는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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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이란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경우
“‘하지만’이 들리는 순간 귀는 쫑긋! 머릿속은 비상경계 태세!
진짜 진심은 이 말 뒤에 나온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잘했어! 하지만, 중간 부분 말이야…’ ‘고맙게 생각하지 물론. 하지만…’ 칭찬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감사가 감사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덕분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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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49장 25절
어찌하여 찬송의 성읍, 나의 즐거운 성읍이 버린 것이 되었느냐
Why has the city of renown not been abandoned, the town in which I delight? Jeremiah 49:25 [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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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테크 시대가 될수록
“21세기는 하이테크와 하이터치가 공존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 “21세기는 하이테크와 하이터치가 공존해야한다.” 라고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최첨단 하이테크 시대이다 TV, 인테넷, 모바일, 가상현실, 유전공학, 메모리칩, 디지털,등 과학기술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소위 하이테크 시대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시대로만 가면, 인간은 점점 인간미가 없어지고, 기계화되는 삭막한 사회로 가기에 하이테크 시대가 될수록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의 하이터치를 해 주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삶은 균형 감각이 있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양준원 목사의 ‘하이테크 시대의 하이터치’에서- 하이터치란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놀아주는 기쁨, 가족들과 이웃들과 함께 오락하며 교제하는 즐거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닥불을 펴 놓고, 차 한 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작은 여유의 시간들입니다. 또한 가족과 친구의 영역을 넘어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따뜻한 손길입니다. 오늘도 하이테크 시대에 우리 주변을 돌아보는 작은 사랑의 손길이 되십시오. 하이터치는 상대방을 살리는 사랑의 손길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축복의 시간도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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